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종교 철학 심리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박찬운 교수 2019. 2. 6. 18:31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얼마 전 페친인 윤진수 교수님(서울대 로스쿨)이 이 공간을 통해 책 한 권을 추천했다. 교토 대학 교수 오구라 기조가 쓴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조성환 역)라는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의 한국 사상사 전공자가 다년 간 한국을 연구한 끝에 써내려간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철학적 분석서이다. 도대체 한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이 책은 매우 분석적으로 한국이란 나라에 흐르는 철학적 기조를 파헤쳤다. 240여 쪽의 책은 각 쪽마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답하고 있으니, 세부적인 주제를 열거하면 쪽수만큼이나 많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제는 하나다. 한국을 성리학의 이와 기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조선조를 지배한 성리학이 아직도 계속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존재를 들어본 사람들 중엔 이런 태도에 대해 대뜸 고리타분하다고 할지 모른다.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그런 획일적인 잣대로 우리 사회를 평가하다니, 글쓴이를 한심한 작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다음에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올까? 

솔직히 말해 나는 이 책을 약간 반감어린 시각을 갖고 읽기 시작했으나, 마지막 장을 넘긴 다음, 그의 말 상당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론 제3자가 우리를 정확히 본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삶을 관찰한 외국인의 눈이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 중에서 책 제목과 같은 소제목이 나오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을 인용해 본다. 이 책의 나머지 내용은 이것을 풀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조선 혹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철학 그 자체가 영토, 사람, 주권으로 응결된 것이 조선 혹은 한국이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리(理)를 말한다. 주자학에 의한 국가 통치 이후, 이 반도를 지배해 온 것은 오로지 ‘리’였다. 항상 ‘하나임(一個性)‘을 주장하는 ’리‘였던 것이다. ’리‘란 무엇인가? 보편적 원리다. 그것은 천(天), 즉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사회의 도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된, 아니 일치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절대규범이다.
오늘날의 한국인의 도덕 지향성은 이 전통적인 ’리‘ 지향성의 연속이다. 조선 왕조의 철학자들은 실로 치밀한 이기론을 수백 년 동안이나 되풀이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마음에서 사회와 우주에 이르는 모든 영역을 ’리‘와 ’기‘의 관계를 가지고 좀 더 논리정연한 체계로 설명할 수 있는 세력만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철학 논쟁에서 패배한 그룹은 권력에서 배제된다.
’리‘는 보편의 운동이다. 이 보편을 격렬한 논쟁에 의해 거머쥔 자가 권력과 부를 독점한다. 즉 ’리‘는 진리이자 규범이자 돈과 밥의 원천이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체현하는 ’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원적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체현하는 ’리‘가 많을수록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20)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을 비판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의 입지를 넓힌다. 그 비판의 잣대는 대부분 도덕적 기준이다. 비판하는 자의 실제 도덕성은 큰 문제가 아니다. 도덕적인 자가 비도덕적인 자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도덕성의 주장은 그저 도덕 지향적일 뿐이다. 큰 인기를 누린 배우가 하루아침에 끝장나는 것은 연기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부도덕하다고 할 만한 사생활이 드러나는 순간 생명이 끝난다. 수십 년 간 공정 언론인으로 존경받았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날아갈 수도 있다. 보도의 공정성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생활이 부도덕하다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다. 

우리 사회는 오랫 동안 이념논쟁을 하고 있다. 사회는 전체적으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극단적인 싸움을 해나간다. 일단의 사람들은 지금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확성기를 통해 반공 멸공을 말한다. 태극기 부대는 거리에서 좌파 빨갱이를 처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허구한 날 저런 일이 벌어지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든다. 잘 생각하면 이런 현상은 조선 조 당쟁과 비슷하다. 당쟁은 그저 정치노선에 대한 다툼이 아니었다. 그것은 죽기와 살기를 가르는 이념투쟁이었다. 사는 자는 정권을 잡았고 잃는 자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지금도 그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과 이념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은 단순한 도덕과 이념으로 재단하기엔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멋진 연기로 보여주는 배우, 공정 보도를 위해 힘쓰는 기자, 연구실에서 밤을 새우며 연구하는 학자, 수많은 대중을 상대하며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 이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 직업적 양심을 넘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덕적 가치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 현대 대한민국에 정령 맞는 가치관일까?

(2019.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