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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고전강독 14 인권의 새로운 패러다임

박찬운 교수 2016. 6. 2. 06:20

인권고전강독 14(최종)

 


인권의 새로운 패러다임

샌드라 프레드먼의 <인권의 대전환>

 

 



새로운 인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인권이란 분명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이 있지만, 한편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100년 전, 200년 전의 인권이 오늘 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시대에 따라 인권의 내용은 달라졌고 그 실현의 정도도 달랐다. 인권의 흐름을 회고하면, 인류는 18세기 이후 국가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했고(1세대 인권), 19세기엔 사회주의 운동과 더불어 평등()을 요구했으며(2세대 인권), 20세기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평화와 연대의 권리(3세대 인권)를 추구하였다.

 

이런 변화과정 속에서도 홉스, 로크, 그리고 루소에 의해 형성되고 밀에 의해 완성된 근대인권사상은, 아직도 인권개념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기에 수세기 전 형성된 인권사상만으로는 오늘 우리의 인권문제를 전부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근대인권사상을 넘어 새로운 인권개념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시대는 어떤 새로운 인권개념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런 인권개념은 국가에게 어떤 새로운 의무를 요구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르고 고른 책이 샌드라 프레드먼의 <인권의 대전환>(조효제 옮김)이다. 이 책을 인권고전의 반열에 올리기는 아지 시기상조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현대 인권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책으로 이만한 책도 없다. 문제는 이 책이 매우 전문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전달하는 나로서도 적잖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인권고전강독을 수미일관하게 완성하기 위해선 이 책의 정수를 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란 생각을 갖는다. 부디 이 책을 통해 21세기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인권사상이 무엇인지 그 내용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첫 번째 대전환, 인권의 속성이 변하다

 

인권은 간섭의 배제

프레드만이 말하는 인권의 대전환의 첫 번째 내용은 인권의 본질적 속성이 대전환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 우선 전통적인 인권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랫동안 인권은, 잠재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국가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는 기능을 주로 수행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인권은 국가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하라는 적극적 의무가 아니라, 개인에 대해 부당한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할 자기 억제의 의무(duty of restraint)를 부과한다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견해의 바탕에는 일련의 특정한 가치들이 자리 잡고 있다. ,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생각하고, 국가를 개인과 분리되고 개인과 대립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개인의 도덕적 선택에 대해 국가는 왈가불가하지 않는다는 원칙 등이다.”(77)

 

근대인권 개념은 주로 자유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자유는 주로 시민적, 정치적 자유로 불리는 것으로, 신체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등을 말한다. 이들 자유의 속성은, 국가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보면,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국가가 개인의 각각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그저 방해하지 않으면이를 자기 억제 의무라 한다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는 간섭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거리에서 경찰관이 걸어가는 시민을 영장 없이 체포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국가가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자유를 말할 때, 국가가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영장 없이 시민을 마구잡이로 체포하는 것을 중단하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는 불법체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소극적 의무만을 실천하면 신체적 자유는 보장되는 것이다.

 

 

인권은 역량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인권개념은 일대전환을 맞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론 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출판의 자유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자유는 종래 국가가 개인의 출판에 대해 간섭하지 않으면 보장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개인이 출판할 능력이 없다면 국가의 불간섭의 상태가 있다고 해서 개인이 이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개인이 교육을 못 받아 문맹인 경우, 글을 쓰지 못하는 데, 무슨 출판의 자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선 개인의 출판의 자유는 사실상 종이 위의 권리에 불과하다.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론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출판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 없다면 사실상 출판의 자유는 의미 없다.

 

이에 대해 프레드만은 후생경제학자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의 역량이론을 소개한다.

