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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고전강독9 자유주의 이론의 정수 ‘자유론’에 다가가기

박찬운 교수 2016. 5. 16. 05:20

인권고전강독9

 

자유주의 이론의 정수 자유론에 다가가기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공부라는 것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는 친구가 다 학자가 되진 않는다. 학자는 공부를 잘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되는 법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기는 인내를 잘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어떤 학문적 성과도 이룰 수 없다


인내는 오랜 시간 땀을 내는 과정이다. 때론 신체에 무리가 가기도 하지만 견뎌야 한다. 무언가 성과를 내기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자는 이것을 견뎌 어떤 학문적 성과를 내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성과를 내기 위해, 다시 인내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을 업으로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학자다.

 

인권강독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 강독을 하는 내 모습도 기본적으론 저 인내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강의에, 외부회의에, 때론 페북에서 대중과의 소통에... 내 일상은 사실 바쁘지 않은 날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시간이 온전히 확보되는 밤 그리고 이른 새벽에, 고전을 읽고,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밑줄을 긋고, 그것을 옮겨 적는다.

 

그런 다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글을 쓴다. 이렇게 해서 하나하나 내 강독이 완성되는 데, 비록 이것이 큰 학문적 성과는 아니라도, 내겐 하나하나 땀의 소산이다. 글 한 줄 한 줄을 기도하는 맘으로 쓴다. 이것이 없으면 나 박아무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근대 자유론의 정점, <자유론> 과 저자 존 스튜어트 밀

 

근대국가에서의 자유 혹은 인권의 의미는 17세기 이후 꾸준히 발전했다. 그것은 주로 개인이 국가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의 문제였다. 개인은 국가에 어떤 권리가 있고, 국가는 개인의 권리에 어떻게 개입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인권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 핵심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유였다


개인은 국가에 대하여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근대 인권사상가들에겐 최고의 관심사였다. 이 자유론은 19세기 그 정점에 도달했다. 누군가에 의해 그 이론이 종합적으로 정리될 단계에 이르렀다. 위대한 고전으로 불리는 <자유론>(1859)은 그런 시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자유론>의 저자는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다. 밀은 경제학자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영재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세에 보통 30세 이상이어야 소화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했고, 15세에는 경제학, 역사학, 철학, 자연과학에 정통했다. 17세부터 동인도회사에 취직해 일과 저술활동을 병행했다. 아버지 친구인 벤담의 영향을 받아 공리주의 철학을 받아들였으나 꾸준히 다른 지식을 섭렵해 경직된 공리주의를 포기했다.

 

밀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소개할 사람이 있다. 한 여성이다. 밀은 나이 24세 때 아름다운 여인 헤리엇 테일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유부녀. 이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관계는 길었고 마침내 그 둘은 이승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테일러의 남편이 죽자 둘은 결혼을 한 것이다


밀이 테일러로부터 받은 영감이 무엇이었을까?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이곳에선 그 이야기를 쓰는 게 목적이 아니니 길게 쓰는 대신 밀이 <자유론>을 내면서 책머리에 붙인 헌사 일부를 옮긴다.

 

나는 이 책을 나의 저술 중에서 최선의 모든 것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 일부를 직접 쓰기도 하였던 여인에 대한 사랑스럽고도 애도에 찬 추억에 바친다. 그녀는 나의 친구이자 부인이었고, 그녀가 진리와 정의에 대하여 보여 준 고귀한 의무감은 나에 대한 가장 강렬한 격려가 되었고, 그녀의 추인은 나의 주요한 보상이었다. 내가 수년간에 걸쳐 썼던 모든 저술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나의 것인 동시에 그녀의 것이기도 하다....”(헌사 중에서)

 

<자유론>의 핵심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근대사상으로서 자유의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밀의 <자유론>을 읽어야 하고 그 핵심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인권 그중에서도 우리가 누려야 하는 자유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밀의 <자유론>을 읽는 것은 단지 지적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실천적이다. 내 자유,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자유론>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분량이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밀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꼭 집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을 하기 위해선 인내를 갖고 우리의 지적역량을 동원해야 한다. 나는 이 설명을 위해 국내에 번역된 두 권의 책을 활용했고, 이 두 권으로도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 영어 원문을 직접 보면서 그 의미를 파악했다


철학자 김형철 교수가 번역한 <자유론>(개정판, 서광사)은 비교적 원문을 그대로 번역했으면서도 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법학자 박홍규 교수가 번역한 <자유론>(문예출판사)도 수준급이며 특히 각 장의 서두와 맨 뒤에 붙인 해제가 좋다.

 

나는 이 짧은 글에서 <자유론>을 세밀하게 설명할 수 없다. 짧지만 아주 선명하게, 밀의 생각을 그의 글에서 직접 찾아 인용하면서, 강독의 형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가급적 밀의 이야기는 길게, 내 설명은 짧게 할 것이다. 이런 설명 방법이 얼마나 성공할지... 


