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 15 캄비세스 왕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박찬운 교수 2016. 3. 26. 11:22

인문명화산책 15

 

캄비세스 왕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제라드 다비드, <캄비세스 왕의 재판>, 1498년, 목판에 유화, 브뤼헤 시립미술관 소장

 


사법살인으로 기록된 오판의 사법사

며칠 전 법조 선배이신 한승헌 변호사님이 쓰신 <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를 읽으면서 이 대목에서 한참 눈을 감고 생각했다.

 

권력의 이익과 눈치에 부응하여 신성한 재판을 그르친 사법부는 그 부끄러운 과오를 통렬히 참회해야 마땅하다. 나아가 이 나라의 사법부가 위정자 내지 사회지배세력의 입김에 휘둘려 민주사법의 본질을 소홀히 하는 그 어떤 오류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책머리에)

 

해방 이후 우리 사법부엔 과가 많다. 정의의 관념에 비추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조작사건으로 판명되었지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일어났던 인혁당 사건에선 대법원 확정판결이 있고나서 18시간 만에 피고인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름하여 사법살인이다. 이 사건은 32년 만에 피고인 전원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인혁당 사건은 무죄로 판명되었다. 한겨례 신문 기사



노변호사는 그의 50년 변호사 활동을 조용히 돌아보면서 우리 사법사를 이렇게 회고한다.

 

“50년이 넘는 오랜 변호사 활동에서 내가 본 한국의 사법부와 재판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적어도 시국사건 재판에서는 그러했다. 집권자 쪽에 기우는 법정, 입법자와 집권자, 그리고 재판관의 과오로 말미암은 피고인의 수난, 법의 보장기능보다 지배기능을 중시하는 재판, 정치상황과 시류에 좌우되는 영합적 논리, 정치의 사법화에 휘둘리는 사법의 정치화, 외풍 못지않게 위험한 사법부 안의 내풍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을 드러냄으로써 사법부가 오히려 법치를 왜곡하고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렸다.”(<재판으로 본 한국현대사> 책머리에)

 

재판! 이것은 참으로 신성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한 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국가라는 제도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지만 재판은 국가의 형성과 함께 시작한 게 분명하다


국가기능이란 결국 법을 만들고(입법) 그것을 집행하고(행정) 그것을 판단(사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3권이라는 것이고 주권의 핵심적 내용이다. 3권이 군주에서 국민으로 이양된 게 근대 국민주권사상이며 지금 우리나라의 최고이념이기도 하다.

 

국가가 잘 되기 위해서는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 모두가 제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이 중에서 사법기능인 재판은 무엇이 법에 맞는 지를 판단하는 것으로 입법과 행정을 감시할 수 있는 필수적 수단이다. 이 기능이 잘못되면 어떤 국가도 제 길을 갈 수가 없다. 국가는 부패하고 정의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아무리 국가의 다른 공복들이 부패해도 사법부의 공복만은 부패해서는 안 된다. 그것마저 부패하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다.


 




캄비세스 왕의 재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명화도록을 넘기다 보니 한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나의 인문명화산책에 동행하기에 딱 맞는 그림이다. 이름하여 <캄비세스 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이다. 15세기가 끝나가는 즈음 벨기에 브뤼헤에서 활동하던 제라드 다비드(1460-1523)가 그린 것이다. 두 개의 나무 판넬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그림으로 지금도 브뤼헤의 시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좌측 판넬 위의 그림은 <체포>라는 주제를, 오른쪽 판넬은 <재판>이란 주제를 그렸다. 그림 속의 한 남자를 체포해 재판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끔찍하다. <재판> 그림을 잘 보면 한 남자가 테이블 위에 누워 있으면서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고 있지 않은가.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서 제라드 다비드가 그리게 되었을까? 당시 브뤼헤 시당국은 제라드에게 재판이 열리는 시청 홀에 붙일 판넬화를 주문했던 모양이다. 아마 주제까지 정해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정한 재판? 그 정도의 주제였을 것이다. 이런 주문에 제라드는 고민 끝에 고대서양에서 내려오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채택해 그림을 그렸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캄비세스란 왕은 페르시아의 고대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번째 왕이다. 아키메네스? 이게 뭔가? 기원 6세기 중반 페르시아 및 중근동 지방을 재패한 페르시아 제국을 말한다. 그 건국자는 키루스라는 인물이다. 구약 성경에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왕이다


키루스는 당시 중근동 지방의 최강 국가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바빌론에 끌려왔던 유대인(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브카드네자르-구약의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끌려왔던 유대인들 기억하는가? 그 바빌론 유수 말이다.)을 고국 땅으로 돌려보낸 왕으로 성경은 기록한다. 그만큼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기원전 6세기 이후 수세기 동안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다. 이 왕조가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폴리스 연합체와 벌였던 전쟁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테네 연합군이 결국 페르시아를 물리치기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중근동 지방은 상당기간 이 페르시아 제국, 곧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다가 이 왕조는 기원전 4세기 초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캄비세스 왕은 바로 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왕 중의 왕이란 칭호를 듣던 자였다. 그가 내린 재판이 오늘 보는 이 <캄비세스 재판>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그 이후의 서양사에선 이 재판의 주인공 곧 피고인이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었다고 기록한다


캄비세스는 어느 날 재판관 시삼네스가 뇌물을 받고 재판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를 체포해 재판한다. 판결은 매우 참혹한 것이었다. 시삼네스의 살가죽을 벗겨 죽인 후 그 살가죽을 그의 아들 오타네스에게 주어 그것을 의자에 깔고 재판업무를 하라는 것이었다.

 

판넬화 왼쪽 <체포>는 시삼네스가 체포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고 오른쪽 판넬화는 재판이 집행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특히 오른쪽 판넬화를 주목하자. 4명의 사형 집행인이 칼로 시삼네스의 살거죽을 벗기고 있지 않은가.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의 살가죽을 벗기는 데 마치 소나 돼지의 가죽을 벗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행인 한 사람은 입에 칼을 물고 가죽을 벗긴다. 그런데 아무런 표정을 읽을 수 없다. 그는 그저 가죽 벗기는 일을 할뿐이다. 시삼네스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렷다. 


그림의 압권은 <재판>의 후경이다. 모자 쓴 젊은이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바로 시삼네스의 아들이자 새로운 재판관 오타네스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위를 보라. 무슨 휘장 같은 게 걸려 있지 않은가. 그게 바로 아버지 시삼네스의 살가죽이다.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대체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재판관이여, 부정을 행하지 말고 공평한 재판을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당신 아버지가 살가죽이 벗겨진 형벌을 받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매일같이 아버지의 살가죽 위에 앉아 아버지가 받은 고통을 생각하라.’

 

캄비세스 왕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자.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재판관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공평무사한 재판을 하는 정의의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재판관들이 얼마나 될까? 과연 지금 이 땅에 캄비세스왕이 온다면 그 재판을 피할 수 있는 재판관들은 얼마나 될까? 나는 뇌물 받는 법관이 아니니 떳떳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캄비세스는 그것만 재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주는 교훈은 정의로운 재판을 하라는 것, 불의한 재판을 근절하라는 요구이다. 불의한 재판이 꼭 재판 당사자로 부터 받는 뇌물에 의해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다. 오늘 날의 불의한 재판은 뇌물보다는 정의롭지 않은 사상과 이념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만일 법관들이 법이란 것을 권력자나 가진 자의 지배적 도구로만 사용될 수 있도록 편을 든다면,  본인 스스로 아무리 깨끗해도 역사는 결국 불의한 재판관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것을, 법관들은 가슴 속 깊이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2016.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