나와 민변

제2화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한 곳 대한민국 군대이야기(1)

박찬운 교수 2016. 2. 5. 07:31

나와 민변(2)

 

2화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곳 대한민국 군대, 그 첫번 째 이야기(1) ㅡ내 생애 최대의 치욕을 경험하다ㅡ

 

군문에 들어가다

198737일 경북 영천 제3사관학교에 입소했다. 나는 당시 결혼한 지 5개월 밖에 안 된 신혼이었기에 군 입대는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이 문을 안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영천 3사관학교 장교기초교육을 받던 필자. 1987년 봄

 

당시 3사관학교 교장 김진영(육사17)은 하나회의 핵심이자 12.12 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후일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김진영은 모든 후보생들에게 3기라는 것을 강조했다. 3기란 행군, 사격, 태권도를 말하는 것인데, 행군은 45일간 완전군장을 하고 영천 일대 20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고, 사격은 3사 교정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고경사격장에서 M16의 경우 20발에 16, 권총사격은 20발에 10발을 맞춰야 통과되었으며, 태권도는 일정 급수를 따야 통과되는 것으로, 특수사관 후보생들에겐 굉장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장교 기초교육 중 화산 유격장에서 필자. 저런 훈련을 받을 때는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 애를 먹었다.

 

훈련과정 후보생들과 훈육관들 사이에선 잦은 다툼이 벌어졌다. 동기생들은 때론 훈련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120여 명 후보생들은 밤새도록 토론을 벌렸다. 이런 토론에선 대체로 독수리파가 상황을 주도하지만 나는 거의 매번 비둘기파를 자청했다내 말은 이런 것이었다

 

명분이 없다. 우린 훈련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합당한 근거로 훈련을 거부한다는 말인가. 훈련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법무사관후보생들의 특권의식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한 마디로 훈련거부를 주도하는 동기생들에겐 재수없는, 초치는 말이었다. 내가 그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훈련에 잘 참여했다. 덕분에 내가 의외로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0킬로미터 행군에서도 나는 마지막까지 낙오하지 않은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사격도 잘 통과했다. 다만 지금이나 그 때나 몸이 굳어 있어 태권도는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이것을 통과하려면 다리가 유연해야 하는데 내 다리는 그렇지 못했다. 참다못해 내 다리를 찢겠다고 훈육관 서 너 명이 달려들었다. 광활한 3사 연병장에서 한 밤중에 일어난 이 다리 찢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외친 외마디 절규! 지금 생각해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화산유격장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앞 줄 맨 오른쪽은 윤기원 변호사(전 민변 대표,  법무법인 원 대표변호사)

 

훈련기간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198743일의 일이다. 이 날 우리는 고경사격장으로 사격을 하기 위해 완전군장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다. 부대를 떠나 몇 킬로미터 갔을 때인데 갑자기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왔다.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부대로 복귀했고 강당에 들어가 TV를 시청하였다. 이게 바로 전두환의 4. 3. 호헌선언이다. 5. 18 광주민주항쟁을 유혈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일당은 집권초반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민주화의 요구는 거세졌고 그 초점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으로 모아졌다. 내가 군대생활을 시작한 1987년은 대선이 있는 해였기 때문에 벽두부터 민주화 열기는 거셌다.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져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마지막 뚝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체육관 선거를 계속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선언을 영천 3사관학교 부대 막사 안에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말은 안했지만 내 마음 속에선 이건 아닌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독재국가에서 나는 어떤 군인으로 살아갈까?

 

1987년 6월 나는 육군 중위로 임관되었다. 왼쪽 김덕재 변호사, 중간 김두형 교수(경희대 로스쿨) 그리고 필자

 

뜻 밖에 정치장교가 되다

영천에서 12주 교육을 받고 나서 병과가 나눠졌는데 나는 예상치 않게 정훈병과를 받았다. 그 해 법무병과 TO가 부족해 적잖은 동기생들이 법무병과 외에 헌병이나 정훈 병과 등을 받았는데 그중에 내가 포함된 것이다 . 정훈장교? 이게 무엇인가. 군대 내에서 정치사상 교육을 담당하는 장교였다. 그러나 현실의 주된 임무는 북한과의 사상전에서 이기기 위해  장교와 사병에게 이념교육을 시킨다는 명분하에 정권을 보위하는 이념교육을 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병과교육을 위해 그해 6월 서울 수색에 있는 국군정신전력학교로 올라왔다. 이 학교에서 우리 동기생들은 공산주의, 민주주의, 남북체제비교, 남북한통일방안 등을 교육받았다. 많은 동기생들이 이 교육엔 큰 관심이 없었다. 잘해 보았자 전두환 정권의 호헌선언을 옹호하는 일이나 할 텐데 무슨 흥미가 있었겠는가?

