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를 가다(1)
-사마르칸트에 서다-
중앙아시아 탐방을 마치고 어제 서울에 도착했다. 열흘의 노독으로 몸은 푸석푸석 하지만 책상 앞에 앉았다. 사마르칸드의 비비하눔 근처 바자르에서 산 꽃차 한 잔을 마시며 카자흐스탄의 건포도를 맛본다. 꽃차의 향과 건포도의 단맛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아직도 중앙아시아의 어느 골목길을 걷는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맛과 향의 호사스러움은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 실크로드 어느 선상의 도시에서 살면서 세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한 어느 시인의 삶이기도 했을 것이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일상이지만 그 원형은 1천 년 전의 인간에게도 발견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인류는 탄생 이래 지금까지 수백만 년을 꾸준히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을 위해 산을 넘었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사막을 걸었다. 실크로드는 특정 역사가 만든 유형의 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인류의 노마드 정신이 만든 도전의 여정이다.
나는 20년 전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인류가 만든 세계화의 시초였던 실크로드를 내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 장대한 목표의 시작은 역사가들이 명명한 특정의 실크로드를 내 두 눈으로 확인하며 두 다리로 걷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폭과 내용이 확대되었다. 실크로드의 개념을 세계 문명의 확장으로 이해해 실크로드 여행은 동서와 남북의 인류가 어떻게 교류와 공감을 하면서 오늘의 세계를 만들어 왔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20년 간의 여행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사는 지식인이지만 세계를 품는 보편적 지식인으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인류의 삶과 인류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형제자매가 지구 저 편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생존하는 이 땅도 중요하지만 생명체를 담은 지구 전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보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런 삶의 철학을 보다 단단히 하고자 틈만 나면 배낭을 짋어지고 집을 떠나 세상을 주유했다.
실크로드적 관점에서 그동안 많은 여행을 했다. 시안을 떠나 황허와 고비사막을 넘어 우르무치까지, 우르무치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중국의 서쪽 끝 카슈가르까지 여행했다. 이런 여행은 오아시스 실크로드의 옛길을 쫓는 여행이었다.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 여행이었다. 티벳의 불교문화를 찾아 티벳고원을, 페르시아 문명을 찾아 이란의 이곳저곳을, 소아시아 문명을 찾아 튀르키에를 누빈 것도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 여행이었지만, 중국 구간의 실크로드와는 다른 세계를 맛본 여행이었다. 이집트 문명을 찾아 나일강을, 그리스 문명과 로마문명을 찾아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돌아보았다. 그 외에도 유럽의 수 십 개 도시를 누비면서 독자의 서구 문명을 보기 보다는 실크로드의 잔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최근의 남미여행은 유라시아와 떨어져 1만 년을 살아온 문명이 얼마나 보편성을 갖는지를 눈으로 실감한 여행이었으니 이것마저도 실크로드적 관점의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다운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예외없이 그 결과를 글로 남겼다. 그것이 이미 몇 권의 책으로도 나왔다. 그러니 나의 여행은 결코 유희적이거나 낭만적이지 못했다. 생각할 수록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일주일 여행을 하면 그 이상의 시간을 꼬박 골방에 틀어박혀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도서관에서 찾아 온 자료와 씨름하며 글을 썼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내 나이도 먹을대로 먹었다. 환갑을 넘기고 바야흐로 장년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야 할 곳은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구 말대로 세상은 넓고 가야 할 곳은 많다. 가보았던 어떤 곳은 다시 한번 가고 싶다. 나에게 시간과 체력 그리고 돈만 허락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삶이다.
나의 이런 삶을 뒤에서 붙잡는 것이 있다. 국내 상황이다. 나의 뿌리는 여전히 대한민국이기에 나의 주유하는 삶이 가능하기 위해선 대한민국이 튼튼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의 정치상황은 하루도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나라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밖에 나가서 국내 소식을 들으면 좌불안석이다. 이러니 내가 어디 간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좋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죄스럽다. 안에서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나 홀로 세상의 좋은 것을 보고다닌다는 게 영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 이유로 요즈음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럼에도 나의 방랑벽과 호기심은 주체하기 힘들다. 몇 년 전부터 과거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던 중앙아시아 구간을 꼭 가고 싶었다. 오늘 날 소위 탄탄탄으로 끝나는 나라들로의 여행이다. 파미르 고원이나 천산산맥을 넘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구간을 통과해 서진을 계속해 이스탄불 혹은 로마로 가고 싶어 할 것이다. 이곳은 전통적 오아시스 실크로드 구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실크로드 여행의 꿈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의당 도전하지 않으면 안될 구간이다. 수년간의 기다림과 망설임 속에서 2024년 여름 드디어 나는 턴탄탄으로의 여행을 결행했다. 이번 여행은 탄탄탄 국가 중 3국을 여행하는 것이다. 나라로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카자흐스탄. 도시로는 사마르칸드, 타쉬켄트, 비슈케크, 알마티.
