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 12 인간의 본능을 그린 화가, 그가 만든 20 세기

박찬운 교수 2015. 11. 11. 15:57

인문명화산책 12


인간의 본능을 그린 화가, 그가 만든 20 세기

-구스타프 클림트 이야기-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08,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직사각형 문양은 남자의 정자, 타원형과 꽃 문양은 여자의 생식력 상징한다. 두 남녀는 완전히 밀착되어 거의 융합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난 20여 년간 꽤 많이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스웨덴에선 1년간 체류하면서 그곳 사회를 속속 보려고 노력했다. 그 관찰 속에서 우리와 그들의 중요한 차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인간 본능에 관한 것이었다. 인간본능을 보는 시각과 그것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선 거의 한 세기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는 인간본능이란 인간의 성적 욕구에 관한 것이다.


암스테르담 홍등가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암스테르담을 가는 사람들은 호기심이라도 대개 그곳을 한 번 쯤은 지나칠 것이다. 도처에 섹스샵이 깔려 있고 섹스 박물관마저 요소요소에 자리 잡고 있다. 카페에 가면 커피만 파는 게 아니라 마리화나도 판매한다. 아마 우리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가서 그 장면을 보면 그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땅이라 할 것이다.


함부르크 홍등가 리퍼반. 저 벽을 넘으면 우리나라 청량리 588 같은 성매매업소가 있다.


이런 모습은 암스테르담만이 아니다. 바로 옆 나라 덴마크에 가도 코펜하겐 역에서 내려 근처를 배회하다보면 이내 유사한 홍등가를 만날 수 있다. 물론 파리도, 베를린도 예외가 아니다. 함부르크의 리퍼반이란 거리는 이 면에선 세계적인 유명세를 가지고 있어 관광명소가 되어 버렸다. 거기엔 아직도 과거 청량리 588과 유사한 유곽이 한 거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이들 나라에선 예외 없이 인터넷으로 성인사이트에 들어가는 게 아무런 제한이 없다. 우리처럼 웬만한 성인사이트를 전부 차단한다는 것은 이들 사회에선 있을 수가 없다.


뿐만이 아니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몇 몇 국가에 가서 공중 사우나 시설에 들어가면, 우리로선 매우 낯선 광경을 볼 수 있다. 남녀가 벌거벗고 함께 사우나를 같이 하니 말이다. 내가 체류했던 스웨덴 남부엔 칼바드후스(kalbadhus)라는 사우나 시설이 도시마다 있는데 이곳에 가면 남녀가 완전나체로 사우나를 하면서 수시로 바닷물에 입수하며 수영을 즐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여름엔 태양을, 겨울엔 얼음을 즐기는 북구인들... 상상만 해도 낙원이 따로 없다.


스웨덴 남부 도시 말뫼의 칼바드후스, 바다 한 가운데에 사우나를 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저 건물 안에서 사우나를 한 다음 바다 수영을 즐긴다.


스웨덴 체류 시 나는 스웨덴의 젊은이들의 프리섹스를 가까이서 관찰했다(ㅎㅎ 뭘 직접 보았다는 의미는 아님). 나하고 함께 산 두 남녀 학생은 별개의 방에서 거주하다가 어느 날 방을 합쳤다. 그날로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 같으면 조금 부끄러워할 텐데그들 나이는 모두 20대로 우리 집 아이들 나이 또래였다그들은 당당했다. 그들의 당당함에 오히려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이렇게 살면 성범죄가 많이 일어날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된다. 내가 1년 동안 스웨덴에 살면서 언론에서 성범죄 사건이 다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범죄율 자체가 우리보다 낮은 데다 그 중에서도 성범죄와 같은 중범죄는 그 발생율이 극히 낮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평화로운 나라다. 우리 같으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대서특필되는 나라니 만일 이곳에서 일어나는 성범죄가 그곳에서 일어난다면 보통 큰 일이 아닐 것이다. 


스웨덴은 언뜻 보면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서도 유난히 정숙하다. 이 나라는 성매수자는 처벌하지만 성매도자는 처벌하지 않는 매우 특이한 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홍등가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거리 한 가운데에 섹스 샵이 있더라도 그것은 다른 샵과 특별히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더 격조 있게, 보일 정도다.


더 재미있는 것은 몇 년 전부터 그곳 국영 약국인 아포텍에선 자위기구를 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느 약국에 가도 진열장 한 곳은 여성용 딜도가 다른 의약품과 함께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좀 애석하지만 남성용은 여성용에 비해 아주 종류가 제한적이다. ㅜㅜ).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이 약국까지 진출했는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알아보았더니 이게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들어간 게 아니었다. 상당히 진지한 사회적 토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의 즐거움은 인간의 행복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국가가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의 성생활까지 국가가 세심하게 배려하는 나라 바로 그것이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의 참 모습이다.


