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Essays/깊은 생각, 단순한 삶

이순(耳順)의 의미

박찬운 교수 2020. 12. 30. 05:54

 

 

이제 이순의 나이다.

 

이제 제 나이 이순이 되는 게 48시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이순(耳順)이란 세상의 어떤 소리를 들어도 크게 놀라지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들이 많습니까. 얼마나 목불인견의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고 듣는다 해도 이제 판단력이 크게 흐려지지 않는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이 나이가 되면 과연 그럴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60이 된다고 저절로 귀가 순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이 나이는 좀 더 경계하며 살아가야 할 시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제 60이 되었으니 조그만 일에 흥분하지 말고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겠습니다. 그런 눈을 갖도록 자제력을 터득해야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화가 미칠 수 있는 경계의 나이, 그게 이순입니다.

 

 

2020년 1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로 첫 출근을 했다. 그날 찍은 사진.

 

 

5년 전 나이 쉰다섯이 되면서 ‘경계인을 넘어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때까지 제 삶을 '경계인으로서의 삶'으로 규정하고 앞으론 좌고우면하지 않고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위해 과감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밝힌 책입니다. 특히 저는 진보의 노선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앞으로의 삶은 그 가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내 생각이 개인과 이웃 그리고 인류의 행복을 가져오는데 도움이 된다면, 과감하게 말하고 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밝힌지 5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약속대로 살았습니까? 스스로 자성해 봅니다. 

제 자신에게 상당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사회적 논쟁에 많이 참여했고 제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삶은 단순했지만 뜨겁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권위도 제 비판의 대상에서 빗껴 나간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대로 경계인을 넘어서의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저를 돌아보면 쓸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많은 울림이 있지만 그것을 나눌 공간과 친구는 찾기 힘듭니다. 이런 말을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질만한 친구가 어디에 있을까. 내게 이런 고민이 있다고 하면 연민의 정을 나누면서 공감할 사람이 누구일까....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저는 인생을 고독과 싸워왔습니다. 이 고독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심연에서 결코 밖으로 나올 것 같진 않군요. 사람들은 그런 저의 삶을 팔자요 운명이라고 말할 겁니다. 이순은 바로 이 팔자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사무실 벽면에 붙어 있는 액자. 버트런드 러셀(좌), 반 고흐 달력(중앙), 노암 촘스키(우)

 

 

5년 전 ‘경계인을 넘어서‘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거울을 바라 봅니다. 그 때보다 머리는 훨씬 더 희어졌습니다. 5년이란 세월이 저의 몸 구석구석을 새롭게 수놓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인생 후반전으로 들어선 기분입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할까? 다시 한 번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일을 거창하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해온 일을 잘 정리하고 ’나‘란 사람이 이 땅에서 그 어떤 목적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 남기고 싶습니다. 나는 결국 먼지로 돌아가겠지만 내 삶이 무의미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태어나 살아오고 죽어가면서 그냥 아무 목적지도 없이 방황하는 나그네는 아닐 것입니다. 분명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겁니다. 죽음은 그저 단순한 인생 종착역이 아닙니다.


당분간 저는 공직자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임기 3년 중 1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2년 제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인권기구를 지금보다 좀 더 신뢰받는 인권전문기구로 만들어 내는데 제 능력을 바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제 뜻을 잘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동지적 유대감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양심과 소신에 맞게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론 좀 부드럽고 여유 있는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딱딱하게 살았습니다. 또 너무 급하게 살았습니다. 잠도 많이 잤으면 좋겠습니다. 휴일엔 늦잠도 자고 남들처럼 브런치를 먹고 싶습니다. 가끔은 영화를 보기 위해 밤늦게 자기도 하고 또 가끔은 친구들과 거하게 취하고도 싶습니다. 동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서해의 낙조를 보기 위해 차를 몰고 달려보면 좋겠습니다. 저라는 사람을 내려놓고 살갑게 살고 싶습니다. 가족을 위해 요리도 배우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받기 보다는 주는 삶을 살겠습니다.(2020.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