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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박찬운 교수 2017. 1. 1. 10:12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경계인을 넘어서-

 

 

나는 하루하루를 고독한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아는 것을 정확하게, 양심껏 표현해야겠다. 용기를 갖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우리가 가야할 내일을 이야기해야겠다."

 

 

내 나이 쉰여섯,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2017년 정유년 새해 첫날이다. 내 나이 쉰여섯. 적잖은 나이다. 이제 나이가 적다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 할 상황이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한 중년 남자가 있다. 갑자기 그 모습에서 타인을 느낀다. 나는 거울 속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자 그가 말한다.

 

나는 투사도 연구자도 아니다

나는 젊은 날부터 법률가로 살아왔다. 개인적 양심의 발로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에 동참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소속했던 민변의 다른 동료 변호사만큼 내 몸을 던지진 못했다. 어떤 이는 거리로 나가 취루탄을 맞았고, 어떤 이는 길바닥에 누워 민주를 외쳤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투쟁적 언사를 쓴 바 없고 독재자의 하수인에 대해서까지 동정심을 보여주었다.


대신 나는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그것이 나 같은 미지근한 법률가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라고 나를 합리화했다. 이름 덕을 보았는지(내 이름이 빛날 찬, 운전할 운이니 그 운이 찬란하다는 뜻일 게다) 운까지 따랐는지 나는 삶의 터전을 학교로 옮겼고 교수가 되었다.


교수가 된 지 10년이 되었건만 나 스스로 연구자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나를 구태여 말한다면 현실참여형 연구자다. 내 관심사는 책 속의 문자만이 아니다. 나의 관심사는 살아 있는 현재, 투쟁하는 거리다. 연구자 생활을 하면서도 내 귓전엔 거리에서 외쳐대는 동지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나는 지금도 투사와 연구자 사이에서 방황한다. 민중의 분노가 차올라 시청광장에서 규탄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고민한다. 나도 한번 나가서 크게 외쳐볼까? 그러나 대부분 집회 현장엔 나가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 기사를 보면서 상황을 체크한다. 물론 가끔은 집회현장에 나가보기도 하지만 선두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서성이다가 돌아온다.

 

나는 주류도 비주류도 아니다

나는 변호사요, 박사요, 교수지만 이제껏 이 사회의 주류에 속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과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보면 나는 분명 비주류다. 하지만 이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 빽 없는 사람들이 보면 나는 분명 주류다.


나는 주류의 세계에선 육두품이지만, 비주류의 세계에선 보기 드문 귀공자다. 나는 그게 불편하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있는 삶을 좋아한다. 걸으며 사색하는 걸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겐 하나의 숙명일지 모른다.

 

나는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아니다

법률가는 대부분 현실주의자다. 나는 법률가들 사이에선 매우 이질적인 사람이다. 나는 미술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한다. 내 머리 속엔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다. 나는 이 살벌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다. 틈만 있으면 배낭을 짊어지고 이 땅을 떠나길 좋아한다. 내 동료 법률가들에겐 분명 나는 이상주의자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이지 허공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교수들의 공론에 가까운 말과 글을 만나면 유독 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동료교수들은 분명 나를 학문의 세계에서 먼 현실주의자라고 볼 것이다.

 

경계인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말하니 나는 어디에도 소속해 있지 않은 경계인이다. 그렇다, 나는 하루하루를 고독한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땅에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한테 세상에 기여할 능력은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내겐 말과 글로 표현하는 재주가 있다고. 어려운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도 있다고. 그래 이제 그만 겸양의 미덕을 던져버리고 그것들을 내 스스로 인정하자


나는 누구보다 잘 말할 수 있고 잘 쓸 수 있다. 이 능력을 제대로 사용해 내 인생 후반부를 살아야겠다. 내가 아는 것을 정확하게, 양심껏 표현해야겠다. 용기를 갖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우리가 가야할 내일을 이야기해야겠다. 그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게 바로 새해 첫날 내가 결심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