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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야기 38 튜더왕조를 그린 어느 외국인 화가

박찬운 교수 2016. 12. 28. 18:45

영국이야기 38

튜더왕조를 그린 어느 외국인 화가


내가 이 사람에 대해 한 번 소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영국에 와서 몇 몇 미술관을 돌고 나서다. 익히 아는 화가였지만, 외국인인 그가 이렇게 많은 영국인 초상화를 그린 줄은 몰랐다. 유럽의 절대왕정에서 궁정화가로 알려진 사람은 여럿 있지만 이 사람만큼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고관대작을 집중적으로 그린 사람은 흔치 않다. 아마도, 이 사람보다 꼭 100년 후에 활동하는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 정도가, 이 사람과 비견되는 화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한스 홀바인 자화상(1542). 홀바인이 죽기 직전 그린 자화상이다.


이 사람이 바로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이란 화가다.


홀바인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해선 당시 영국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은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 역사에서 항상 2류 국가를 면치 못했다. 대륙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섬나라인 영국은 대륙의 뒤꽁무니만 따라가는, 그저 시시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러던 영국이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무시 못 할 나라로 떠오르고 마침내 17세기 이후 2백년에 걸쳐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오른


이런 영화를 누리는 데에 있어 그 기초를 마련한 것은 1485년 헨리7세에 의해 시작된 튜더왕조와 그 뒤를 이은 스튜어트 왕조라는 데에는 크게 이론이 없다. 이 시기에 영국은 대외적으로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고, 대내적으론 절대왕권을 지나 입헌민주정치의 기반을 닦는다. 홀바인과 관계 있는 영국 역사는 바로 절대왕정을 만들어낸 튜더왕조와 그 주인공 헨리8세와 연관된 것이다.

 

헨리 8세. 어느 역사가가 말했듯이 그는 멋지고당당하고낭비가 심하고호색적이고게으르고시기심이 많고교활하고탐욕스럽고어리석을 정도로 허영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홀바인은 그를 이런 모습으로 그려냈다. 얼굴은 당당한 것을 넘어 거만하고, 몸에 걸친 옷은 화려함의 극치다. 바로 이 사람이 여섯 왕비를 맞아들였고, 그 중에서 둘을 처형했다. 이 그림은 현재 리버풀 Walker Art Gallery에 소장되어 있는데, 전문가들에 의하면 홀바인이 그린 그림을 공방에서 똑 같이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15-16세기 영국의 예술계는, 대륙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예술분야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발원지인 이태리 도시국가나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알프스 이북의 프랑스나 독일에선 궁정이나 재력가의 후원으로 기라성 같은 예술가가 속출하고 있었음에도 영국에선 그 시기 그런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영국의 예술, 그 중에서도 특히 회화의 수준은 변방국가, 이류국가 수준을 넘지 못했다.

 

위 그림은 햄프턴 코트 궁전이 소장하고 있는 헨리 8세, 아래 그림은 런던 내셔널 포트리트 갤러리에 소장된 헨리8세와 헨리7세. 모두 홀바인의 작품이다.(두 사진 모두 필자가 찍은 것임)


헨리 8세가 왕권을 이어받을 무렵 유럽은 이제 막 근대가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중세 천 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종교권력은 이제 정신세계의 지배자일 뿐, 더 이상 현실세계를 지배할 수 없었다. 속세는 왕권이 지배하고, 그 강도는 시간이 가면서 점점 강고해져,이름하여 절대왕권의 시기로 접어든다.


16세기 초 유럽의 절대왕권은 범상치 않은 몇 명의 군주가 동시에 나타나 주도한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1(카를 5)와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1세는 용호상박의 전쟁을 하면서 누가 진정한 대륙의 영웅인지를 실험하고 있었고, 모든 기독교 국가의 적국인 오스만터키엔 쉴리이만이란 절대 군주가 나타나 유럽 전체와 싸우고 있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걸물 헨리 8세가 나타나 섬나라 영국의 절대군주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 정치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매김하길 원했다.