 

센은 자유를 간섭의 부재로 보지 않고, 주체 행위 또는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러한 선택에 맞춰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센에게 자유란, 어떤 사람이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것을 행하거나, 소중하게 여기는 상태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성취할 수 있느냐는 경제적 기회, 정치적 자유, 사회적 권력, 그리고 양호한 건강 및 기본 교육 같은 조건, 독창성의 격려와 함양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유를 이런 식으로 규정하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자유와 반대되기는커녕 가 된다.“(81-82)

 

미국의 철학자 마사 너스봄은 센의 역량이론을 한 단계 법적 개념으로 올렸다. 자유의 본질적 요소가 역량(능력)이라면, 자유의 의무자인 국가에겐, 간섭의 배제 이상의 의무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개인의 역량을 일정부분(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하한선) 국가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적극적 의무이다. 국가가 개인의 역량에 무관심하다면 개인의 인권은 실질적으론 보장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스봄은 역량이론을 통해, 시민들이 자기 정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헌법적 핵심 원리의 기초를 설명하려고 한다. ... 너스봄은 어떤 역량 이하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기능할 수 없는, 역량의 하한선(역치, threshold)을 설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시민들이 이러한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목표와 대응해서 너스봄이 주장하는 권리는, 국가에게 인간 기능의 최소한의 하한선을 보장해줄 적극적 의무를 부과한다.”(83)

 

그러나 인권 개념의 이런 전환에는 상당한 저항이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사야 벌린이 그런 저항의 선두에 선 사람인데, 그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무로서 간섭의 배제라는 소극적 의무 외에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 조치를 취한다면 자유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벌린이 목격한 20세기의 사회주의 국가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선 개인의 역량을 평등하게 올리기 위해 배분을 국가가 통제한다. 벌린은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선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상실케 하는 전체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벌린은 평등이나 정의 등의 목표를 위해서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또한 자유를 보호하는 것만이 국가의 유일한 기능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유 외의 다른 목표를 채택한다는 것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국가가 빈곤을 줄여서 개인들의 속박을 제거하는 쪽으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자유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79)

 

 

두 번째 대전환, 개인과 국가의 관계가 변하다

 

근대인권 사상 하에선, 기본적으로 개인의 인권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것이지, 국가나 사회와는 무관하다. 홉스, 로크, 루소의 자연권을 생각해 보라. 자연권은 국가가 탄생하기 전 자연상태에서 개인이 누린 권리가 아닌가. 그런데 새로운 인권개념에선 이와 같은 사고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인권은 국가와 개인의 대립적인 관계에서 국가로부터 쟁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와의 상호관련(상호인정)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단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 이상의 이유 때문에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의 도움이 없으면 개인은 온전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도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인정과 인간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개인의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주체들 상호간의 인정에서 비롯된다고 한 헤겔의 토대론적 견해(foundational view)에 근거를 두고 있다. ... 인권은 개인이 사회보다 우선한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94-95)

 

이런 사고는 인권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선 국가나 사회의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철학적 인식이 필요하다. 국가에게 인권 실현을 위한 적극적 의무를 부여하기 위해선 국가와 개인을 대립적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를 거대한 거물, 리바이어던이라고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국가는 나의 역량을 강화해 주고, 내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 없이는 내 인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국가 속에서 그것과 협력해 인권신장을 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국가와의 협력관계가 언제나 원만할 수는 없다. 국가가 인권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는 명분 아래 그 권력을 남용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 면에서 벌린의 경고는 유효하다. 때문에 국가의 적극적 의무엔 항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신장시키고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레드만도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인권에서 비롯되는 적극적 의무가 있다고 해서 국가가 자기 권력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위임받은 것은 아니다. 적극적 의무가 국가에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 요구가 국가에게 자기 억제를 요구하는 의무에 비해 더 많은 운신의 폭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 실질적 자유와 연대와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더욱 증진하지 못할 때에는 정당화되지 못한다.(108)

 

 

세 번째 대전환, 자유권과 사회권, 그 경계가 허물어지다

 

인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된다. 자유권과 사회권. 우리 헌법상 규정되어 있는 기본권도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신체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등등은 자유권, 교육 받을 권리, 주거에 관한 권리, 보건에 관한 권리 등은 사회권으로 분류된다. 아마 우리가 가입한 국제인권규약이란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두 개의 중요한 인권조약이 있는데, 하나가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고, 다른 하나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다. 전자가 주로 인권 중 자유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간단히 자유권규약이라고 하고, 후자가 사회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사회권규약이라고 한다.

