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이야기

영국이야기 35 몰타 공방전, 그 격전의 현장을 가다

박찬운 교수 2016. 12. 11. 05:38

영국이야기 35 


몰타공방전, 그 격전의 현장을 가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



몰타여행을 하기까지, 나의 여행은 답사여행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여행을 하고 싶은 데가 있었다. 몰타! 지중해 한 가운데 있는 섬나라다. 유럽에 자주 오고 한 동안 살아도 보았지만 쉽게 가질 못했다. 몇 년 전 스웨덴에 있을 때는 틈만 있으면 항공편을 알아보았지만 경유를 하는데다 경비도 만만치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뒤 몇 년이 흘러 나는 다시 유럽에 왔고 그것도 유럽 내에서 항공편이 가장 좋다는 런던에서 살고 있다. 몰타 가는 직항편도 있고 예약만 적시에 하면 왕복 항공료가 10만원도 채 안 된다. 이 기회를 놓치면 후일 큰 후회를 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래서 지난 여름 런던에 오자마자 표를 물색했고 일찌감치 표를 샀다. 그리고 몇 달을 기다렸다.

 

201612월 어느 날 아침 7시 반 몰타행 비행기는 런던 갯트윅 공항을 힘차게 이륙했다. 3시간 남짓 걸렸을까, 비행기는 몰타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아, 드디어 몰타에 왔다!


솔직히 말해 내게 이런 꿈을 갖게 한 이는 시오노 나나미였다. 나는 그가 쓴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아마 국내에 번역된 것을 다 합치면 40여 권은 족히 되리라. 그 책들을 분류하면, 로마문명(로마인이야기), 이슬람의 발흥과 기독교 문명과의 대립(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십자군이야기), 르네상스 시대 인물(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등에 관한 것들이니, 이들 책만 다 읽는다고 해도 유럽 역사 전체를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다(물론 시오노의 책은 정통 역사책이 아니니 그의 책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존재 유무를 다투면 안 된다).




시오노나나미와 그의 대표작 로마인이야기. 시오노는 역량있는 작가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곳곳에서 남성중심적이며 강자중심적 역사관을 말한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조심할 일이다.



시오노의 글이 왜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을까? 그것은 그의 글이 역사 자체를 다루면서도 어떤 다른 책보다 문학적 상상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책 뼈대만큼은 알려진 역사 책을 기초로 서술하지만 책의 살과 피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따지고 보면 위대한 역사가가 쓴 권위있는 역사책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단편적인 역사사실에 불과하다. 그 역사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일상, 그들의 눈물과 기쁨, 행복과 불행은 그 어떤 정통 역사책도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들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면 그것은 저자의 문학적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시오노의 문학적 상상력은 독서와 여행에서 나온다. 평상시에는 관심있는 역사에 대해 꾸준히 독서하고, 어느 정도 독서가 된 이후엔,관련 역사현장을 돌아다닌다. 그는 폐허 속의 역사현장에 남아 있는 주춧돌 하나를 보면서 2천 년 전 그곳에 있던 궁전을 그린다. 로마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긴 이태리 칸나이 벌판에 서서 그는 한니발이 수만의 로마병사를 유린하는 장면을 그린다. 


나는 십 여 년 전부터 시오노식의 여행을 해 왔다. 로마역사를 알고 싶은 호기심에 시노오의 책을 비롯해 각종 로마 관련 책을 읽었다. 그리고 기회가 나는 대로 여행을 떠나 역사의 현장에 서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았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로마문명 한국에 오다>이다. 




2014년 출간한 저자의 <로마문명 한국에 오다>. 로마문명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전달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사진 상당수가 로마문명과 관련된 답사여행에서 찍은 것들이다.



나의 몰타 여행은 이런 것이다. 최저의 경비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답사여행이다. 고로, 이런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품이다.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1킬로미터, 2킬로미터를 걷지 않으면 안 된다. 양말 몇 개가 구멍이 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행이다.

