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를 가다(4/최종회)-알마티로 가는 길-
중앙아시아를 가다(4/최종회)
-알마티로 가는 길-

이제 여행의 종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식쿨 호수 인근 도시 카라콜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하고 산속 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카라콜은 키르기스스탄 4번째 도시라지만 인구 9만에 불과한 조그만 도시다. 특별히 볼만한 게 있는 도시가 아니니 그냥 패스해도 될듯하지만 이곳에 오면 꼭 들러야 되는 건축물 몇 개가 있다. 그중 하나가 중국 기와집 형태의 모스크인데 지나가면서 차창으로 언뜻 보았을뿐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인터넷으로 모스크를 찾아 살펴보니 10여 년 전 타클라마칸 기행을 할 때 들렀던 카슈가르의 모스크와 흡사했다. 중국과의 변경 지대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교착현상이 건축양식에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신 한 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인데, 나무로 지어진 고색창연한 건축물이었다. 처음(1872) 정교회 성당이 이곳에 지어질 때는 돌로 지었으나, 1890년 지진으로 파괴되자 나무로 다시 지은 것이다. 1895년 완공이라니 이제 130년 쯤 되는 성당이다. 외관은 비바람을 맞아 나무 색깔이 검은 색으로 퇴색되었지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5개의 푸른 색 돔은 여간 운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애석한 것은 신자가 얼마 안 되는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점. 건물 곳곳이 보수를 기다리고 있었고, 정원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방문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더군다나 지난 100년간 이 성당에 불어닥친 많은 애환을 들어보니 더욱 짠하다. 1916년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정교회를 지키던 여러 사제들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 시절에는 성당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학교나 체육관 등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성당으로 복귀한 것은 1991년 키르기스스탄이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였다.



알마티로 가는 길은 눈이 시리도록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이곳이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심장부다. 산마저도 나무 대신 풀이 자라고 있다. 거기에 말, 소 양들이 유유자적 풀을 뜯고 있다. 군데군데 원주민들의 유르트(천막집)가 보이는 이곳보다 평화스런 곳이 지구상 어디에 있을까. 이속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논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소유개념이 있을 턱이 있었겠는가(이것은 과거 유목 사회 대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소유권 제도가 없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의 모순에 따른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들 그것이 과연 먹혀 들어갔을지 궁금하다.




카라콜에서 알마티를 향해 바로 직진한다면 3-4시간이면 갈 거리이지만, 일행은 천산산맥의 절경을 보기 위해 차른(샤린) 협곡으로 향했다. 이 협곡은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는 곳으로(이런 이야기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해 그랜드 캐년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다.) 차른강의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만들어진 협곡이다. 협곡은 차른강을 따라 150여 킬로미터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들이 찾은 곳은 일명 ‘성 계곡’으로, 안내소에서 차른강까지 2킬로미터 정도의 트랙킹 구간이었다. 가는 내내 붉은 퇴적암의 기암괴석을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이런 협곡은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천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도 볼 수 있으니, 여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지역을 간다면 여길 빼놓으면 조금 섭섭한 곳이긴 하다.

밤늦게 드디어 사과의 고향 알마티(알마티는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임)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종착지다. 인구 2백만의 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 1929년부터 카자흐스탄의 수도였으나 1997년 수도의 자리를 북쪽 아스타나에 내주었다(왜 수도를 옮겼을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지진. 알마티는 지진 위험성이 큰 도시다. 과거 큰 피해를 입었다. 또 하나는 북쪽 러시아 변경의 러시아인들의 분리 움직임에 대한 대응적 차원.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결단인데, 나는 이것이 더 큰 이유라고 본다.) 그럼에도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정치적 수도가 아니라 상업적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경제력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이 도시를 능가할 도시는 당분간 없어 보인다.

알마티는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10세기경부터 존재해 왔고 실크로드 초원길의 중심 포인트라고 여겨지지만, 도시로서 성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 와서 실크로드의 옛 유적을 찾아 헤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카자흐 부족이 이 지역으로 와서 정착한 것은 대략 15세기 이후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 세기 동안 다른 부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 이후에는 청나라에 의해, 19세기 이후에는 러시아 의해 지배된다. 본격적으로 도시로 개발된 것은 러시아의 지배가 확립되는 19세기 말로 요새(베르니)에서 도시로 확대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이곳에 러시아인과 우즈베키스탄인들이 유입되었고, 시베리아와 연결되는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변방의 거점 도시로 자리매김한다. 다만 이곳은 세계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로서는 극한의 삶을 강요받는 곳이어, 혹독한 시베리아와 비교해 크게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스탈린의 정적 트로츠키도 한때 이곳으로 추방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알마티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 키르키스스탄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차량만 보아도, 도심의 이곳저곳에 붙어 있는 자동차 선전 간판만 보아도, 네온사인 불빛만 보아도, 다르다. 뭔가 윤택하다고나 할까? 기름기가 번지르르 흐른다고 할까? 카자흐스탄은 1인당 국민소득이 이미 1만 불을 돌파했고, 매년 10% 가까운 급성장을 하고 있다. 탄탄탄 국가 중 최고의 경제성장을 구가하는 나라다. 카자흐스탄의 땅 크기는 무려 한반도의 12배, 대한민국의 27배다. 한마디로 중앙아시아의 거인이다. 거기에다 원유, 천연가스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고 밀 생산량도 세계 10위권에 드는 자원부국이다. 서울의 남산에 해당하는 알마티 시내를 전망할 수 있는 콕토베에 올라가 보니 젊은 사람들과 가족들로 인산인해다. 키리기스스탄의 조용한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 모습도 조금 더 세속화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가 과연 무슬림 국가인가?

