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내가 본 대한민국

내가 본 대한민국 (훌륭한 삶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9. 27. 17:01

내가 본 대한민국

훌륭한 삶에 대하여
ㅡ종교에 관한 나의 고백ㅡ


대한민국의 제 영역에서 해방 이후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진 영역은 어디일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종교다. 그 중에서 기독교(개신교 및 천주교)의 성장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한밤 중 남산에 올라 하얀 십자가를 세어보라. 마치 한 집 건너 하나씩 십자가가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이미 동방의 예루살렘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기독교도 이제 점점 쇠퇴일로에 있다. 교회에 관한 모든 통계가 그것을 말해주는 데, 70-80년대의 고도성장을 끝내고, 이미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는 더 이상 과거의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향후 기독교의 성장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인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크게 떨어진다(다만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사회적 신뢰도 높은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그 중에서 기독교가 우리의 삶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격정시대를 쓰면서 종교문제를 오늘의 주제로 가져온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민하는 게 종교이고, 우리 사회에서 종교만큼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난 세월 격정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이, 함께 공유할 주제로서, 이 보다 더 적합한 게 어디에 있을까.


오늘 나는 이 문제를 나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종교에 관한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신실한 종교인들에게는 조금 거북한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나는 적어도 지난 30년간 종교에 관해 수없이 갈등해 왔다. “주여, 나의 주여,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이까.” 나는 이렇게 절대자를 찾았고, 진리를 찾아 헤맸다. 어떤 때는 희망 속에서 환희의 눈물도 흘렸지만, 어떤 때는 좌절 속에 비탄의 눈물도 흘렸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둘 중 하나는 그렇다고 할 것이다.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불교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이 정도로 종교인이 많다는 게 놀랍다. 종교 내용을 보면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 5명 중 3명은 기독교(개신교 및 천주교)를, 나머지는 불교를 믿는다.


내 경험으로 우리나라 종교인들의 특징을 거칠게 말하면ㅡ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있더라도 그저 너그럽게 받아주길 바란다ㅡ먼저 기독교인은 지나칠 정도로 교조적이다. 주일성수(일요일 교회에 나가는 것)를 유난히 강조하고, 생활상의 금기도 많다(개신교인들은 술 담배를 하는 것도 비 신앙적 행위라고 함). 이런 모습은 기독교의 본고장인 서구사회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현상이다.


그러나 한 사회인으로서 그 태도를 본 받고 싶은 사람은 기독교인 중에는 별로 없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보면 기독교에 대해 회의만 들뿐이다. 70-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이나 개신교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삶은 그런 역사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그 수많은 불미스런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런 교회에서 무슨 구원을 바라겠다고,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물욕에 쪄든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외치는지... 도통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의 종교의 본질을 분석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유물론적 철학을 적용하면서 종교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이 책은 또 다른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과 함께 그의 대표적 종교비판 저서이다.


이것은 불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불자는 그가 불심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내는 게 특징이다. 일상사에선 비불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신실한 불자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가끔 보신탕 먹으러 갈 때 자신이 불자임을 밝히며 안 먹는다고 하는 사람을 제외하곤 불자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사람은 드물다. 불자 중에서 이 풍진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물에 콩이 날 확률이 아니라, 마른 하늘 아래에서 벼락에 맞을 정도로 어려울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왔다. 유한한 삶 속에서 거짓에 속지 않고 참된 것에 내 인생을 바치고 싶었다. 나타나는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진리는 진짜 지식이고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했기에 일찌감치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절대적 진리야말로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된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젊은 시절의 좌절, 불안 그리고 방황 때문이었다. 이런 것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강력한 존재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을 찾았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포이어바흐가 종교의 본질을 말하면서, 인간의 공포심과 그에 기한 절대자에 대한 종속감에서 종교의 기원을 발견한 것을 뒤 늦게 알았지만, 내 경우를 보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종교의 가장 적합하고 포괄적인 심리적 해명근거를 우리는 종속감 또는 종속의식 이외의 것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고대의 무신론자들은 물론 고대와 현대의 많은 유신론자까지도 종속감의 가장 통속적이고 가장 현저한 현상에 불과한 공포를 종교의 근원으로 선언했다.”(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강대석 옮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한길사, 73쪽)


이 책은 러셀의 논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책에 소개된 논설 중 하나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이다. 다른 논설, 예컨대, <나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의 성윤리> 등도 자유주의자 러셀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논설이다.