 

 


몰타는 시칠리아에서 남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다. 지도에서 보는 대로 몰타는 지중해의 요통요지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몰타 본섬 우상단에서 보듯 만과 반도로 이루어졌다. (사진 위키피디아)



몰타는 왜 역사의 현장이 되었는가

몰타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6분의 1, 인구는 50만도 채 안되는 작은 나라다. 백 수십 년 동안 영국 식민지를 경험했고 독립한지 50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 언뜻 보면 지구상의 수많은 섬나라보다 나을 게 전혀 없는 나라다. 


그럼에도 이 섬은 어떤 작은 섬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매우 특별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이 섬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이태리 시칠리아 섬에서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몰타는 고대부터 지중해를 동서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북아프리카(리비아, 튀니지아)로 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지중해에 이해관계가 있는 수많은 세력들이 이 섬을 노린 이유다.

 

기원 전 카르타고가 지중해를 지배할 때 몰타는 카르타고의 땅이었고, 카르타고의 뒤를 이어 로마가 재중해의 패자가 되었을 때는 로마의 땅이었다. 로마가 지중해에서 떠나고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 전역에서 세력을 팽창할 때 몰타는 그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뒤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레콩키스타가 전개될 때(13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는 아라곤의 땅이 되었다가, 그 뒤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쫓아낸 뒤엔 그들의 땅이 되었다.

 


발레타는 사진 상 오른쪽 만 안쪽으로 가장 큰 반도 위에 세워졌고, 발레타 아래로 그랜드 하버가 보이고 그 아래로 조그만 반도 생글레아 및 비구르가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몰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몰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6세기 로도스 기사단(원래 정식명칭은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나 성 요한 기사단 혹은 십자군 전쟁 이후 기사단이 머문 지명을 붙여 로도스 기사단, 몰타 기사단이라고도 부름)이 이곳에 들어와 새로운 지배자가 되고 곧 이어 오스만 터키와 대혈투를 벌린 그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역사에서 이 사건만큼 흥미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1565년의 Great Siege of Malta(몰타공방전)라고 부른다. 7만의 오스만 터키 군대가 수백 척의 전함을 타고 이곳을 침공했음에도, 10분의 1도 안 되는 몰타기사단은 무려 4개월(3개월 33)을 버텨냈고 끝내 그들을 물리쳤다.

 

몰타 기사단 곧 성 요한 기사단은 11세기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수도회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전상자를 돌보다가 점점 무장화하여 기사단이 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다. 기사단 단원들은 대부분 유럽 여러 나라의 명문 귀족가문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에게해의 로도스 섬을 차지해 이슬람 세력을 괴롭혔다



 

발레타의 어퍼바락에서 본 그랜드 하버, 몰타 공방전은 주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로우어 바락에서 어퍼 바락 쪽으로 보는 발레타



하지만 용감무쌍한 로도스 기사단도 15세기 후반 욱일승천하는 오스만 터키를 상대하긴 역부족이었다. 술탄 슐레이만 군대의 기나 긴 포위를 뚫지 못하고 기사단은 결국 1522년 항복을 선언하고 로도스 섬을 맨몸으로 떠난다.(사실 이게 슐레이만에겐 뼈아픈 실수였을 것이다오스만 터키가 다른 전투에서 하듯 기사단을 완전히 제거했다면 후일 오스만을 울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년간 로도스기사단은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기사단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도움으로 매년 독수리 한 마리를 바칠 것을 약속하고 몰타를 영지로 받았다. 이 때부터 로도스기사단의 이름이 바뀐다. 몰타기사단으로.