헨리8세는 어느 역사가가 말했듯이 멋지고, 당당하고, 낭비가 심하고, 호색적이고, 게으르고, 시기심이 많고, 교활하고, 탐욕스럽고, 어리석을 정도로 허영심에 가득 찬사람이었다. 왕권 확립이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이해하기가 힘든 인물이었다. 아들 하나를 바라면서, 여섯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였고, 두 명의 왕비(앤 불린과 캐서린 하워드)를 처형했다. 첫 왕비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과 연을 끊고 그 자신이 수장이 되는 영국 국교회를 만들었다. 


이런 헨리 8세에게 하나의 원이 있었는데, 자신의 모습을 초상화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가 남기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마땅히 자신의 당당한 모습이 그려지길 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도도한 성격과 권위에 찬 모습이 그려져,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초상화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튜더왕조 시절 영국에선 왕만이 초상화를 좋아한 것이 아니다. 왕비를 비롯해 궁정 사람들과 고관대작들도 자신의 초상화 한 두 점을 걸어두길 좋아했다. 초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가지고 다니기 알맞는 사이즈의 미니어처 초상화까지 제작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화가의 수준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대륙의 일급화가에 비견되는 영국 화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영국의 회화는 별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헨리 8세가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급기야는 대륙에서 최고의 화가라고 인정받은 일급화가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해서 대륙의 일급화가가 등장한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한스 홀바인이란 독일 화가다. 그는 아우그스부르그의 화가 한스 홀바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화가의 길로 들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성장하고 나선 고향을 떠나 바젤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초상화를 특히 잘 그렸다


1533년에 그린 홀바인의 대표작인 '대사들'이란 작품이다. 서구 초상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왼쪽은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대사 장 드 댕트빌(Jean de Dinteville)이고 오른쪽은 라보르의 주교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s)다. 이 초상화는 초보자가 보아도 보통 초상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물중심이라기 보다는 인물들 사이에 있는 소품이 무슨 의미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2단의 탁자 상단에는 천구의, 해시계 등이 있고, 하단에는 지구의, 수학책, 줄이 끊어진 류트, 찬송가가 있다. 또한 바닥엔 모자이크 문양 위에 뒤틀린 해골이 있다. 이들 소품들은 모두 이 두 사람의 학식과 좌우명을 나타낸다고 한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필자 촬영)


당시 독일 화가들이 초상화에 관심을 둔 이유는 종교개혁과 관련이 깊다. 독일은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 일종의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 성당 내의 제단화 등이 기피되는 상황이었다. 화가들에게 가장 많은 돈을 벌게 해준 제단화를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당시 르네상스의 영향 하에 일어난 개인 초상화 제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홀바인이 영국을 가게 된 것은 동시대 유럽 최고의 문사 에라스무스의 소개에 의한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일찍이 튜더왕조 하의 영국 인문주의자들(대표적 인사가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초청으로 영국에서 상당기간을 체류하던 유명인사였다. 그가 영국의 회화 현실을 목격하고 바젤의 일급화가 홀바인을 천거한 것이다.


에라스무스(1523).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기까지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으로 사생아로 태어나 수도원에서 양육되었고 젊어서 수사가 되었다. 파리,이태리 등지에서 공부하여 최고의 인문학자가 되었고 성서를 번역하였다. 부패한 가톨릭을 비판한 책 <우신예찬>을 썼다. 토마스 모어와는 절친으로 우신예찬도 모어의 집에서 썼다고 한다. (필자가 내셔널 포트리트 갤러리에서 촬영)


기록에 의하면 홀바인은 영국에 두 번 와서 그림을 그린다. 한 번은 1526년에 와서 2, 또 한 번은 1532년에 와서 8년을 머물었으니, 도합 10년을 영국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영국에 왔을 때는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는 영예를 누린다. 외국인이었지만 튜더 궁정으로부터 고액의 월급을 받으면서 왕의 지근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홀바인은 영국에서 두 번 체류하면서 헨리 8세 뿐만이 아니라 왕조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영국 역사에서 특정 화가가 한 왕조의 이렇게 많은 중요 인물을 집중적으로 그린 예는 없다.

