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잊힐 수 없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

박찬운 교수 2018. 10. 7. 22:23

잊힐 수 없는 폭풍의 화가 변시지

 

변시지(1926-2013)


성수동 공장에서 전시가 있다? 40년 이상 이 주변과 인연을 맺어온 나로서는 믿기지가 않는다. 그 황량한 곳의 공장을 개조해 전시장으로 만들었다니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서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의 그림을 친견한다고 하니 왠지 미안하다. 내가 보기엔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서울분관)이나 덕수궁 현대미술관도 이 거장의 그림을 건다는 것이 영광일 텐데, 어인 일로 공장 한 가운데에 그림을 건다는 말인가. 그것도 무슨 연유인지 전시기간이 고작 5(10.3-10.7). 이건 거장에 대한 예우가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전시 마지막 날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수동 에스 팩토리


도착해 보니 전시공간 주변은 아직도 공장지대이고 여기저기에서 낡은 공장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다. 그 한 가운데에 옛 공장을 묘하게 리모델링한 에스 팩토리가 있다. 여기에 우리가 잊을 수 없는 화가 변시지(1926-2013)의 작품 수 십 점이 걸려 있었다.

 

성수동 에스 팩토리 변시지 작품전에 나온 변시지의 그림들


화가 변시지에 대해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를 20세기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로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할 수 없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인 스승을 만나 화가로 입문해 뛰어난 일본화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의 화가로서 살다가 마침내 세계적 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50대 이후 고향 제주에서 활동하면서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화풍의 그림을 탄생시켰다. 그의 화폭 속에선 제주의 토속적 정감이 강하게 표출되면서도, 트레이드 마크가 된 황갈색 색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 시대 이후 만들어낸 휘몰아치는 노란색채를 보는 듯하다. 그것으로 그의 그림은 변방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화단의 누구와도 견줄 수 있는 보편주의를 획득했다.

 

변시지 화풍의 제1기

변시지는 식민지 시절인 192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오사카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미술에 눈을 떴고, 오사카 미술학교를 거쳐 토교로 진출, 일본 서양화의 거장 테라우치만지로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일본 화단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어 일본인들 사이에선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 서양화 최고 권위의 광풍회 공모전 최고상을 약관 21세에 거머쥔 것이다. 일본 화단에선 전무후문한 일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하고도 10년 이상 일본에서 우시로 도키시(宇城時志)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최고 화가의 반열에 올라간다.


이 당시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역시 일본화가의 냄새가 확 난다. 그림 대부분이 스승 테라우치 만지로와 광풍회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적 요소가 가미된 인물화가 주종을 이룬다. 그것은 일본 서양화가들이 추구한 고전적인 미의 규범을 실천하려는 아카데미즘의 표현이었다.


1948년 일본 광풍회 공모전 최고상을 가져온 <베레모를 쓴 여자>


변시지 화풍의 제2기

변시지가 만일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고 하면 그는 뛰어난 일본 서양화가라는 이름은 얻었겠지만, 내가, 아니 우리가 그를 세계적 화가라고 칭송할 일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1957년 일본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나이 30이 넘으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큰 갈등을 겪은 것이 주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 화가이면서도 뭔가 모를 이질감과 거기에서 오는 예술적 갈등이 그의 한국행을 결정케 한 이유였을 것이다.

 

변시지의 서울시절 작품 창덕궁 후원(비원)


한국에 돌아온 뒤 그가 그려내는 그림은 일본에서 그리던 것과는 역시 달라진다. 인물화에서 풍경화로 장르가 바뀌어진 것이다. 그에게 있어 한국 기와집 처마나 창덕궁 후원은 한국적 정서를 나타내는 데 그만이었다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선 여전히 일본 화풍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배운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한국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일본 화풍은 조금씩 옅어지면서 언젠가 한국인으로서의 자신만의 예술세계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을 할 수 있는 시기가 귀국 후 20여 년 간의 서울생활이었다.

 

성수동 에스 팩토리에서 열린 변시지 작품전


변시지 화풍의 제3기

귀국 화가로서의 서울생활이 그의 예술적 변신의 종점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일생 일대 예술가로서의 도전을 감행한다. 나이 오십이 되어(1970년 대 중반) 서울을 떠나 자신의 뿌리인 제주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드디어 그가 그토록 바라던 그만의 화풍을 창조한다. 그는 한 동안 제주에서 자신의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한다


제주의 산과 들, 바다, 조랑말, 까마귀, 공포스러운 폭풍과 풍랑 그리고 제주의 참혹한 역사... 그는 이런 것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어느 날 그에게 서광이 비쳤다. 오, 유레카! 그것은 수묵화를 보는 듯한 간결한 선과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황갈색의 색채! 이제까지의 작품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쇼킹한 화풍이었다. 이로서 그는 완벽하게 일본화풍을 넘어섰다. 누구나 그의 그림을 보면 단번에 느낄 것이다. 한국인의 강인한 정신과 따뜻한 인간미 그러면서도 대담하고도 충격적인 이 색채의 조화를. 

 

생전 그가 쓴 글 제주에 산다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을 읽다보면 그가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낸 과정의 고민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황갈색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그 자신의 설명이다.

 

제주에 가보면 누구나 다 같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우선 태양이 가깝게 느껴지며 바다의 파도가 번들번들 비친다. 말하자면 아열대의 풍경이 인상 깊게 다가오며, 식물들은 채도가 높고 선명하다. 바다의 파도소리는 영원한 생명의 약동인 양 들려온다. 부두에서 수평선을 내다보면 한 없는 꿈이 피어오른다. 인간은 영원히 대자연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그 순간 슬픔과 괴로움도 정열적인 터치를 쌓아 올려 화폭에 무한한 꿈이 떠오르다가 꺼졌다가는 또 떠오른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의 정직한 모습이리라. 자연과 나의 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제주에 산다)

 

2005년 작 <점 하나>


나는 내 책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어딘가에서 변시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고흐의 밀밭 그림을 보면서 변시지를 생각한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변시지는 황토색과 검은색, 단 두 색만으로 극단적인 단순함을 추구하면서 고향 제주를 표현했다. 그는 평소 황토색 배경에 검은 점 하나만 찍어 제주를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 <점 하나>를 보라. 언뜻 보면 그림 전체가 황토색뿐이다. 그런데......가만! 유심히 왼쪽 상단을 보자. 점 하나가 있다. 돛단배! 이렇게 그는 제주를 황토색과 검은 색, 단 두 색만으로 표현했다."(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서귀포 기당미술관


변시지는 제주의 들판, 파도와 바람, 폭풍, 그 속에서 사는 사람과 말을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남녘의 땅에서 빛을 발견한 빈센트 반 고흐가 중첩된다. 그는 2013년 87세를 일기로 잠들었다.


그의 그림은 그를 돕던 재일교포 기당 강기범이 거금을 쾌척해 1987년에 세운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기당미술관은 서귀포시에 기증된 전국 최초의 시립미술관이다. 이곳에선 변시지의 작품뿐만 아니라 국내 화단의 주요한 작가들의 회화, 조각, 공예, 판화, 서예 등 650여점을 볼 수 있다. 서귀포 여행 중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2018.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