오랜 세월 교회를 다녔다. 고등학교 이후 적어도 30여년 이상은 다녔을 것이다. 물론 이 기간 전부 열심히 다닌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일요일만 다니는 전형적인 선데이 맨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몇 년을 교회와 무관하게 생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매일같이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께 간절히 무엇인가를 구했다. 그러다가 수 년 전 다니던 교회를 청산했다. 왜 그랬을까?


마음이 불안할 때 교회는 내게 안위를 주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안위라는 게 반드시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한한 힘을 가진 절대자를 찾았지만, 내가 그 절대자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한한 존재일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무한한 절대자를 현재의 종교에서 찾는다는 것, 그것은 부질없는 환상이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기성종교가 역사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문화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기독교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길길이 뛸 이상한 책이지만, 기독교 밖에서 이 책을 읽으면 당연한 것을 괜히 길게 이야기한 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러셀이 나이 90이 넘어 쓴 자서전이다. 긴 생애 동안 그가 수학자로서, 철학자로서, 문학가로서, 인권평화운동가로서 살아 온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었다. 이 자서전은 상, 하권으로 되어 있는데, 최근 같은 번역자(송은경)에 의해 <인생은 뜨겁게>라는 이름으로 단권으로 번역·출간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점점 우리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교회공동체에 정이 떨어졌다. 수많은 십자가가 서울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점점 강해졌다. 도대체 이 나라의 교회라는 게 무엇일까. 그저 십자가를 팔아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것은 아닐까.


버트런드 러셀의 책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는 적지 않게 나의 종교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러셀의 글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떻게 해서 불가지론자 혹은 자유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종교에 대해 회의를 하던 차에, 서구사회에도 나 같은 의문을 품은 명철한 지성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동지를 만난 듯 기뻤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온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우리는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하게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세상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러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40-41쪽)


그러나... 내가 아무리 기독교에 회의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어떤 영성이 존재함을 부인할 순 없다. 이것은 어떤 합리주의로도, 어떤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문제다. 나는 언젠가부터 과학으로 증명 불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인간이란 그저 물질로 이루어진 살덩어리가 아니다. 그 살덩어리엔 영혼이란 정신이 깃들어져 있다! 그것이 인간실존의 모습이다. 이런 사실이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내게 다가왔다. 이것만이 지금 이 순간 고백할 수 있는 나의 종교적 영성의 최소한이다.



이 책은 진화생물학자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가 지은 것으로 그의 무신론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그 교리가 어떻게 해서 반이성적이며, 반과학적인지를 역설했다.


나는 언젠가부터 내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게 훌륭한 삶이라 생각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자유주의자로 사는 것이다. 자유주의? 무엇이 자유인가, 어떻게 살아야 자유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러셀은 그가 만든 <자유주의자로서의 10계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발췌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1.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 
……
4. 반대에 부딪힐 경우, 설사 반대자가 당신의 아내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닌 논쟁을 통해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권위에 의존한 승리는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5. 다른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지 마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
7. 견해가 유별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인정하고 있는 모든 견해들이 한때는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
9.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10. 바보의 낙원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말라.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 테니. ( <러셀 자서전(하)>, 286-287쪽)


몇 년 전 일이다. 나이 50줄에 접어들면서, 나는 나의 종교관을 스스로 점검해보았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믿는지, 노트를 꺼내 정리해보았다. 그 중에서 일부를 뽑아 오늘 이곳에 옮겨본다.


1. 나는 모든 것을 회의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합리주의를 신봉한다.


2. 나는 과학의 한계를 인정한다. 인간이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있으며,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교만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3. 나는 최초 원인자로서의 신을 인정한다. 만물에 대해 아무리 회의하고, 과학을 적용한다 해도 결코 풀 수 없는 것은 ‘최초의 원인’이다. 그 원인은 과학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종교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4. 나는 기성종교가 말하는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기성종교의 교리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오류와 독선이 존재하고 때로는 인간을 부조리하게 만든다.


5. 나는 기성종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속성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다.


6. 나는 기성종교의 종교생활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위와 같은 한계 속에서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한지 이제 몇 년이 지났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그렇다! 나는 언젠가 다시 과거의 종교생활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간다고 해도 나의 종교생활은 그저 무조건적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신자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목사의 말을 쫓아 저 강북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헤매는 신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목사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도, 아멘을 외치는 신자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나는 내 영혼을 믿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 것이고, 어떤 진리도 맹신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러셀이 말한,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이다. 내겐 이런 삶이 훌륭한 삶이라 믿는다.(2014.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