 

종래 인권을 이렇게 나눈 이유는 그 인권의 종류에 따라 보장방법이 구별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유권 영역은 앞서 인권의 속성에서 보았듯이, 국가의 간섭 배제, 곧 국가의 소극적 의무의 이행으로 인권이 보장되기기 때문에, 국가는 즉시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있고 또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국가가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개인은 사법에 호소할 수 있다. 법원에 가지고 가 국가의 인권침해에 대해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본 예를 생각해 보자.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법은 국가가 개인의 신체에 침범하지 않으면 된다. 길거리에서 무고한 시민을 잡아가지 않으면 개인의 신체의 자유는 보장되는 게 아닌가. 만일 국가가 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권리자인 시민은 국가에게 그 인권침해의 중지를 요구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경찰공무원의 불법적인 체포는 그 자체가 범죄이며,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반면, 사회권 영역은 자유권과는 달리 국가의 적극적 의무가 전제되어야 하므로 당장 그것을 이행하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돈이 들고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권리는 권리를 보장 받지 못했다고 해도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청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교육받을 권리가 대표적인 사회권이다. 개인에게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 차원에선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국가가 가만히 있어가지고서는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게 아니다. 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 국가는 학교를 짓고, 교사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은 자유권과 달리 국가가 하지 않음으로써가능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해야 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런 적극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선 돈이 들어간다. 그러니 그 권리가 헌법상에 규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국가가 지금 당장 그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목표로서 그렇게 해 나가겠다는 것을 정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이 이런 권리를 보장 받지 못했다고 해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없다. 소송한다고 해서 법원이 쉽게 받아줄 리가 없다. 이렇게 전통적인 인권관은 자유권과 사회권 사이에 분명하게 경계선을 치고 차별적으로 대우해 왔다는 것이다.

 

인권에 관한 전통적 접근 방식에서는 개념군 주변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곤 한다. 국가가 자기 억제를 하는 소극적 의무는 자유를 보호하는 시민적 정치적 권리이고,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평등을 신장하는 경제적 사회적 권리라는 식이다. 전자는 사법 심사에 적합한 권리인 반면, 후자는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단지 어떤 포부를 나타내는 권리라는 주장도 있다.(181)

 

그런데 프레드만은 이런 자유권과 사회권의 구별 그리고 그에 따른 국가의무의 차이가 이젠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이 새로운 인권 패러다임의 중요한 내용이라고 설명한다. 그 요지는 자유권-소극적 의무, 사회권-적극적 의무라는 도그마를 깨자는 것이다. 어떤 인권이든지 국가의 의무를 분석하면, 국가는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를 동시에 갖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게다.

 

... 어떤 권리가 적극적 의무를 발생시키느냐 또는 소극적 의무를 발생시키느냐, 하는 점에 근거해서 그 권리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권리는 각각 일련의 의무를 발생시킨다고 보는 것이 더 유용한 방식이다. 이중 어떤 의무는 국가에게 간섭을 못하도록 하게 하고, 어떤 의무는 적극적 행동과 자원 배분을 요구하기도 하다. 헨리 슈는 ... 의무와 종류와 권리의 종류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모든 권리에는 세 가지 종류의 의무가 존재한다. 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려면 이 세 가지 의무가 모두 달성되어야 하지만 모든 의무를 단일 인물 또는 단일 기관이 추구할 필요는 없다.” 슈는 이 세 가지 의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회피할 의무’(duties to avoid)’, ‘보호할 의무(duties to protect)’. ‘지원할 의무(duties to aid)’가 그것이다.(187-188)

 

국제인권법에선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런 관점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왔다. 그 결과 최근엔 자유권이든 사회권이든 국가 차원에선 세 가지 의무가 있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위 인용문의 세 가지 의무와 유사한데, 존중의 의무(obligation to respect), 보호의 의무(obligation to protect), 충족의 의무(obligation to fulfil)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중에서 존중과 보호의 의무는 즉시이행이 가능하며, 충족의 의무는 점진적 이행을 요구할 수 있는 의무로 간주된다. 이렇게 보면 사회권이라 할지라도 즉시이행의 의무가 발견되고, 그에 따라 사법부가 재판을 통해 권리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가 쉬워진다.