이제 독자들이 해야 할 몫은 집중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기 위해 눈에 불을 밝히자, 그러면 그 뜻이 서서히 나타날 것이다.

 


<자유론>의 핵심사상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밀이 그린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였다. 국가가 개인의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허용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그렸다. 그것은 밀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책 중간에서 독일 철학자 폰 훔볼트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

 

모든 인간이 끊임없이 힘써 노력해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동포를 이롭게 하려는 사람들이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목적은, 개성을 활기차게 발전시키는 데 있다.”(박홍규/131)

 

이 말은 인간을 최대한 다양하게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절대적이고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회,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밀이 자유론을 쓴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밀은 책 첫 장에서 글의 목적을 분명히 쓰고 있다. 사회가 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원칙이 무엇이냐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면 혼자서 마음대로 살 수는 없다. 사회 내에서 일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며, 타인과의 조화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자유가 언제나 절대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선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분명하고도 합리적인 규칙이 있어야 한다. 도대체 그 규칙이 무엇일까?

 

이 논문의 목적은 강제와 통제의 방법으로써사용수단이 형사적 처벌의 형태인 물리적 힘이거나 공공여론의 도덕적 강제이거나 간에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방도를 절대적으로 규정짓는 자격을 갖추게 될 대단히 간단한 한 원칙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 원칙은 인류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어느 한 개인의 자유에 정당하게 간섭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방어라는 것이다. 권력이 문명사회의 한 구성원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정당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해악을 방지하는 것이다.”(김형철/29)

 

<자유론>의 핵심이론을 많은 학자들은 해악이론(harmful theory)이라명명한다. 위 인용문은 바로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는 유일한 정당성은 그 개인이 타인에게 해악을 가할 때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에게 해악을 끼쳐 사회(국가)로부터 간섭(물리적 강제력)을 받게 되는 경우는 그의 행동이 타인과 관련성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만일 그 행동이 다른 사람과 관련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런 일은 아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구의 간섭을 받고 사는 것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자유스럽게 사는 게 좋다. 그렇게 살면 세상은 다양성이 확보되고, 그것이 곧 인류의 삶에 더 큰 혜택을 주는 것이다. 밀은 이에 대해 이렇게 역설한다.

 

“... 그 물리적 강제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가 행하지 못하도록 제지당하는 행위가 타인에게 해악을 조장할 것이라는 사실이 예측되어야만 한다. ... 단순히 자신에게만 연관된 부분에 한해서,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서 주권자이다.”(김형철/30)

 

자유라는 이름에 합당한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타인의 행복을 탈취하려고 시도하거나, 행복을 성취하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선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 각자가 자신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각 개인을 타인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도록 강제하는 것보다 인류에게 큰 혜택을 준다.“(김형철/34)

 


다양성 사회를 위한 전제조건 사상의 자유

 

밀이 <자유론>을 쓰면서 가장 신경 쓴 자유의 항목은 사상의 자유이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이 자유만큼 중요한 게 없다. 이 말을 계속하기 전에 밀이 <자유론>에서 생각한 자유의 세 영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 첫 번째 영역은 의식의 내면적 영역이다.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취향과 탐구의 영역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자유의 영역이다. 우리의 생활을 우리 자신의 성격에 맞도록 계획하는 자유 등이다. 세 번째는 개인의 자유를 넘어 개인들이 단결하는 자유의 영역이다. 결사의 자유라고 할 수 있다.

 

밀은 이렇게 자유의 영역을 구별하면서 첫 번째 영역은 기본적으로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다. 나아가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의 연장선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함도 주장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영역은, 우리가 타인에게 행복을 뺏으려 하지 않는 한, 또는 타인이 행복을 얻고자 노력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이렇게 밀은 한 문명국가의 전제로서 사상의 자유(거기에서 연장된 표현의 자유)는 거의 절대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자유론>에서 독립의 장을 할애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의견이든 그 주장을 부인하지 말고 공론의 장에 올려 놓고 함께 토론해야 한다


비록 어떤 경우엔 문제된 의견이 세상 사람들 중 극히 소수, 극단적으론 단 한 사람만이, 주장한다 해도 우리는 그 침묵을 요구할 수 없다. <자유론>의 이 부분은 굳이 해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논지가 분명하다.