 

훈련기간 중 산업시찰을 할 때 동기생들과 함께. 1987년 여름

 

우리가 교육받고 있던 시기 서울 도심은 난리가 나고 있었다. 역사는 그것을 6월 민주화 항쟁이라 부른다. 연초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시위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6월 초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도중 사망하자 장례물결이 서울 한복판을 뒤 엎었다. 100만 인파가 나왔다고 하는데 지금으로선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이었다. 명동근처에선 넥타이 부대가 나타나 시위대에 동조했다

 

나는 이런 상황을 수색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알고 있었고, 주말에 집에 오면서 시위현장을 목도하기까지했다. 하지만 나는 정복을 입은 장교였다. 아무 것도 함께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기보다는 불의한 정권을 지키는 국군장교였다. 자괴감이 컸다.

 

1987년 여름 11사단 전입을 마치고 사단장 김동식 장군과 함께. 맨 왼쪽이 남재준 참모장.

 

내가 배치된 자대는 강원도 홍천의 육군 11사단 사령부였다. 이 사단은 1군의 예비사단이었지만 후일 이곳을 거쳐 간 군인들이 승승장구함으로써 유명해진 부대다. 특히 사단 참모장들이 출세를 했는데, 내가 부임했을 때 사단 참모장은 남재준 대령이었고, 재직 중에 바뀐 후임 참모장이 김장수 대령이었다. 남재준은 이명박 정권에서 국정원장을 하면서 남북정상회담 기록물을 공개해 버린 바로 그 사람이고, 김장수는 이명박 정부의 국방부장관을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도 안보실장을 역임하다 지금은 중국대사로 가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이곳에서 정치장교가 아닌 참군인도 만났다. 당시 작전장교를 하던 권태오 소령인데, 이 사람은 3사 출신으로 육사출신이 득세하던 상황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후일 수도군단장을 역임했고 2년 전 국군의 날 행사에선 제병지휘관을 했다. 한미연합작전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능력자로 통한다. 아쉽게도 이런 인물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 4성 장군으로 발탁되지 못하고 3성장군으로 전역하고 말았다. 

 

차별받는 법무출신 정훈장교, 거기에서 얻은 교훈

나는 사단 민사심리전처에 소속되었는데 바로 몇 미터 떨어진 법무참모실에 틈만 나면 동기생인 송00 중위를 만나러 갔다. 부대 장교들도 나를 정훈장교로 대하기보다는 법무장교로 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신분은 엄연히 정훈장교, 그로 인해 나는 매일같이 우울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법무병과로 배치되었다면 좀 더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을 텐 데 정훈병과로 오는 바람에 내 정체성이 모호해졌다는 게 내 우울함의 원인이었다. 자고로 사람은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당시 매일같이 경험했다. 이런 감정은 나뿐만 아니라 비법무병과로 배치된 많은 동기생들이 공히 느끼는 것이기도 했다.

 

위병근무는 피곤했지만 보람스런 시간이기도 했다. 위병임무로 밤을 새우면서 병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병사들은 나를 무척이나 따랐고 선생님이라 했다. 제대 후인 1990년 5월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위병근무를 함께 하던 부산 청년 김영현으로부터 온 것이다. 편지에서 그는 나에 대해 "우리 경비소대원들의 인기를 독점하셨던 박중위님 저의 질문에 단 한 번도 주춤하시지 않고 피곤할 정도로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경제신문을 애독하신 박중위님이 저에겐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표현했다. 영현아!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법무장교에 비해 차별로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위병근무였다. 법무장교는 위병장교 임무를 맡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매월 한두 번 위병초소에서 위병장교 임무를 맡아 밤을 새워야 했다. 또한 법무장교는 출퇴근 시간만 지키면 되지만(어떤 친구들은 그것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나는 참모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지만 민심참모 이00 소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양반은 퇴근 무렵에 자주 발동이 걸렸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무시하고 참모님, 저는 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하고 퇴근버스를 탔는데(이걸 안타면 집에 가기가 어려웠다. 참모들은 짚차가 있으니 늦게 퇴근해도 불편함이 없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그 양반에겐 이게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집에 퇴근해 있는데, 전화가 왔다. “참모님이 들어오시라는데요.” 다시 군복을 입고 들어가 보니 참모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나를 보며 어이 박중위, 참모가 퇴근을 안했는데 그렇게 나가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정훈장교 시절 민심처 가족들과 함께. 내 왼 쪽은 전북대 로스쿨 원장을 지낸 이준영 교수, 윗 줄 맨 오른 쪽은 내 페친인 최규형씨.

 

민심참모는 이재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80년대 후반 우리 주식시장이 한참 활황일 때, 이 사람은 전방부대에 있으면서도 주식투자를 해 재미를 쏠쏠히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을 보면서 우리나라 장교 중에는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에도 밝은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 보니 그가 내게 준 선물도 있었다. 다름 아닌 아랫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교훈이었다. 그는 나에겐 반면교사였던 것이다.

