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40 대화재, 런던의 오늘을 만들다

박찬운 교수 2017. 1. 10. 06:09

영국이야기 40(최종회)

대화재, 런던의 오늘을 만들다

 


이제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영국이야기 마지막 회다. 내게 영국이야기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영국에서 잠시 살면서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이 글을 써왔다. 이건 어쩜 교수라는 직업에서 오는 약간의 강박관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놀아서는 안 된다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그래서 한 시도 쉬지 말고 써야 한다는 의식이 내게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는 모든 게 귀하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다른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느낀다는 것, 우리가 이렇게 소통하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게 귀하다. 시인 정현종이 말하는 '모든 게 꽃봉오리'인 것이다. 40회에 걸친 글은 그 꽃봉오리들을 표현한 거다. 시간이 가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꽃봉오리처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런던을 소개하는 글을 쓰려고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하나를 더 쓴다면 그게 무엇이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런던 시내를 걷다가 한 기념물을 발견했다. 모뉴먼트(Monument)! 런던 시내에 설치된 수많은 기념물 중 오로지 한 기념물만이 이름 자체를 모뉴먼트라고 한다.


그렇고 보니 내가 런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저 사건을 이제껏 말하지 않았구나. 저거야 말로 당연히 내 영국이야기의 한 소재가 될만한 것이다. 1666년 런던 대화재!

 

런던 대화재 모뉴먼트, 약칭 모뉴먼트(1671-1677). 런던 대화재가 나고 바로 만들어진 것이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작품이다. 런던 시내에 설치된 수많은 기념물 중 맏형이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런던 시내 건물들을 유심히 보면 꽤 오래된 건물 같지만 다른 유럽의 오래된 도시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17세기 이전 건물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서 왕왕 볼 수 있는 15세기 이전 건물은커녕 그 이후 건물도 거의 보이질 않는다. 왜일까?

 

런던의 오래된 건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이름 하여 조지안 건축물(Georgian architecture).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 앤여왕 사후 들어선 하노버 왕조의 초대 왕 조지 1세와 조지 2세 시대인 18세기에 지어진 건물을 말한다.

 

조지안 건축물, 런던 도심을 걷다보면 저런 18세기 건물을 종종 만난다.


또 하나는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치세기에 만들어진 빅토리안 건축물(Victorian architecture). 이 시절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 불리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런던엔 돈이 넘쳤다. 새 거리를 메우는 건물들은 화려하고 웅장해졌다. 지금 딱 봐도 큰 돈을 들여 지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런던 중심가의 오래된 건축물은 이 두 가지. 그 외는 보이질 않는다. 시기적으로 조지안 건축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물들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엔 특별한 사정이 있다.


1665년 런던에는 대역병이 돌았다. 당시 런던 인구가 50여 만 명 되었다고 하는 데 6분의 1에 가까운 8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역병이 아직 끝나지 않은 다음 해 또 하나의 대 사건이 터진다. 런던 시내에 불이 난 것이다. 지금 대화재 기념물, 모뉴먼트가 서 있는 근처 빵가게에서 시작된 화마는 3일간(92일부터 5일까지)에 걸쳐 런던 시내 대부분을 초토화시켰다.


불이 날 즈음 런던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런던 시티와 성 밖 구역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성내 주민 수는 8만여 명, 성 밖 주민 수가 40여만 명 수준이었다. 대화재는 성내에서 일어나 성내 대부분 건물을 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곽을 뛰어 넘어 서쪽으로 진격해 당시 찰스 2세가 있었던 화이트홀 부근까지 위협했을 정도였다.

 

생 폴 성당 , 1666년 대화재 이후 크리스토퍼 렌에 의해 건축된 성공회 성당(1675-1711), 사실상 런던의 국립묘지라고 해도 좋은 곳이다. 로마의 판테온, 파리의 팡테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바라 본 생 폴 성당, 바로 저 부근이 대화재 때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이 대화재가 런던 시내를 어떻게 변모시켰을까? 런던 시내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천지개벽을 했다. 정부는 이 대참사를 런던의 재도약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단순한 복구공사를 한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도시계획으로 런던 시내를 완전히 일신해 버렸.


크리스토퍼 렌(1632-1723)


이 대역사에 한 인물이 나타난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경(1632-1723)이다. 그는 이 새로운 도시계획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건축물의 공사 책임을 맡는. 그 결과 런던 시내의 스카이라인은 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크리스토퍼 렌의 건축물은 아직도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중엔 궁전 건축물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햄프튼 코트 궁전(위)과 켄싱턴 궁전(아래)이다. 렌은 이들 궁전의 일부를 새롭게 건축했다.


렌이 만든 건물은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대화재로 인해 피해를 입은 교회가 80여 개가 넘는 데, 그중에서 렌이 다시 지은 게 52개다. 이 교회 중 으뜸은 역시 생 폴 성당. 영국 바로크 건물의 대표라고 하는 이 건물은 육중한 중앙 돔으로 유명하다. 런던 어디에서도 우뚝 솟은 이 돔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성당이 준공되고 나서 360년 동안(1960년대까지) 이 돔(111미터)보다 높은 건물을 런던 시내에서 볼 수 없었다


생 폴은 영국 국교회 성당으로 런던 주교좌 성당이. 또한 생폴은 영국의 국립묘지 역할을 하기도 한. 이곳엔 영국사의 영웅들이 묻힌 곳이다. 넬슨제독, 웰링턴 장군, 윈스턴 처칠... 최근엔 마가렛 대처까지. 이태리의 영웅들이 묻힌 로마의 판테온이나 프랑스의 영웅들이 묻힌 파리의 팡테용에 해당하는 곳이다.


대화재는 대역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화재가 일어난 이후 역병이 사라졌던 것이다화재가 전염병 매개체인 쥐를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런던 대화재는 시내 건축물을 견고하게 만드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지금 런던 시내 어디를 가도 만나는 오래된 건물은 모두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화재가 나도 더 이상 대화재로 번질 가능성이 없어졌다. 대화재가 가져다 준 전화위복이었다.


대화재의 상처에서 회복하면서 런던은 드디어 유럽 최고의 도시로 발돋움한다. 대화재가 일어난 런던 도심은 상업과 금융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곳을 무대로 사는 사람들은 영국의 전형적인 돈 많은 시민계급이었다. 그들에겐 무엇보다 자유가 필요했다.


이들은 전제군주를 원하지 않았고 의회를 통한 민주정치를 원했다. 찰스 2세를 뒤이은 제임스 2세가 점점 폭정을 일삼자 이들이 의회를 움직인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대화재가 일어나고 22년이 되는 1688년 새로운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는 이를 명예혁명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