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정치

남북정상 간 합의, 국회 비준동의 절차 과연 필요할까?

박찬운 교수 2018. 3. 22. 09:27

남북정상 간 합의, 국회 비준동의 절차 과연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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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통령이 어제 남북정상회담 준비 위원회에 참석해 다가오는 남북정상 간 합의에 대해 국회 비준동의를 받도록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것은 남북정상 간 합의를 단순한 정치적 합의가 아닌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로 만들겠다는 취지다. 그렇게 해야 향후 정치상황이 바뀌더라도 정상 간 합의가 영속적으로 추진될 거라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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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문제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그런 절차를 밟기 전에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청와대가 충분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파심에 그 고려사항이 무엇인지 이곳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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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대통령 지시에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을 보면 거기엔 분명히 남북합의에 대해 비준절차를 취할 수 있는 규정이 나온다. 즉, 제21조는 남북합의에 대해 대통령이 체결 비준하며 특별히 중요한 합의(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우며 입법사항에 관한 것)는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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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항은 남북합의에 헌법상 조약비준 절차를 적용시킬 수 있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이 있다고 해서 남북 합의를 반드시 조약과 같은 비준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볼 것은 아니다. 이 법률의 적용은 매우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남북합의를 이 법률에 따라 비준절차를 밟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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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조약 비준(ratification)이란 국가 간 체결하는 조약에서 대통령이 대외적으로 그 기속적 효력을 인정하기 위한 의사표시이고, 국회 동의는 비준대상 조약 중 중요 조약에 대해, 비준 전에, 국회 승인을 받는 절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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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남북 정상 합의를 국가 간 체결되는 조약과 같은 지위를 주어 위 법률에 따라 비준절차를 밟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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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대외적으론 국가적 실체로서 서로 인정해야 하지만, 직접 남북 간 접촉을 할 때는 국가 간 관계가 아닌 특수한 관계라고 했던 게, 우리 정부의 오랜 정책이었다(이것에 대해서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의 명문 규정도 있다. 즉 동법 제3조1항은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음). 이것이 개성공단을 만들 때, 그것에서 비롯되는 교류가 국가 간 무역관계가 될 수 없다고, 국제사회를 설득한 우리 정부의 논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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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남북 정상 간 합의를 국회 동의의 대상이 되는 중요 조약으로 보고 비준절차를 진행한다면, 위 근거규정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그동안의 정부 대외정책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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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중요 조약으로 보고 국회 동의를 받을 경우 거기에서 비롯되는 불안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다. 이게 가장 우려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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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합의를 조약발효 절차에 준해 비준절차를 진행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해야 한다. 남북 정상의 합의문 서명--->국회 비준동의--->비준서 교환(단,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규정을 보면 비준서 교환과 같은 절차는 없는 것으로 보아 비준절차는 단순히 대한민국의 절차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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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듯이, 정상회담 합의에 비준절차를 적용시키면, 두 정상이 합의에 이른 다음 서명을 한다고 해도, 그 합의는 바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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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절차를 밟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정상회담을 할 때, 합의 서명 후 국회 동의절차에 넘겨지고 그 동의 여하에 따라 효력이 발생한다고, 북에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일반적으로 조약의 경우도 국가 대표가 조약문에 서명을 한다고 해서 바로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국내 비준절차를 밟는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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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이 역사적인 합의에 서명하면서 북에 이런 조건을 달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다(북에선 김정은이 한 합의는 그 이상 다른 국가기관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실상 최상의 규범력을 갖는 것임). 더욱 정상 간 합의 후, 야당이 반대해 결국 국회 동의를 못 받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이것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경우, 비준동의 절차를 추진한 걸 크게 후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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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생각하면, 남북 정상 간 합의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남북한 및 국제정세에 따라 수시로 흔들릴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경우 합의에 법률적(조약적) 지위를 부여했다고 해도 그것을 상호 준수하긴 어려울 것이다. 북쪽이 일방적으로 합의를 지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남쪽만 법률적 효력을 주장하면서 준수를 고집할 수도 없다(그래서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제23조도 남북합의서를 효력을 일방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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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간의 합의는 비록 그것이 조약적(법률적) 합의가 아니라 해도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의 정치적 합의이며, 남북이 어떻게 실천해나가느냐에 따라, 조약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되어 그 합의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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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정상 간 합의도 조약의 방법으로 체결된 게 아니다. 대부분 정상들이 정치적 합의를 한 이후 그것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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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역사적인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조약에 준해 국회비준 동의를 추진한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런 고려와 대비 없이 접근하면 국회 비준동의 추진은 안하는 것만도 못할 수 있다. 아무쪼록 이런 우려를 충분히 검토하기 바란다.


(2018.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