우리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지 않다. 도대체 어느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는 여러분이 각자 판단해 주기 바란다. 단 성범죄는 날로 늘어나고, 도시 어딜 가도 성매매 업소를 발견할 수 있으며,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날로 증가해 국제인권기구조차 염려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왜 이런 상황이 여기까지 왔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게 그것을 물어보면, 딱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하겠다. 금지된 성에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자유가 억압된 상황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우리 사회는 성을 억압한다. 성에 대해 너무 점잔을 뺀다. 아직도 우리들의 의식 속엔 남녀칠세부동석이 여전히 살아 있다. 하지만 성이란 막으면 막을수록 호기심은 더 커지는 법이다. 배가 고픈 사람에겐 아무리 금식을 권해도 소용없다. 눈앞에 먹음직한 음식이 사정없이 어른거리는데 그 먹고 싶은 충동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성도 마찬가지다. 성을 막으면 그것은 음지로 들어가 온갖 폐해를 만든다. 대한민국이 바로 그 온상 속에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서구는 일찌감치 성을 해방시켜 그 호기심을 최소화시켜 버렸다. 서구인은 성을 음지에서 추구하지 않는다. 떳떳하게 태양 아래에서 그것을 즐긴다. 그러니 불 꺼진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온갖 추악한 범죄행위는 우리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남녀가 벌거벗은 목욕탕이라도 거기에 들어가 십분만 있어보라. 이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거 생각보단 별 거 아니군. 그 살이 그 살이고, 그 털이 그 털이군. 허허


서구사회가 이런 사회를 만들었다고 그들이 우리와 원래 종자가 달랐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적어도 이 문제는 전적으로 문화의 산물이란 걸 알아야 한다. 서구사회도 지금으로부터 1세 전까지만 해도 매우 엄격한 성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성은 통제되었고 금기의 대상이었다. 기독교 사회를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그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 지는 잘 알려진 소설 두 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초판


D. H.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20세기 초기의 영국의 사회상을 반영한 소설이다. 지주의 귀부인 채털리 부인과 사냥터지기인 올리버 멜로스와의 부정행위를 소설로 그린 것이다. 그 소설의 성애묘사는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지만 당시 빅토리아 왕조 하의 사람들에겐 크나 큰 충격이었다. 그 결과 이 소설은 한 동안 영국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100년 전 영국 귀족 사회의 성윤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했다.


N. 호손의 주홍글씨는 미국 청교도들의 성윤리가 얼마나 강고했음을 알려주는 소설이다. 17세기 미국 보스턴 지역에 일어난 한 간통사건으로 헤스터 프린이라는 여인은 공개된 장소에서 간통을 뜻하는A(adultery)라는 글자를 가슴에 달고 일생을 살게 된다. 그 상대가 누구였을까. 마을에서 존경받는 고명한 목사 딤스데일이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점점 쇠약해진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어가는 그의 가슴에 A자가 새겨져 있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그랬던 서구사회에 지난 한 세기 동안 개방적인 성윤리로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했을까? 나는 이것을 예술사적 관점에서 한 작가의 그림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오스트리아 상징주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아마 이 사람 그림 한두 점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비엔나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선물 가게 어딜 가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념품을 보았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모차르트라면, 미술은 단연 클림트다.


클림트가 남긴 그림 중 대부분은 사실적이기 보다는 상징적이며 분위기는 몽환적이다. 그는 인간의 성적 본능을 천재적 재능으로 상징적이고도 충격적으로 나타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을 그 자신의 창조적 재능으로만 설명할 순 없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비엔나라는 공간이 준 지적 세례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 비엔나는 서구 모더니즘의 수도였다. 새로운 학문, 새로운 예술이 유럽을 휩쓸 때 비엔나는 그것을 주도했다. 르네상스기 이태리 피렌체가 그 사조를 주도했다면 19세기 말엔 비엔나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지그문드 프로이트(1856-1839), 현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이 시기 비엔나의 정신혁명을 주도한 이는 프로이트다. 그가 한 말이지만, 인류는 세 번에 걸쳐 정신혁명을 거쳤다. 첫 번째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다. 인류는 이 혁명을 통해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다윈 혁명이다. 이 혁명으로 인해 인간도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코 인간은 하느님이 특별히 창조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세 번째 혁명이 바로 그 자신이 촉발시킨 프로이트 혁명이다. 이 혁명은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만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인간 행동의 원인에서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의식이란 무의식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성적 본능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것은 인간의 행동을 부추기고 쾌락원칙에 지배되는 본능적 충동의 원천이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눈으로 보건대 성의 억압은 정신병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프로이트의 이런 생각은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전파되었다. 예술가들은 이 말에서 인간의 겉모습 이면에 있는 진짜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예술적 영감을 발휘했다. 모델의 내면에 담긴 생각과 무의식적 정신생활의 새로운 측면들을 발견하고 탐구했다. 오스트리아 모더니즘의 주요 주제는 남녀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무의식적 충동을 어떻게 정직하게 묘사하는가였다.