 


몰타 기사단이 요새화한 비구르의 성 안젤로 요새 및 생글레아의 성 미카엘 요새




십 년 만에 숙원이었던 몰타 여행, 보고 싶었던 요새 성 안젤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몰타공방전, Great Siege of Malta

16세기 초 오스만 터키를 지배한 술탄 슐레이만은 터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배자였다. 그의 영문명엔 항상 The Great라는 호칭이 붙는데, 대제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술탄 중의 술탄이다. 오스만 터키의 국내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모든 분야를 일대 혁신했고, 군사적으로도 동쪽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런 그에게 몰타기사단은 눈엣가시였다. 다 죽은 기사단이 몰타를 장악하고 지중해의 무슬림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자신의 지배영역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단단히 봐줘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몰타를 수중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타 기사단은 섬을 장악한 이후 순식간에 섬을 요새화한다. 그리고 운명의 1565년을 맞이한다. 이 해 슐레이만이 진짜 칼을 뽑았다. 터기의 최정예 육군과 해군 7만의 병력이 수백 척의 배에 타고 한 줌도 안 되는 땅 몰타로 향해 진격해 온 것이다.


 


현재 발레타가 있는 반도 끝에 만들어진 성 엘모 요새와 그곳에서 보는 발레타



당시 몰타에는 기백의 기사단과 5백 여 명의 몰타 원주민들로 이루어진 병력이 전부였다. 이 정도의 전력 차이라면, 제 아무리 용맹한 기사단이라도, 며칠을 버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몰타 기사단을 달랐다. 그들은 침공 후 약 네 달 간(3달 3주일 3일)을 버텨냈고 마침내 승리했다. 터키군은 수만의 전상자를 낸 채 몰타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게 바로 그 역사적 사건인 몰타공방전이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물론 전투 중에 스페인의 원군이 도착한 것도 승리의 원인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원군으론 사실 터키군의 대병력을 물리치기엔 한참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몰타 기사단의 신묘한 전술과 용맹무쌍함이 승리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몰타 기사단이 만든 발레타의 성 요한 성당, 외부는 언뜻 보면 요새 같은 성당인데, 내부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성당이다. 이 성당은 몰타 공방전이 끝나고 발레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내가 보고자 한 몰타공방전의 요새들

이 공방전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재 수도가 있는 발레타 근처의 지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곳엔 그랜드 하버라는 만을 사이에 두고 몇 개의 반도가 형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큰 반도가 현재 발레타가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가 공방전이 있었던 시절의 수도였던 비구르, 또 하나가 바로 그 옆의 반도 셍글레아다. 기사단은 이 각각의 반도에 각 한 개씩의 요새를 만든다. 비구르엔 성 안젤로, 발레타엔 성 엘모, 셍글레아엔 성 미카엘


기사단은 이들 요새를 단 몇 개월만에 완성한다. 그 견고함은 지금보아도 놀랄만하다. 7만 군대가 손바닥만한 섬에 들이닥쳤고, 당시로선 유럽 최대 구경의 대포가 몇 백미터 밖에서 연일 불을 뿜었다. 그럼에도 끝내 성 안젤로와 성 미카엘을 수중에 넣진 못했다기사단장 발레타의 지도 아래 기사단원들은 초개같이 목숨을 버리면서도 요새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몰타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몰타기사단장 발레타(위)와 몰타공방전 기념물 




발레타 한 가운데 대로 리퍼블리카를 걸어서 성 엘모 요새로 가다보면 이곳 공화국 광장에 도착한다. 왼쪽이 대통령궁, 오른쪽이 과거 몰타기사단의 단장(Grand Master) 궁전이다.

 


몰타공방전에서의 패전은 오스만 터키로선 한 때의 불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신호탄이었다. 이로부터 6년 후인 1571년 기독교 세력과 오스만 터키는 레판토에서 일대 회전을 벌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레판토 해전이다. 물론 이 전쟁에서도 몰타기사단은 맹활약을 한다. 이 해전에서 오스만 터키는 기독교 연합군에 무릎을 꿇는다. 이것으로 오스만이 지배하던 지중해의 재해권은 서방세계로 넘어가고 오스만은 지는 해가 된다. 새로운 유럽역사가 쓰여 지기 시작한 것이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몰타 공방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도시다.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기사단장 발레타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나의 몰타 여행은 이 흔적을 찾기 위해서 온 것이다. 책으로만 읽던 몰타 공방전이 일어난 바로 그곳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발레타의 이모저모