2024년 7월 30일 아침 타쉬켄트 중앙역에서 사마르칸트로 가는 고속전철에 몸을 실었다. 스페인 기술로 만든 이 기차는 300여 킬로미터의 길을 2시간 반 만에 주파해 정오 무렵 일행을 사마르칸드역에 내려 놓았다. 사마르칸트! 여기야 말로 실크로드의 중심 중의 중심이다. 서기 7세기, 정확히 말하면 627년 당나라 장안을 떠나 서역행 장도에 나선 현장은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건너고 천산산맥을 넘어 서진을 계속해 사마르칸트에 도착한다(현장은 그곳에서 남진해 지금의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 북부에 들어섰고, 마침내 벵골의 비하르에 있었던 세계 최초의 대학 날란다에 도착한다). 나는 현장 스님이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나타난 오아시스 도시 사마르칸트에서 느낀 감동을 상상하며 기차 역사를 벗어났다.
점심을 먹고 사마르칸트 최고의 명소 레기스탄 광장에 도착하니 이런 문구가 보인다. Samarqand World Cultural Tourism Capital (세계 문화 여행의 수도 사마르칸트). 이것이 우즈베키스탄인의 자존심이다. 이곳은 단순한 문화역사 도시가 아니다, 문화 역사의 세계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곳 도시 역사가 2700년이 넘었다고 자랑한다. 소연방 시절 개관한 도시역사박물관인 아프로시압 박물관의 전면에 써진 2752라는 숫자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사마르칸트는 이미 기원전부터 중앙아시아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의 아키메네스 왕조 시절 중앙아시아는 소그드라고 불리웠고 사마르칸트는 그 중심이었다. 그 이후 이곳은 그리스로, 페르시아와 투르크로 지배자가 바뀌었다. 그러다가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아 한 동안 몽골의 지배하(차타카이 한국)에 들어갔다가, 14세기 후반 티무르(1336-1405)가 출현해 제국으로 발돋음해 약 150여 년 동안 지금의 이란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를 호령한다. 티무르는 제국을 건설하면서 정복지에서 우수한 기술자와 예술가를 사마르칸트로 불러들여 중세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를 만들었다. 그는 특히 도시를 푸른색으로 꾸미길 좋아해 사마르칸트를 푸른 도시, 이슬람의 보석, 동방의 진주로 탄생시켰다. 또 그는 대상로를 정비해 멀리 지중해에서 사라르칸트와 타슈켄트, 탈라스를 거쳐 몽골에 이르는 도로망을 구축했으니, 이 시기 실크로드는 그에게 빚진 바 크다.
현재 사마르칸트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역사유적은 티무르 왕조가 남겨 놓은 무슬림 건축물이다. 그 첫째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레기스탄. 이곳은 15세기 초 테무르의 손자 울루그 베크가 만든 마드라사(광장 좌편)를 필두로 17세기에 만들어진 두 개의 마드라사(쉐르 도르와 틸랴 코리)가 있다. 바로 이곳이 사마르칸트 아니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는 하는 건축물이다. 울루그 베크는 술탄이지만 천문학자로 이름이 높다. 그는 이곳 마드라사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친 교수이기도 했다. 15세기에 조선에는 세종이 있었고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에는 명군 울르그 베크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세 개의 건축물은 마드라사 건축의 전형으로 네 귀퉁이에 높은 미나렛이 있고, 정문에 들어서면 사각형의 중정이 있으며, 2층의 건물에는 빼곱히 작은 방이 나타난다. 각 방이 일종의 교실로 교사가 학생 몇 명을 데리고 강의를 하던 곳이다. 마드라사에는 항상 기도소가 딸려 있어 모스크로서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지금은 강의실 대부분이 가겟집으로 바뀌어 외국에서 온 손님을 부르고 있다. 이들 마드라사 건축물은 대체로 동시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레기스탄 광장은 평소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운집하는 곳이지만 가끔 국가적 행사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막의 밤하늘 별 빛 아래 이 웅장한 광장에서 마드라사의 호위를 받으며 음악회가 열리고 국제회의가 열리는 것은 상상만 해도 흥미롭다. 마치 2천여 년이 된 콜롯세움 속에서 콘서트가 열리는 것과 유사하다.
사마르칸트에는 티무르 왕조 시절 만들어진 여러 영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티무르가 묻힌 구르 아미르, 티무르가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 만든 비비하눔(단, 왕비의 영묘는 비비하눔에 있지 않고 비비하눔 건너편에 있음), 왕족의 묘역으로 알려 샤히 진다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구르 아미르는 현재 건물 일부만 복원되어 있는데, 그 원형은 지금보다 훨씬 큰 것으로 단순 영묘가 아니라 마드라사 기능까지 함께 갖고 있었다. 건축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데, 이 영묘는 티무르의 후손이 건설한 인도 무굴제국의 건축물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도의 타지마할이다.
사마르칸트가 고대 동서문물의 교착지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은 하나의 벽화가 대변해 준다. 소그드 왕국 시절 그 성터였던 아프라시압에서 발굴된 벽화에는 여러 사신들이 왕을 알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중에는 당나라의 사신이 비중 있게 그려져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 중에 깃을 꽂은 모자를 쓴 두 남자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들이 당시 고구려에서 온 사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와 중앙아시아의 교류는 15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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