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미국남부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와 우주를 생각하게 하는 곳 로스코 채플을 찾다

박찬운 교수 2018. 1. 3. 21:57

나와 이웃 그리고 세계와 우주를 생각하게 하는 곳

로스코 채플을 찾다

 

 

로스코 채플


1.

여기는 휴스턴입니다. 이 글을 휴스턴의 한 작은 호텔에서 씁니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자니 한 곳이 유난히 생각납니다. 잊기 전에 그곳을 꼭 정리해야겠습니다. 요즘 제 기억력으론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았더라도 얼마 가지 않으니까요. 나이 먹어 가니 확실히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이제까지 기억력 하나로 버텨왔는데... ㅎㅎ 뭐 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부지런히 쓰고 정리해 두는 수밖에 없지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휴스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야겠군요. 휴스턴은 텍사스 주의 동쪽 멕시코 만에 가까운 항구도시입니다. 다만 항구도시라고 해도 멕시코 만에 직접 면해 있는 해안 도시는 아닙니다. 운하를 파서 멕시코 만으로 연결시켜 항구도시로 만든 도시이지요. 인구(230)와 경제 규모로 보면 미국 텍사스 주의 제1의 도시이자 미국 남부권의 최대 도시입니다. 미국 전역에선 4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휴스턴은 미국의 석유화학 산업의 메카입니다. 멕시코만의 미국 유전에서 발굴되는 석유가 바로 이곳에서 정제 가공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는 곳입니다. 포춘지가 선정하는 세계 500대 기업의 25개 본부가 이곳에 있다고 하니 이곳 경제 규모를 대충 짐작할 겁니다. NASA의 우주인 훈련센터인 존슨 스페이스 센터(JSC)와 세계 최대의 병원이자 의료연구 단지인 텍사스 메디칼 센(7만명 이상의 인력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폐암 치료를 받았다는 MD 엔더슨 암센터도 여기에 있음)도 휴스턴에 있습니다.


이 정도면 휴스턴이 대충 어떤 도시인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휴스턴은 한마디로 미국 남부의 경제 중심입니다물론 요즘 휴스턴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가가 몇 년 동안 하락세인데 작년 여름 대형 허리케인 하비가 강타해 이곳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북서쪽 내륙에 있는 라이벌 도시 달라스가 뜨고 있습니다. 한국 텍사스 직항도 요즘엔 달라스 행만 있지 휴스턴 행이 없어진 게 그것을 실감케 합니다. 그럼에도 휴스턴은 미국 남부 경제의 중심인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휴스턴은 과거엔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텍사스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텍사스 공화국을 만든 1836년엔 그 첫 번째 수도이기도 했으니까요. 휴스턴이란 이름은 텍사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 샘 휴스턴의 이름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날 텍사스의 정치중심은 서쪽 내륙 도시 오스틴입니다. 오스틴엔 주의회 뿐만 아니라 텍사스를 대표하는 대학 텍사스 주립대학(University of Texas)이 있습니다.

 

'부러진 오벨리스크'와 로스코 채플,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2.

오늘 제가 기억하고 싶은 곳은 로스코 채플이란 곳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 존재에 대해 잘 몰랐다가 여행 중 알았습니다. 제 관심사를 잘 아는 지인이 휴스턴에 가면  꼭 가보라고 한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마크 로스코,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라는 사람을 아시는지요? 이 사람은 20세기 미국 표현주의 추상화를 대변하는 작가입니다. 저는 사실 그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제가 미술에 관한 책을 쓴 사람 아닙니까) 표현주의 추상화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로스코의 작품은 대충 이렇습니다. 벽면 한 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캔버스! 제 눈엔 그냥 천 위에 주황색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위대한 20세기 추상 회화라고 설명합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현대회화를 볼 수 있는 최고의 미술관이라 불리는 테이트 모던을 여러 번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방 하나가 바로 로스코에 헌정되어 있는데 저는 그 방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저 발걸음만 재촉하면서 다음 방으로 옮겼으니까요.

 

로스코 채플 내부,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3.

