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일반

독서와 나이

박찬운 교수 2018. 9. 26. 05:38

독서와 나이




추석 연휴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중하던 논문 쓰기를 잠시 중지하고 책상 앞에 쌓아 놓은 책 중 한 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나온 알렉산더 해밀턴 전기입니다. 책 두께가 제 베개 보다 두껍습니다. 무려 1400쪽. 일주일 전부터 틈틈이 읽고 있는데 끝까지 읽으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저 책을 다 읽으면 미국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해밀턴뿐만 아니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대부분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미국 건국 초기 역사를 한 손에 쥐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뿌듯합니다. 

나이 먹어가면서 실감하는 게 있다면 기억력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기억력 감퇴를 느낍니다. 저 같은 사람은 사실 기억력이 가장 중요한 재산인데 요즘 영 자신이 없습니다. 책을 읽어도 남는 게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 한 권 다 넘기고 나도 기억나는 게 없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요즘은 한단계 더 나아가, 책을 읽으면서도 전 장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는 말을 수시로 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독서를 함에 있어 과거와 달라진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대부분의 독서는 책 내용을 세세히 기억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취지를 파악하는 데 신경을 씁니다. 서문을 정독하고 나머지 부분은 발췌독을 많이 합니다. 어차피 책장을 덮으면 기억나는 게 없을 텐데 한 책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대신 저자의 저술 의도는 과거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이해는 과거보다 훨씬 나아진 것 같습니다.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닌 모양입니다. 

둘째, 기억력과 관계없이 어떤 책은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무식하게 밑줄치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독서가 끝난 다음엔 중요부분을 옮겨 리뷰를 써봅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기억력을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알렉산더 해밀턴 전기도 그렇게 읽고 있습니다. 이 전기를 다 읽으면 멋진 리뷰를 써볼 겁니다. 미국의 틀을 만든 해밀턴은 이제 제 친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저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으니 잘 생각하면 그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습니다. 나이 든 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다른 법입니다.

셋째, 즐거운 독서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이때 책은 제게 거의 유일한 친구입니다. 때때로 명저의 한 줄 한 줄을 음미하는 것만큼 즐거운 게 없습니다. 과거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눈에 들어옵니다. 책 읽는 것은 단순한 도락이 될 수 없고 여전히 어렵습니다만 그렇다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나이가 준 선물입니다.

나이 들어 중요한 게 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루도 의미 없는 날은 없지만 그 말은 아무에게나 쓸 수는 없습니다.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사람에겐 평생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노년을 풍요롭게 보내려면 이 대열에 들어서야 합니다. 저는 노후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과 함께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두 개만 있으면 죽을 때까지 우리의 인생은 풍요롭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2018.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