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세상 이곳저곳

임청각, 법흥사지 7층 전탑에서 일제의 만행을 보다

박찬운 교수 2015. 9. 26. 19:04

임청각, 법흥사지 7층 전탑에서 일제의 만행을 보다 
105년 전 오늘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 


아주 오랜만의 안동여행이었다. 21년만이다. 일본 대학 교수들과 서울에서 연구모임을 갖고 1박 2일 코스로 안동을 다녀왔다. 일본 교수들이 한국 유교에 관심을 갖고 있어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이 말은 안동에 들어서면서 본 문구다) 안동을 찾은 것이다. 일본교수들이 보고 싶어 하는 곳은 도산서원과 하회마을이었다.나는 어쩌다 이 여행의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제 아침, 일행이 아직 잠이 들어 있을 시각,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탔다. 내가 이번 여행을 통해 진짜 보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과 함께 가긴 어렵다는 생각에 아침밥을 먹기 전에 그곳을 찾았다. 임청각과 법흥사지 7층전탑! 임청각은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고, 법흥사지 7층 전탑은 국보16호로 임청각 근처에 있는 것이다. 

 

임청각

 

 

임청각 정문, 원래 임청각 정문은 아니다.

 

안동댐의 보조댐 근처엘 가면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에 자리 잡은 꽤나 큰 고가를 만난다. 그게 임청각이다. 법흥사지 7층 전탑은 그곳에서 1백 미터 쯤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고성이씨 종갓집 담 밖에 붙어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야기할 때면 두 집안이 거론된다. 하나가 서울의 이회영, 이시영 형제 가문.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며 조선조 10정승을 냈다는 이 가문의 두 형제는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제합병되자 가산을 급히 처분하고 수십 명의 일가친척을 데리고 만주로 떠났다. 


또 다른 가문의 주인공이 바로 석주 이상룡 선생이다. 안동의 거부인 그도 이회영 형제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기에 가산을 급히 정리한 다음,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고, 식솔을 거느린 채 만주로 떠났다. 거기에서 이회영 형제를 만나 함께 만든 것이 신흥무관학교이다. 선생은 풍찬노숙하면서 일제 무력투쟁의 선봉에 섰고, 급기야는 상해 임정의 3번째 국무령이 되어 조국 광복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는 1932년 중국 땅에서 쓸쓸히 병사했다. 


전국 산하에 많은 고가가 있지만 그 규모나 아름다움에 있어 단연 두 곳이 꼽힌다. 하나는 강릉 선교장, 그리고 다른 하나가 임청각이다. 선교장은 경포호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 조선 최고의 양반 가옥이 틀림없다. 하지만 역사에 있어서는 임청각을 따를 수가 없다. 임청각은 1515년 건립되었으니 올해로 만 500년을 맞는 고가다. 임청각은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지어진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99칸 양반집이다. 그곳 사랑채인 군자정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며 시인묵객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임청각 군자정


임청각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망국의 설움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일제는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이 보배 같은 임청각을 노렸다. 1940년 초 중앙선 철도를 가설하면서 조선 최고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임청각의 한 가운데를 기차가 지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99칸 임청각의 상당부분이 헐려 버렸다. 그리고 70년 이상 임청각은 중앙선의 소음과 분진으로 고생을 해 왔다. 

 

 

법흥사지 7층 전탑


법흥사지 7층 전탑. 이 탑의 공식명칭은 신세동 7층 전탑이다. 탑 주변의 설명문에는 법흥사지 7층 전탑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탑 바로 아래의 국보 표시 비석엔 신세동 7층 전탑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일제의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일제가 탑을 국보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이 탑의 소재지를 법흥동이 아닌 인근 동네 이름 신세동을 썼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탑은 많지 않다. 전탑은 통일신라기에 당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흙을 구어 만든 벽돌을 쌓아 올린 것이다. 전탑 중 최고가 바로 법흥사지 7층 전탑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크다. 나는 몇 년 전 출판한 <문명과의 대화> 실크로드 편에서 중국 시안의 대안탑(당나라 때 현장이 천축국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탑)을 설명하면서 이 탑을 소개한 바 있다. 그 때도 이 탑 옆으로 중앙선 철도가 지나 보존에 어려움을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번에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이 탑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백문이불여일견! 1천 수백 년을 견뎌낸 저 웅장한 탑을 보라. 높은 기단 위에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7층을 쌓았다. 신라시대엔 이 주변에 꽤나 큰 절 법흥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이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았다. 그리고 그 옆에 종갓집이 들어섰다. 종갓집과 7층 탑,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아마도 절은 소실되었지만 지역 주민들이 이 탑만은 보존하려고 노력했기에 그게 가능했을 것이다. 

 

법흥사지 7층 전탑 옆으로 중앙선이 지나간다

 


그런데, 저것이 무엇이냐. 탑에서 불과 4-5미터나 될까. 그 옆으로 철로가 지나간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일어나는 진동과 분진을 견디면서 지금까지 70년을 버텨 온 것이다. 몇 년 전 이 탑의 상태가 심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보수공사를 했다고 하는데, 가만히 보니 상부는 벌써 3-4도 기울었다. 저대로 두고 몇 년이 지나면, 저 탑은 한국의 피사의 사탑이 될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다행스런 소식을 들었다. 이 근처를 지나는 중앙선 철로가 노선을 바꾼다는 것이다. 또한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정부는 임청각 복원을 발표했다. 아마 앞으로 몇 년이 지난 후 이곳에 오면 임청각과 법흥사지 7층 전탑은 우리 앞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곳을 홀로 다녀온 뒤 안내 일정을 바꿨다. 일정상 무리가 가도 일본 사람들에게 그리고 동료 한국 교수들에게 이곳을 꼭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두에게 짜릿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안내자로서 이 정도는 본연의 의무가 아니었겠는가. 

 

페친분들이여, 기회가 되어 안동에 가면, 꼭 이곳을 가보길 바란다. 석주 이상룡 선생에 관해 조금이라도 공부하고 가시라. 임청각의 모습이 단순히 고가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전국 명찰의 탑을 둘러보고 이곳 법흥사지 7층 전탑을 보시라. 이 탑에서 다른 이미지를 찾을 것이다. 탑의 웅대함과 역사성에서 고개를 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