이 로스코 채플은 그 로스코가 설계하고 자신의 그림 14점을 걸어 둔 곳입니다. 이 채플이 만들어진 것은 휴스턴의 현인이라 할 수 메닐 부부(John and Dominique de Menil)의 남다른 생각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휴스턴에서 각종 예술품을 수집하기로 유명했는데 매우독특한 공간을 로스코에게 의뢰했습니다. 이들은 세계의 모든 종교가 그 신념을 초월해 이곳에서 만나길 원했습니다. 이곳에서 평화와 인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를 떠나 이곳에서 잠시라도 묵상하면서 자신과 세계 그리고 우주를 생각해 보길 원했던 모양입니다.

 

로스코 채플을 만든 메닐 부부, 존 드 메닐(상), 도미니크 드 메닐(하). 아래 사진은 넬슨 만델라가 로스코 채플 상을 받을 때의 장면임,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4.

이런 이상을 로스코는 어떻게 실현했을까요. 채플의 모양은 매우 단순합니다. 혹시 르 코르뷔지에의 롱샴 채플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그 이미지와도 유사합니다. 일종의 성스런 예술(sacred art)을 구현했다고 보면 됩니다. 채플은 불규칙한 8각형 모양의 단층 벽돌 구조입니다. 묵직한 철제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큰 공간이 나옵니다. 원통 모양의 공간은 긴 나무의자 몇 개와 바닥에 깔아 놓은 방석 몇 개가 전부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와 의자에 앉거나 바닥에 앉아 명상에 잠깁니다. 벽면엔 바로 로스코의 알 수 없는 그림, 제 눈엔 그저 검은 색을 칠해 놓은 거대한 추상 작품 14점이 걸려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 묵상의 공간에 현란한 그림이 있으면 그게 어려울 것 같군요. 이런 공간엔 그저 이 암흑의 그림이 제격입니다. 

 

로스코 채플 내부,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5.

로스코 채플은 1971년 오픈한 이래 오늘까지 평화와 인권의 전당이었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 와서 묵상을 했고 유명 지도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로스코 채플 상이란 것도 만들어져 평화와 인권에 기여한 이들이 이곳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그 중엔 넬슨 만델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미 카터가 이곳에 왔고 달라이 라마도 이곳에 와서 연설을 했습니다. 종교 간의 평화를 논하는 콜로퀴엄이나 평화를 기원한 음악회도 이곳에서 열립니다.

 

로스크 채플 내에서의 콜로퀴움,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6.

채플 밖엔 부러진 오벨리스크(Broken Obelisk)’라는 조각품이 조그만 연못 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바넷 뉴만이란 작가의 작품인데, 이 작품이 여기까지 오는데 일화가 있습니다. 원래 이 작품은 워싱턴 디시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969년 메닐 부부는 자기들이 돈의 일부를 댈 테니, 이것을 시청사 앞에 설치해서 인권운동을 하다가 암살된 마틴 루터 킹 목사에 헌정하자고, 휴스턴 시 의회에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마지막 단계에서 의회가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됩니다. 메닐 부부는 이 상황에서도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작품을 독자적으로 구매해 로스코 채플 앞에 전시해 버린 것이지요.

 

부러진 오벨리스크, 사진 로스코 채플 공식 사이트 (rothkochapel.org) 


부러진 오벨리스크? 그것이 무엇을 상징할까요? 설명을 찾아보았지만 애석하게 저를 만족시키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하늘로 높이 솟아 있던 오벨리스크가 부러져 그 끝이 피라미드의 꼭지점에 닿고 있습니다. 인간의 만용을 꾸짓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허영에 아무리 한계가 없다고 해도 신 앞에선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부러진 오벨리스크에서 바라다보이는 로스코 채플,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분명 있습니다.


 

로스코 채플에서 필자


7.

휴스턴을 들르는 여행자에겐 미술관의 거리에 있는 휴스턴 미술관(Houston Museum of Fine Arts)은 필수 코스일 겁니다. 저도 가보았는데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입니다. 역시 잘사는 도시의 미술관은 다릅니다. 그러나 저에겐 그 미술관 보다 그 근처에 있는 이 로스코 채플의 여운이 계속 남습니다. 


페친 여러분, 혹시 휴스턴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다면 휴스턴 미술관 근처에 있는 이곳을 잠시 들러보십시오. 이곳에서 나를 내려놓고 묵상에 잠겨 봅시다. 나와 가족 그 너머에 있는 이웃과 세계 그리고 자연과 우주.... 이것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2018.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