 

비록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의견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도 부당하다.... 의견 발표를 침묵케 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해악의 특수성은 현세대와 차세대를 포함한 전 인류의 행복을 강탈한다는 사실과,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보다는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손실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교환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만일 그것이 틀리다면, 진리가 오류와 충돌하면서 발생하게 되는 진리에 대한 더욱 명백한 인식과 더욱 선명한 인상을 상실하게 되는 엄청난 혜택의 손실을 입게 된다.”(김형철/42-43)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고칠 수 있다. 단순히 경험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경험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를 밝히려면 반드시 토론이 필요하다. 잘못된 의견과 관행은 점차 사실과 논의에 복종하게 되지만, 사실과 논증이 인간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려면 먼저 그것이 인간 정신 앞에 제시되어 판단되어야 한다. 그 자체의 의미를 드러낼 평가 없이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실이란 거의 없다.”(박홍규/65)

 

우리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해 볼 것은 우리의 현실이다. 밀의 이야기는 어떤 사상이라도 그 침묵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혹 위험한 사상이라도 사상의 자유시장에 올려놓고 토론을 해보아야 한다. 무엇이 무서워서 그리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세상에 필요 없는 사상이라면 시간이 가면서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게 순리다.

 

밀이 죽은 지 150여 년이 지난 대한민국은 어떤가? 우리의 머리를 스치는 것들, 국가보안법? 아직도 금서타령이다. 국가가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으면 불이익을 당한다. 국정교과서? 국가가 일부 역사책을 좌편향 교과서라고 하면서 학생들의 머리를 단순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역사책을 직접 만든다. 밀이 환생해서 이런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국가는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밀이 복잡하게 논증한 것 같지만 그의 입장은 초지일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의 행동이 타인의 이익(권리)를 침해했을 경우에만 법으로 규제하라는 것이다. 그 전에는 설혹 기분 나쁘더라도 개인의 행동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관계된 일에서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살 권리가 있다. 국가는 이것을 인정하고 그런 방법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밀이 원하는 정부는 큰 정부가 아니고 작은 정부다. 국가가 개인의 생활에 간섭을 최소화한다면 그 기능이 많으면 안 된다.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 Small is beautiful!

 

어떤 사람의 행동 일부가 타인의 이익에 해를 끼치면 사회는 이를 법으로 규제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러한 간섭에 의해 일반적 복지가 증진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행동이 자신 외의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거나, 타인이 원하지 않는 한(여기서는 성년에 도달하여 정상적인 이해력을 갖는 사람만을 고려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의 이익에 영향을 줄 필요가 없는 경우, 그런 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없다. 그 모든 경우에는 그러한 행동을 하고, 그러한 결과에 책임지는 완전한 법적·사회적 자유가 인정되어야 한다.”(박홍규/165)

 

한 개인은 자신과 관계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자유로워야 한다. ... 국가는 자신에게만 특별히 관계되는 일에 있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에 국가는 그의 권력 행사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김형철/183)

 

이런 국가만이 위대한 국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국민의 개성을 살려주고 그 개성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만이 국민들은 능력을 발휘해 위대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만가지 개성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사회가 위대한 사회라는 이야기다. <자유론> 을 끝내면서 밀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염원을 표현한다. 생각하면, 이것은 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염원이다.

 

국가의 가치란, 궁극적으로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가치다. 개인의 정신적 발달과 향상이라는 이익을 뒤로 돌리고, 세부의 사소한 사무를 처리하는 행정기능, 또는 경험에서 얻게 되는 사이비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 국가, 도한 국민을 위축시켜 국가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온순한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비록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도) 국가는 머지않아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 국민이 위축되면 어떤 위대한 일도 실제로 성취할 수 없고, 또 국가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완전한 기구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기구를 더욱 원활하게 운영하려고 한 나머지, 스스로 배제한 바로 그 구성원의 활력의 결여로 인해, 결국은 그러한 기구가 쓸모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은 알게 될 것이다.”(박홍규/241)



한 가지 더, <자유론>의 한계


<자유론> 강독을 끝내면서 한 가지 부연설명을 할 것이 있다. 밀이 말하는 자유의 성격이다. 밀의 자유는 국가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state)다. 즉,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이다. 이것은 국가의 간섭억제로서 가능하다. 즉, 국가가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기보다는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자유다. 


양심의 자유를 보라. 국가가 한 개인의 생각에 간섭을 하지 않으면 보장되지 않겠는가. 학자들은 이런 자유를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라고 부르며, 19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에 요구된 자유였다고 한다. 밀의 자유론은 바로 이 소극적 자유를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개인의 자유는 국가의 불간섭으로만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국가의 일정한 개입이 있어야만 개인의 자유가 실직적으로 보장된다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도 그게 순수한 개인의 생각의 자유이니 국가가 불간섭하기만 하면 보장된다고 볼 수 없다. 


생각이라는 것도 많은 경우 교육의 소산으로 일정한 지적 수준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면 한 개인이 일정한 지적 수준을 확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의 교육을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양심의 자유를 순전히 소극적 자유라고만 보는 것도 문제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가 필요한 적극적 자유의 일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밀의 자유론은 바로 이 지점이 한계다. 이것은 밀만의 한계가 아닌 19세기 자유론의 한계다. 그러니 이것을 밀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논의는 밀의 사후 한 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2016.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