로우어 바락 근처에서 보는 벨 타워를 비롯한 기념물. 몰타는 2차 대전 때도 격전지였다. 이곳에서 연합군은 교두보를 만들어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폈다. 당시 몰타인 7천 여 명이 죽었다. 그것을 추모하기 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 그랜드 하버를 바라보고 있다.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도시 엠디나

이왕 몰타에 왔으니 발레타 외에 한 곳을 더 보고 싶었다. 엠디나(Mdina)! 완벽한 중세도시가 몰타에 있다고 했는데, 엠디나가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로도스기사단이 1530년 몰타로 들어와 수도를 비구르로 정하기 전의 수도다. 몰타의 역사를 대략 기원전 8-9세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본다면, 엠디나는 2천 년 이상 몰타의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위치는 발레타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20여 킬로미터? 작은 섬 몰타로선 엠디나는 섬의 내륙에 해당한다.




엠디나 원경(사진 위키피디아), 완벽한 성채도시다. 멀리서 해가 반사되면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성채 주변은 과거엔 성밖 거리가 조성되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엠디나를 들어설 때 보니 곳곳에 그 폐허의 흔적이 보였다.

 



엠디나(근경)



나는 여행 3일째 아침 일찍 엠디나를 향하는 버스를 탔다. 발레타 버스터미널에서 노선버스를 타면 타고 40-50분 정도. 엠디나로 가는 길은 마냥 도시가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허허벌판이 나타났다. 이런 곳에 무슨 중세도시가 있지 하는 순간, 저 멀리 낮으막한 언덕 위에 번쩍이는 성이 보인다. 평야 지대의 언덕이라 눈에 보이는 성채는 실재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비가 오다 갑자기 개는 바람에 성채에선 광채가 번쩍였다.

 



엠디나에서 본 주변 도시, 엠디나 가까이는 허허벌판이다.



엠디나에 가까워질수록 벌판 이곳저곳에 허물어진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엠디나가 번영했던 시절 성채엔 영주와 기사들 그리고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고, 성채 아래에선 일반 평민들이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성채 아래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수도가 발레타(처음엔 비구로)로 옮겨지면서 성이 쇠락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수도가 옮겨졌지만 이곳이 당장 성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몰타의 귀족들은 이 성을 지켰고 그후 계속 보수되었고 성벽은 더욱 강화되었다. 한 때 지진(1693년 시칠리아 지진)으로 성의 상당부분이 망가지기도 했지만 곧 복구되었다. 18세기엔 몰타기사단이 여기에 병원(팔라초 빌헤나)을 짓기도 했다.

 

엠디나 성은 그리 크지 않다. 성곽의 둘레는 대략 2킬로 미터 정도. 보존 정도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다. 성내의 건물도 과거 그대로다. 지금 이곳에는 사람들도 거주한다. 그 수는 약 3백 명. 대부분 성내에서 숙박업이나 음식점 혹은 선물가게를 하는 사람들이다.

 



엠디나의 이곳저곳. 성채입구, 성 바울 성당 및 성의 골목길




Palazzo Vilhena, 성문을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을 보면 이 건물이 있다. 현재는 국립미술관으로 사용되는데, 과거엔 병원이었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8세기 초에 프랑스 건축 스타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엠디나는 시계가 멈춰진 도시다. 성안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갑자기 5백년 전 아니 그 이전으로 온 기분이다. 내가 간 시간은 관광객마저 별로 없어서인지 성 전체가 적막했다. 그런데 거기에 자동차 한 대가 어렵게 들어온다. 5백년 전의 거리에 자동차라? 묘한 조화다. 수백 년의 역사가 뒤엉켜진 기분이다. 나는 오랜만에 여유를 여기서 찾았다. 골목을 누비는 어느 몰타의 중세인이 된 것이다.

 



성내에는 수백 년 된 건물을 사용해 영업하는 이런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도 있다. 




엠디나 골목길, 중세 도시 골목에 자동차가 주차된 게 묘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