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

발전의 참의미를 알려 준 책 <전문가의 독재>

박찬운 교수 2017. 2. 28. 06:52

발전의 참의미를 알려 준 책 <전문가의 독재>

 




 


오랜만에 책다운 책을 읽었다. 영국에서 돌아와 잠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찍 기상해 책을 읽는 시간을 찾은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 우리 집 큰 아이가 사다 놓은 책 한권을 서가에서 발견했다. 뉴욕대학 경제학 교수 윌리엄 이스털리의 2014년 작 <전문가의 독재>. 제목이 심상치 않아 서문을 읽다가 그대로 빠져들었다.

 

이 책은 발전경제학에 관한 책이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든지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경제발전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지구상 존재하는 200여 개 국가 중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잘사는 나라는 많지 않다. 유럽 국가 중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정도가 장기간의 풍요로움을 자랑한다. 반면 같은 유럽 국가라도 동유럽국가, 서유럽 국가 중에도 포르투갈, 그리스 등은 위의 국가들에 비해 훨씬 빈곤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두 개의 발전관을 대비한다. 하나는 테크노크라트 발전관(권위주의적 발전관), 또 하나는 자유주의적(자유로운) 발전관.

 

2차 세계 대전 이후 저발전국가는 모두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선진국은 그것을 지원했다. 그 방법론으로 채택된 게 소위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이다. 이 발전관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사회를 휩쓸었다. 모든 저발전국가가 이것을 채택했고 선진국과 국제금융기관(세계은행) 그리고 국제적 자선단체(빌게이츠재단, 토니블레어 재단)이 옹호했다.

 

테크노크라트 발전관에선 빈곤이란 비료나 항생제 혹은 영양제와 같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써야 할 순수한 기술적인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발전관에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나아가기 위해 수단(기술)을 찾으면 놀라운 진보를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발전관에선 당연히 테크노크라트 즉 전문가들이 득세한다. 기술적 환상은 전문가들에게 새로운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국가는 이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실행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은 다른 말로 바꾸면 권위주의적 발전관이다. 기술전문가들은 소위 인자한 독재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전문적 기술이 사회 전 조직에 빠르게 스며들기 위해선(그래야 그들은 발전이 된다고 믿는다) 강력한 권력이 배경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강력한 권력은 견제 받지 않는 독재일 수밖에 없다.

 

이런 권위주의적 발전관에선 경제가 발전만 하면(GDP가 올라가기만 하면) 권력의 어떤 횡포도 눈을 감는다. 이 책은 이런 발전관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 이런 발전관은 인류사에서 없어져야 할 인류에 대한 만행으로 규정한다.

 

그 대신 저자는 자유주의적 발전관을 제시한다. 발전이란 단순한 경제수치의 상승이 아닌 인간의 자유와 권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경제발전도 불가능하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16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풍요를 누리고 있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 나라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잘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역사상 나타난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을 비판하며 새로운 대안인 자유주의적 발전관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 저자는 세 가지 관점에서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을 비판한다.

 

첫 번째 관점. 빈 서판인가, 역사로부터 배울 것인가. 이것은 발전철학을 의미한다. 발전이란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빈 서판에 전문가가 자유롭게 쓰는 것인가 아니면 각 나라의 과거에서 무엇인가를 배워 그에 기초해 발전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은 빈 서판 철학을 채택했다. 자유주의적 발전관은 역사로부터 배우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관점. 나라가 잘되어야 하는가, 개인이 잘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발전의 목적이 집단인 국가인지, 아니면 개인이 되어야 하는지가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은 이 중에서 국가를, 자유주의적 발전관은 개인을 선택한다.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에선 개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적 목표만 달성하면 그것이 발전이라 여겼다. 자유주의적 발전관은 개인을 중시한다. 발전이란 개인들이 자신의 목표를 선택하고 달성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관점. 의도적 설계인가, 자생적 해법인가. 이것은 발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전이란 중앙에서 전문가들이 의도적으로 설계해 이루어내야 하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다양한 지식을 갖춘 다수의 개별적 문제 해결자들의 상호 경쟁을 통한 해결이어야 하는가. 테크노크라트적 발전관은 전자를 자유주의적 발전관은 후자를 택한다.

 

저자는 지난 수백 년간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한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진정한 원인은 아무런 견제 없이 행사되는 국가권력임을 밝힌다. 서문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 몇 부분을 옮겨보자.

 

빈곤의 진정한 원인은 권리를 박탈당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아무런 견제 없이 행사되는 국가의 권력이다.”(서문)

 

사람들이 정말로 권리를 침해당해도 이를 묵과하고 기술적 해결책으로 눈을 돌리는 약삭빠른 속임수는 오늘날의 발전이 처해 있는 도덕적 비극이다.”(서문)

 

빈곤의 기술적 문제(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기술적 해법의 부재)는 빈곤의 증상일 뿐이지, 빈곤의 원인이 아니다. 이 책은 빈곤의 원인을 정치적, 경제적 권리의 부재라고 주장한다.”(서문)

 

이 책은 한국의 사례도 비중 있게 다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성공한 독재자로 알려진 박정희에 대한 공과를 예리한 눈으로 비판한다. 그 한 부분을 옮겨보자.

 

한국이 진보하려면 독재가 필요했다는 관념이 있었지만, 나중에 한국이 경험한 역사에 의해 부정되었다. ... 한국의 경우도 고성장을 창출하기 위해서 초기에 인자한 독재자가 필요했다는 관념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 한국이 권위주의적 지도자에 이어 과도기적 지도자, 민주적 지도자를 거치면서 달성한 고성장의 원동력은 특정한 지도자들의 계획이 아니라 그보다 광범위한 국가적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임을 지적한 바 있다. 독재자를 두둔하는 것보다 더 합당한 설명은 이처럼 자유가 신장되는 긍정적 변화에 더하여 기술을 경험한 장기적인 역사 덕분에 빠른 속도로 기술을 따라잡는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528-529)

 

한국의 발전은 박정희가 어느 날 갑자기 청와대에서 세운 경제개발전략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발전은 개인의 권리를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강화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곳곳에서 사용하는 데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수백만 시민이 왜 엄동설한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앞에 모였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 개인의 자유가 나날이 후퇴되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후퇴는 대한민국의 퇴보를 의미하며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를 또 다른 빈곤으로 떨어트리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촛불을 든 것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가디언이 이 책을 평가한 한줄 평이 마음 속에 명료하게 와 닿는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경제적 번영과 진보를 정치와 분리시켜서 생각하며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맹비난을 퍼붓는다."


그렇다. 정치와 경제는 따로 놀 수 없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민주적 정부를 갈구하는 것은 우리들의 경제적 번영과 진보를 위한 것이다. 이 책이 주는 최고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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