 

나는 그로 말미암아 군을 제대한 후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퇴근시간만큼은 확실히 보장해 주는 윗사람이 되었다. 변호사 일을 할 때 오후 5-6 시경 밖에 있을 때면 의례히 나는 이런 전화를 사무실에 했다

 

, 나는 조금 늦게 사무실에 들어갑니다. 모두들 퇴근하세요. 나만 혼자 남아서 일한다고 미안해 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사단 변호인으로, 그 흔하지 않은 에피소드

11사단 정훈장교를 하면서도 나는 부대 재판이 있을 때는 변호인으로 곧잘 재판에 관여했다. 지금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부대 공개재판이 있었을 때였다. 지금이야 이런 비인권적 공개재판이 없어졌겠지만 내가 군대생활 할 때만도 부대 연병장에서 수 백 명 병사들을 모아 놓고 자주 이런 재판을 했다. 부대 군기사고를 줄인다는 명분으로 중인환시에 피고인을 엄벌함으로써 예방적 효과를 얻고자 했던 것이었다.

 

11사단 군사재판에서 변호하는 필자

 

하루는 예하부대에서 공개재판이 열렸다. 부대 내에서 한 병사가 다른 병사를 구타한 사건이었는데 피고인은 구속 중이었다. 이 사건은 소위 반의사불벌죄로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범죄였다. 재판부가 이 날 내 변호능력을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나는 재판 당일 법무참모의 짚차를 빌려 피해자가 있는 부대를 방문해 피해자자를 만났다. 그리고 잘 타일렀다.

 

“최상병, 그 친구 꼭 징역 보내야겠어?” “아닙니다. 저는 그럴 생각 전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가자” 

 

나는 이렇게 피해자의 의사를 타진한 후 공판 진행과정에서 그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피해자가 증인석에 섰다. 나는 간단히 물어 보았다

 

증인, 피고인의 처벌을 지금도 원합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재판은 종료되었다. 공소기각! 법무참모를 비롯한 담당 검찰관의 얼굴 색이 변했다.  

 

아니, 박중위, 정말 그럴 수가 있어요? 아니 그 사건 공개재판인데, 공개재판에서 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재판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요? 아주 우리를 개박살 내는군요?” “하하하. 000검찰관, 너무 화내지 마시오. 그게 변호인이 할 일 아닌가요?” 

 

사실 이런 일은 내가 법무관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홍천 11사단으로 배치되고 부대 아파트인 화랑아파트 거주 시절, 아파트 옆을 지나는 홍천강 강가에서 필자.

 

내 인생 최대의 치욕, 내게 이런 일이 일어다다니!

내가 군대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을 말하자고 하면 며칠 밤을 새워도 될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몇 가지만 추려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지면상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 보자. 사실 이 이야기는 지난 30년간 단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내 치부에 관한 것이다. 지금도 이것을 여기에서 공개하는 게 맞는지 한참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를 알아왔던 친구들, 제자들,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놀랄 것이다. 그만큼 나와 나를 아는 이들에겐 쇼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교문 앞에서 기율부 선생님으로부터 장발단속에 걸려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인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다행스럽게도 내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권에 대해서 잘은 몰랐지만 어릴 때부터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말을 들어 왔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그런 일은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군대에서 일어났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어엿한 법률가 자격을 딴 사람이, 그것도 남달리 자존심이 센 내가 그 희생양이 되었단 말이다. 11사단 부임초기 인사참모를 통해 간부 용모에 대한 지침이 내려왔다. 그 중엔 두발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장교들도 머리를 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 머리는 보병 장교들보다는 조금 길었지만 법무병과 친구들에 비하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었는데 내 머리가 걸린 것이다. 어느 날 인사참모가 부대 내 장교와 하사관을 집합시켰다. 인사참모 홍00 중령이 쓱 지나가면서 손가락으로 나를 지적을 하면서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몇 몇 장교와 하사관이 그 지시에 따라 따로 줄을 섰다.

 

귀관들은 머리를 짧게 깎으라는 상관의 명령을 위반했으니 지금부터 그 대가를 지불토록 한다. 한 사람씩 앞으로이에 따라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홍중령의 바리깡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수치스러웠다. 어떻게 할까? 인사참모 손을 잡을까? 나는 이런 구시대적 비인권적 처사에는 따를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가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 차례가 되었다. !! 이런... 내 머리가 잘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한 동안 부대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상해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내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런 순간이었다. 어어..하다가 당한 사태였다. 내가 자식들에게, 제자들에게 매일 같이 당부하는 게 이런 치욕스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을 당하면 한강 물에 빠지라고 소리를 칠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왜 나는 거부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 순간 법률가임을 포기했을까? 왜 나는 그 순간 이것이 인권침해요! 라고 소리치지 못했을까? 군대였기 때문에? 다들 순응하고 인사참모의 바리깡 세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지난 30년간 내 삶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인권감수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 사건이었고 위법부당한 처우를 당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를 생각게 한 사건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 또 결심했다.

(2016. 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