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역사

올챙이 시절의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

박찬운 교수 2018. 3. 5. 09:50

올챙이 시절의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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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권법, 그 중에서도 국제인권법을 주 전공으로 연구한다. 박사학위도 국제법으로 받았다. 그런 연유로 시사적인 문제가 국제법 분야와 연관될 때는 특별히 관심 있게 보고 내 의견을 자주 피력한다. 박근혜 정부의 일본군위안부 합의, 이명박 정부의 UAE 비밀군사협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도 그런 이유다. 두 사건은 우리나라 외교사의 대실책이며 국제법적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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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일본에 갔을 때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고단샤 학술문고). 문고판 책 표지에 이토를 ‘근대 일본을 창조한 사나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책을 사와 몇 달 동안 시간 있을 때마다 한 부분 한 부분을 음미하며 읽고 있는데, 오늘 아침 읽은 부분이 참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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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겨울 일본 근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와쿠라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요코하마항을 떠난 것이다. 이 사절단의 원래 목적은 일본이 서구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일본의 핵심세력이 서구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 더 큰 목적이었다. 사절단장인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한 48인의 면면은 당시 일본을 움직이는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이 중에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되는 데 그는 이 사절단의 2인자 격인 부사의 지위에 있었다(당시 나이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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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사절단이 데리고 간 56인의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일본 전역에서 뽑힌 수재들로서, 사절단과 함께 출발해 당분간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과 유럽 각국에 남아 공부할 예비 유학생들이었다(이들이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들이다. 그들이 돌아와 대학을 세우고 엘리트들을 키워낸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출발일로부터 거의 1년 반 동안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다가 일본에 돌아왔고, 거기에서 얻은 지식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어내는 데,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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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부분을 읽는 도중 내 눈에 특별히 들어온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그것은 아마 일본 외교사에서 최고의 해프닝으로 기록될 일이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거의 한 달간 항해를 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다음, 대륙을 횡단해 마침내 1872년 1월 21일 워싱턴 디시에 도착, 2월 3일부터 조약개정 교섭에 들어간다. 그런데 미국 측으로부터 조약 개정을 위한 전권대사 위임장 제시를 요구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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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사! 사절단으로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 문서가 필요한지 말이다. 이런 정도니 일본을 떠날 때 준비했을 리가 없다. 미국 측은 그게 없으면 교섭은 할 수 없다고 하고... 이쯤 되니 사절단으로선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일본으로 보내 그 위임장을 가져 오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부사인 이토와 또 다른 실력자인 오쿠보가 일본으로 돌아간다. 다시 역순으로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증기선을 타고 한 달간 항해를 하고...이렇게 해서 위임장을 가져 오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두 사람이 다시 워싱턴 디시에 나타난 것은 그해 6월 17일. 장장 4개월 이상이 걸린 것이다.(요즘 시대로선 상상이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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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비사이긴 하지만 이 시절 일본의 상황이 이랬다. 전권대사가 서구열강을 방문하는 데도 위임장마저 챙기지 못한 채 떠났고, 중간에 위임장을 가지러 다시 일본에 돌아오는 일까지 경험한 나라다. 그런 나라가 불과 몇 십 년 만에 서구열강을 따라잡고 로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침략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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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토의 행적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도대체 그는 그 격동의 시기에 무엇을 경험했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일본은 그리도 빨리 근대화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흥미롭지 않은가?(2018.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