 

토마스 모어(1527). 헨리 8세 시절의 대표적 인문주의자. 변호사로 출발해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아 대법관이 되었으나 헨리 8세가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려 하자 이를 반대, 결국 런던탑에 갇혔고 단두대에 목이 잘렸다. 대표작으론 세계명작인 <유포피아>가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기록이 충분하지 못할 때 초상화 한 점은 그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 더군다나 역사적 기록도 있는데다, 초상화까지 있다면 그 인물에 대해 기록이 알려주지 못하는 그 이상의 사실까지 알아낼 수도 있다. 초상화는 기록으로 남길 수 없는 것까지 남기기 때문이다


일급 화가가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상화라면 대상 인물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건강, 심리, 성격 등까지도 추론할 수 있다. 홀바인은 영국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튜더 왕조의 왕과 신하 그리고 궁중 인물을 그림으로써 글이 설명하지 못하는 그들의 내면세계까지 후대에 알린 역사기록자로서의 초상화가였다.

 

제인 시모어(1537). 이 여인이 바로 헨리 8세의 세번째 왕비다. 헨리는 앤불린에게서 아들을 원했지만, 앤이 사내아이를 갖고서도 유산을 하자, 더 이상 그녀에게서 매력을 못 느끼고, 간통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만다, 세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는 헨리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았으나 산고로 죽는다. 헨리는 이를 애통히 여겨 3년 동안 다음 왕비를 들이지 않는다.


홀바인이 튜더 왕조의 궁정화가로 화려하게 성공한 원인은 그의 능력 외에도 처세술이 한몫했을 것이라는 게 다수의 견해다. 앞서 본대로 그가 영국으로 가게 된 것은 에라스무스와 그 주변의 영국 인문주의자들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그가 두 번째로 영국에서 체류했던 기간은 폭군 헨리 8세의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튜더 인문주의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과 교류했다. 그는 분명 인문주의자 서클의 주요 멤버였. 궁정 밖에선 최고의 문필가요 사상가인 토마스 모어와 교제했고, 궁정안에선 캐서린 왕비 뒤를 이은 앤 불린 왕비의 후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런던에 온지 2년이 되자 영국 궁정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흘러간다.

 

에드워드 왕자(1539). 이 아이가 제인 시모오가 난 아들이다. 헨리 8세가 죽고나서 그 뒤를 잇는 에드워드 6세로 즉위하지만 유약한 소년이었기에 즉위 6년 후 죽는다. 그 다음 왕위는 우여곡절 끝에 첫번째 왕비 캐서린이 낳은 메리가 차지한다. 이 메리가 튜더왕조의 '피의 메리'라 불리는 여왕인데, 가톨릭 교도였던 그녀는 어머니가 신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신교 박해에 앞장섰다. 그녀의 재위 기간 4년 동안에 300명이 이단으로 처형되었다.


헨리 8세는 첫 왕비 케서린과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로마교황청과 결별하고 국교회를 설립해 그 수장이 되는 수장령을 발표하고(1534), 이를 반대하는 토머스 모어를 런던탑에 가두고 마침내 처형한다(1536). 더욱 사랑하던 앤불린마저 아들을 낫지 못하자 반역죄로 처형하고 만다(1536). 이런 상황에서 이들과 밀접하게 교유하던 홀바인이 궁정화가가 되었다(1536)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토마스 크롬웰(1532). 헨리 8세 시절 헨리의 총애를 받았던 관리. 그는 대법관 울지가 몰락한 후 헨리 8세의 최측근으로 수장령을 집행하기 위해 수도원 해산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사람도 헨리 8세의 비위를 거슬려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자신을 후원하던 사람들이 반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출세를 한다는 것은 그의 처신이 평범 이상이었음을 의미한다. 혹시 헨리 8세와 이들 사이에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한 것은 아닐까? 그가 어떤 처신을 하였든지, 토마스 모어나 앤불린의 죽음은, 그에게도 매우 괴로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출세가 좋더라도 친구들의 주검 위에서 누리는 영화가 진정한 행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