 

 

네 번째 대전환, 사법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

 

프레드만이 강조하는 마지막 이야기는, 앞서 본 자유권과 사회권의 이분법을 극복한다면, 거기에서 사법부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이다. 사법부는 인권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정밀한 분석을 해보면 제한적인 역할을 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사법부를 살피면, 자유권 영역의 인권보장을 사법부 역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해 사회권 영역은 사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인식하는 분위기다. 국가가 개인에게 적극적으로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므로, 권력분립의 원칙상, 사법부가 그것을 강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강제하는 데 법원의 역할은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 국가의 적극적 의무 개념은 국가가 정당하게 행동할 수 있는 권한 범위를 넘는 월권행위라는 견해도 있으며, 그런 개념이 사법부로 들어오면 법원의 권한이 과도하게 확장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국가의 자기 억제 의무는 즉시 시행할 수 있고 한번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적극적 의무는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한 행위이다. 따라서 적극적 의무는 흔히 법원의 제도적 역량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해진다. ... 따라서 국가의 자기 억제 의무에 관련된 사법심사적합성(justiciability)’은 보통 인정되지만(물론 아직도 이론상 쟁점이 남아 있지만), 적극적 의무는 사법심사가 통하지 않는 정치행위로 여겨지곤 한다.(231-232)

 

하지만 사회권 영역이라고 해서 사법부의 심사대상에서 제외하면 사회권의 신장은 크게 기대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사회권은 항상 2류 권리에 불과하며 결국 종이 위의 권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래서 인권전문가들은 이 영역의 사법심사가능성을 중시해왔고, 그것을 위해, 위에서 본대로 자유권과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시도를 해왔던 것이다.

 

... 사법심사적합성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목적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적절한 수단일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사법심사적합성에서부터 사법심사 부적합성에 이르는 기존의 여러 논변들을 재론하기보다 민주주의 원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법원의 역할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어야 한다.(246)

 

이 책은 사회권을 사법부가 심사하여 적절한 사법적 판단을 할 수 있음을 여러 각도에서 논증하고 국제사회에서 이를 선도하는 국가(남아공화국이나 인도)도 소개한다. 그에 의하면 사법부의 사회권에 대한 사법심사는 결국 민주적 이상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사법부를 통해서 국가의 시민에 대한 민주적 이상인, 책무성, 참여성, 평등성 실현이 가능하다면, 사법부의 사법심사는 충분히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적극적 인권보호의무를 심사하기 위해 사법부의 민주적 역할을 어떻게 창안할 수 있을 것인가? ... 민주적 이상을 구현하려면 세 가지 핵심 가치가 필요하다... 책무성, 참여성, 평등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법원이 모두 일정한 보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한, 법원의 역할은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251)

 

여기서 책무성이란 국민대표가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할 의무를 말한다. 그렇다면 법원은 재판과정을 통해 국민대표로 하여금 유권자들에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가능한가?

 

참여성은 의사결정과정에서 심의를 통해 민주주의과정을 보다 완벽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법원은 재판과정을 통해 심의를 위한 포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나아가 평등성은 대의민주주의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이 평등한 대우와 존중을 받는 것을 말한다. 법원이 대의제 과정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절차적 장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가?

 

저자는 이러한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한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재판절차를 적절히 운용하면 민주주의를 보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고, 그런 절차를 통해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법부는 사회권을 판단함에 있어 사회권의 한계 운운하며 그 역할을 스스로 축소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헌법과 국제인권규약에 규정된 그 권리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다면 그 이유를 법정에서 정부를 상대로 물어 보고 설명케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행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사법부가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길이며, 그것은 우리가 의지에 따라 적절한 사법절차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결코 포기할 일이 아니다.


(2016.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