알마티 시내는 한 세기를 넘긴 옛 건물이 거의 없다. 이것은 아마도 20세기 초 강력한 지진으로 시내 전체가 폐허가 된 것이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도시의 외양만으로는 1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도심 한 곳에 옛 건물 하나가 있다. 도심 공원 판필로프 내에 있는 정교회 젠코프 성당이다. 이 성당은 카라콜에서 본 정교회 성당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데, 사면이 모두 정면처럼 보이는 멋진 건축물이다. 1911년의 강력한 지진(진도 10)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니 목조건물의 내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그래서 카라콜의 정교회 성당도 지진 후 나무로 만든 것임). 판필로프 공원은 2차 대전 당시 모스크바 방어전에 참가해 전사한 28명의 근위병(지휘관 이름이 판필로프)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대형 조형물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알마티 시내 관광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은 그린 바자르다. 이곳은 재래시장으로 주로 고기와 말린 과일 및 견과류, 치즈 등을 파는 곳인데, 이 시장 내 한켠에서 우리 고려인들을 만날 수 있다. 반찬가게 코너를 가면 어디서 본 듯한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반찬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을 파는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 여성들이다. 그들의 인상은 웃는 낯이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강인한 성품을 읽을 수 있다. 고려인들은 이곳 카자흐스탄에서 억척같은 삶을 일구어온 사람들이다. 1937년 어느날 갑자기 극동지방에서 살던 그들은 소련 공산당 중앙의 통지 하나로 저항도 못한 채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그중에서도 카자흐스탄은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배치되었다. 이주 명령의 대상이 된 17-8만명 중에서 거의 절반이 카자흐스탄으로 왔다고 한다. 그렇게 온 이들이 피와 땀으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살아남았다. 고국의 음식을 이곳 지리에 맞춰 변형했지만(이곳에서는 배추나 무보다도 당근이나 양배추가 많이 생산됨으로 그것을 이용해 김치를 담는다) 조선의 DNA는 분명히 유지하고 있다. 이런 삶을 산 동포 중의 한 명이 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이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한 청산리,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이곳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이후엔 극장의 수위로 연명하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문재인 정부는 그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 와 국가적 추모를 약속했다.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고 육사에 흉상을 세웠다. 그런데 현 정부가 들어서자 홍장군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달라졌다. 공산주의자 운운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흉상의 이전을 검토한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에 카자흐스탄 동포사회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린 바자르를 나오면서 죄송함에 마음이 우울해졌다.




여행을 정리하면서 제일 중요한 이야기 하나가 빠진 것 같다. 음식 이야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돌아다니면서 먹는 것 이상 중요한 게 없다. 열흘간 돌아다니면서 현지 음식을 다양하게 먹어보았다. 어딜 가도 음식을 가리지 않는 식성도 한몫했겠지만 이번 여행은 먹방여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먹는 것이 즐거웠다. 양고기 등을 꼬치에 꽂아 구운 요리인 샤슬릭(우즈베키스탄의 한 음식점에서는 6미터나 되는 거대한 꼬치요리를 선보여 주었다. 고기가 나올 때는 종업원들이 모두 나와서 춤과 노래를 불렀다), 기름 볶음밥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프, 고려인들이 만든 국시, 양파와 고기, 감자로 속을 채워 구운 삼사, 거기에다 화덕에서 구워내온 두꺼운 난(특히 우즈베키스탄의 난이 내겐 좋았음) 모두 입에 맞았다. 밥을 먹을 때마다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빠짐없이 음식 사진을 찍었다. 그것을 여기에 일부 콜라주 형태로 올려본다. 보는 것도 싫고 걷기도 싫은 사람들은 음식기행을 해도 좋은 곳이 중앙아시아이다. 다만 돌아올 때는 몸무게가 몇 킬로 찌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글을 끝내며 한 가지 감상. 여행을 하면 할수록 대한민국에 사는 특수한 ‘나’를 넘어 보편적인 ‘나’를 느낀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 중 이식쿨 호수 근방 어느 유르트를 방문했을 때 식사를 하는 한 가족을 만났다. 호기심이 생겨 인사를 했더니 음식을 권하며 합석하란다. 자신들은 형제들 가족인데 비슈케크에서 가끔 이곳으로 와서 말을 타면서 하루를 놀다 간다고 한다. 한류 이야기를 했더니 BTS를 이야기를 하며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말을 한다. 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보편적인 내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모두는 지구 가족의 한 일원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2024. 8. 12. 중앙아시아 여행기 최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