클림트, <아델레 블로바우어I>, 1907. 2006년 뉴욕 노이에 갤러리의 설립자 로널드 로더가 이 그림을 1억3,500만불에 구입했다. 아델레는 비엔나 사교계의 후원자였다. 이 그림에서도 생식세포를 상징하는 직사각형과 타원형이 보인다.


클림트, <희망 I>, 1903. 만삭의 여인이 있고 그 위에는 죽음의 해골이 보인다. 생명의 생기와 죽음의 공포가 동시에 느껴진다. 인간에겐 성적(생식) 본능과 동시에 죽음의 본능이 있다는 걸 이렇게 그렸다.


클림트는 다윈의 진화론과 프로이트의 주장에서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더군다나 그는 프로이트보다 여성을 훨씬 더 잘 알았고 여성의 성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서 성의 쾌락에 초점을 맞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그림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클림트에게 있어 한 여인을 캔버스에 담는다는 것은 과거와 같이 겉으로 드러난 사실적 묘사가 아니었다. 그는 우선 2차원 캔버스에 삼차원 세계를 사실적으로 창조해 왔던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회화기법을 버린다. 그는 여인의 내면의 모습과 성적본능을 성적 쾌락의 장면에서 찾고 이것이 인간의 가장 리얼한 모습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을 2차원의 평면 위에 눈부신 장식으로 가득한 그림으로 그려냈다. 


클림트, <다나에>, 1907. 몽환적인 그림이다. 오른쪽에도 생식세포를 상징하는 문양이 보이고 왼쪽에는 금화 같은 것이 쏟아진다.



클림트, <자위하는 여인들>, 1910년대. 열락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이 모델은 관중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에 빠져 있다.


클림트에게 있어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자연계의 동물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의 번식능력과 성적 본능이 증명한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그림 속에 생식세포를 그려 넣는 장식을 좋아했다. 많은 몽환적 그림에서 나타나는 직사각형과 타원형의 문양은 바로 정자와 난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의 성애표현은 관객을 위한 묘사가 아니라 모델을 향한 것이었다. 이런 표현은 클림트 이전의 누드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그는 누드화에 남아 있는 정숙함의 요소를 모두 빼 버렸다. 과거의 누드화, 예를 들면 르네상스기의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나 현대화가인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정숙한 표현(손으로 국부를 가리는 것)마저, 그는 던져 버렸다. 


그가 소묘로 그린 누드화를 보라.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거의 포르노그라피 수준이라 할 정도로 과감하다. 그럼에도 그 그림에서 여인의 성적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발견할 순 없다. 이것으로 클림트는 여성의 성의 자유를 선언하고, 수 천 년 동안 가두어 두었던 여성을 해방시켰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비록 파격적인 누드화지만 저 왼손을 보면 국부를 가리고 있다. 완전하게 정숙함을 버린 것은 아니다.


에두아르드 마네, <올랭피아> 1863. 파격적인 누드화지만 위의 티치아노의 그림 처럼 손은 여전히 국부를 가리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성애표현에서 성의 억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여인이 성을 쾌락으로 여기며 스스로 판타지아에 들어간 그 열락의 모습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 나타난 여인은 대개 절정의 상태에 있거나 섹스를 마치고 평화의 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몽환적 그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클림트의 그림을 통해서 성을 둘러싼 허위와 위선은 종언을 고했다. 성은 이제 장막 속에 가려지거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는 대상이 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가 처음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지만 프로이트의 시대가 20세기를 지배하면서 그의 예술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적 본능을 누리는 게 인간의 권리이고 그것을 보장하는 게 좋은 사회라는 믿음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서구에서 누리는 성의 해방은 클림트와 그의 후예들이 만든 이 예술적 힘에 크게 빚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묻는다. 그 허위와 위선을 차 버리고 이 해방의 길로 나갈 생각이 정녕 없는가

(2015. 11. 11.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