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서울 이곳저곳

살곶이 다리에서

박찬운 교수 2017. 3. 23. 15:26

살곶이 다리에서

 

서울 사는 사람 중에서도 이 다리를 모르는 이가 많다. 살곶이 다리. 한양대학교 캠퍼스 바로 옆으로 청계천과 중랑천이 흐른다. 이 두 개의 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강 쪽으로 200여 미터 더 내려오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돌다리가 있다. 그게 바로 살곶이 다리다.

 

성동교에서 바라다보는 살곶이 다리. 왼쪽 건물이 한양대 FTC 건물이고, 오른쪽 도로가 동부간선로이다. 조선시대 살곶이 다리는 저 다리 중 왼쪽 부분만이다.


오랜만에 점심을 먹고 산책에 나섰다. 성동교를 건너다가 살곶이 다리가 눈에 들어와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갑자기 머릿속에선 40년도 훨씬 넘은 흑백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때는 1973.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나는 저 충청도 두메산골에서 서울이란 곳으로 올라왔다. 우리 집이 정착한 곳이 바로 이 살곶이 다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근동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곳 살곶이 다리 근처 청계천과 중랑천 변엔 수천가구의 판자촌이 있었다. 이 땅의 힘없고 헐벗은 민중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돈을 벌려고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갈 곳은 없었다. 절대적으로 살 집이 부족했다. 똥오줌과 생활하수를 자연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곳을 찾다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청계천과 중랑천 변으로 모여들었다. 천 변 제방에 천막과 판자를 이용한 수 천 수 만의 집들이 들어섰다. 그게 바로 청계천, 중랑천 판자촌이다. 나는 이 판자촌 한 가운데서 산 것이다.

 

살곶이 다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적이었지만 최근 보물로 격상되었다. 보물 1738호. 조선 세종 때 공사착공해 성종 때 완공(1483) 되었다. 다리 규모는 76미터, 폭 6미터. 다리는 교각석주(1열에 기둥 네 개)를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하천 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지금 그 말을 누가 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살곶이 다리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일이다. 꽤나 유식한 아저씨였던 것 같은데, 꼬마들을 모아 놓고, 살곶이 다리의 유래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살곶이 다리가 아주 유명한 다리다. 너희들 세종대왕 알지? 한글 만드신 분이다. 그 세종대왕의 분부로 이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야. 당시 이곳에 물난리가 많이 있었단다. 물난리가 나면 이곳에 있던 다리가 싹 없어졌다고 해. 그래서 세종대왕이 큰 맘 먹고 폭우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놓기로 했단다. 단단한 화강석을 박고 그 위에 편편한 돈을 깔아서 말이다. 살곶이 다리는 조선시대 만든 다리 중 제일 유명한 다리다.”

 

다리 위에서 보면 교각 위로 멍에돌 3개가 연이어 걸쳐놓여진 것을 볼 수 있다.


또 언젠가는 이런 재미있는 소리도 들었다. 지금은 그 이야기도 누가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훗날 확인해보니 내가 들은 것은 살곶이에 관한 야사였다.

 

얘들아, 살곶이가 무슨 뜻인지 아니? 화살이 꽂힌다는 뜻이야. 너희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 알지? 이방원이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거든....그래서 이성계가 이방원을 굉장히 미워했단다. 이방원 보기 싫어서 결국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거든. 그렇게 되니 이방원이 얼마나 애를 먹었겠니. 조선은 충효의 나라인데 아버지가 집을 나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신을 여러 번 보냈지. 빨리 한양으로 돌아오시라고. 이성계가 어떻게 했니? 그래, 사신이 오는 대로 다 활을 쏘아서 죽이고 말았지. 이성계가 명궁이었지. 그렇지만 자식이 계속 조르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성계도 끝까지 고집을 필 수 없어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날 이방원이 경복궁에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겠지. 아버지 마중을 나온 거야. 바로 여기로 말이다. 이성계가 아들이 기다리는 것을 멀리서 보았대. 어떻게 했을까? 이성계가 아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 거야. 그 화살이 이방원에게 맞았을까? 이방원이 화살이 날아오자 차일 기둥 뒤에 숨어서 살았다는 것이야. 그렇게 되니, 이성계가 무어라 말했을까? ”허허 어쩔 수 없다. 이게 하늘의 뜻이니...“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 그게 바로 살곶이의 유래란다.”

 

살곶이 다리 위에서 하천 상류를 바라보면 왼쪽에서 청계천이, 오른쪽에서 중랑천이 흘러와 합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실감나게 조선의 역사를 배운 곳이 바로 살곶이 다리 위에서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일이다.

 

점심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일부러 살곶이 다리를 찾았다. 그곳에서 청계천과 중랑천을 바라보았다. 돌다리 외에는 모든 게 변했다. 상전벽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선 여전히 흑백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서울은 청계천과 살곶이 다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그 한가운데를 걸어 다녔고 그 속에서 꿈을 키웠다. 40년이 훨씬 넘은 지금 나는 다시 살곶이 다리에 서 있다. 생각해 보니 나를 키운 8할은 이 청계천과 살곶이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