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개혁의 방향
-검찰권 남용에 대해 대배심을 도입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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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개혁은 이 시대의 화두입니다. 검찰권 남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수처 도입과 검경 수사권 조정을 서두르고 있지만 야당(특히 자유한국당)은 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공수처 대신에 미국식 대배심(Grand Jury)을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대배심은 일반 시민이 배심원이 되어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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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을 하는 대표하는 분이 박승옥 변호사입니다. 박변호사님은 제가 특별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젊은 때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데 출중한 능력과 인권보호에 강한 의지가 있는 분입니다. 특히 박변호사님은 재야의 미국 형사법 최고 전문가 중 한 분입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 중 100개가 넘는 판결을 전문 번역해 이미 몇 권의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박변호사님은 최근 시민이 사법절차에 직접 참여하는 배심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분들과 배심연구회를 만들어 활동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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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박변호사님의 배심제도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주장하시는 대배심이 현재 문제되는 검찰권 남용의 대응책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며칠 전 박변호사님의 의견에 간단히 댓글을 달아 의문을 제기하자 그것이 결국 본격적인 페북 논쟁으로 발전해 버렸습니다. 어제 박변호사님이 제 댓글을 토대로 장문의 입장을 밝히셨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저의 입장을 밝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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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제도로서의 대배심은 어떤 것인가
대배심을 도입하자는 분들이 그 내용(공수처를 대신할 수 있는 대배심제도)을 좀 더 설명해야겠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다음 기능을 맡게 될 것입니다. 박변호사님의 글을 통해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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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배심의 두 가지 기본적 기능에는 ① 수사기관이 수사해 놓은 결과로서의 피의자에 대한 기소평결을 검사가 구하는 데 대하여 대배심이 증거를 살피고 가부를 평결하는 것이 있고, ② 공익이 요구하는 사안에 대하여, 즉 시민의 관심이 높은 의혹사안에 대하여 대배심이 검사의 참여 아래 함께 조사를 진행하고 처분을 결정하는 것이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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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대배심이란, 시민 중에서 무작위로 13명에서 20명 내외를 선발해 대배심원을 구성한 다음, 검사의 주도 하에 필요한 조사를 하고 기소여부를 결정합니다. 연방과 주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배심 절차는 주로 중죄에 해당하는 죄에서, 검찰의 기소권을 시민이 통제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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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이 방식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법제도와 현실에 비추어 보아, 저는 그 방식을 도입하긴 매우 어렵고,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도, 검찰권 남용을 막기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에서 몇 가지 이유를 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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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검찰권 남용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개혁하고자 하는 검찰권 남용은, 검찰이 수사를 잘못해, 종국적으로 기소여부를 잘못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검찰권의 남용은 여러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수사의 단서가 있음에도 수사를 안 하는 경우, 먼지 털기 식으로 수사권을 남용하는 경우, 수사방법에서 인권침해를 하는 경우, 증거가 갖추어졌는데도 기소를 안 하는 경우, 유죄 입증에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소를 하는 경우 등등 수없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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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 사건, 예를 들면 현재 문제되고 있는 드루킹 사건에서, 과연 대배심이 적정 수사를 담보할 수 있는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수사와 기소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남용)문제를 시민이 참여하는 임시 조직이 하루 혹은 며칠간의 심의(이 과정에서 일부 관계자를 불러 조사를 할 수 있을 것임)를 통해 적절히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도통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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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법제와 현실이 다른 우리나라에 미국식 대배심이 들어올 수 있는가?
아무리 좋은 법제도라고 해도 그 제도가 착근하기 위해선 환경이 구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식 대배심을 들여와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려면 우리의 제도적 상황이 미국과 유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와 미국은 수사와 기소과정이 너무나 다릅니다. 이에 대해 박변호사님은 우리의 제도 하에서도 그 도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저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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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리 검찰은 직접수사를 원칙으로 하는 수사조직입니다. 검찰은 수사의 단서를 잡으면 인신구속여부를 결정하고, 물적 인적 증거를 확보하며, 종국적으론 기소여부를 결정합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피의자나 참고인을 무시로 검찰청에 불러 조사를 벌립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검찰은 기본적으로 수사조직이 아니라 기소조직입니다. 수사의 대부분, 즉 증거확보는 경찰의 몫입니다. 우리처럼 검찰이 피의자나 참고인을 검찰청으로 불러 조사하지 않으며 법으로도 그게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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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미국의 검찰은 경찰조사에 기초해 기소여부를 결정하고 중죄의 경우에 증거확보를 위해 대배심을 이용합니다. 미국의 대배심이란 중죄사건에서 독자적인 소환권이 없는 검사가 대배심의 이름으로 피의자나 참고인을 불러 조사하는 절차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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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대배심의 기능은 어떤 면에선 우리 검찰이 피의자나 참고인을 불러 조사하는 것보다 더 강력합니다. 피의자나 참고인은 대배심이 부르면 나와야 하고 나오지 않으면 사법방해죄가 성립합니다. 이 절차는 수사의 특성상 밀행성이 강조되며 재판에서 당연히 보장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심문시 변호인 참여)나 증거법칙 등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일정한 정도 헌법상 기본권이 제한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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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대배심을 우리가 도입해 기능을 발휘하려면, 미국 대배심의 저런 제도적 요소가 도입되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당장 위헌 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러니 저런 제도를 제대로 도입하려면 우리 형사절차를 완전히 미국식으로 개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사를 일단 경찰에 맡기고, 검찰은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기관으로 남아야 하며, 필요한 경우 강력한 대배심 권한을 주어야 합니다. 그게 지금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도입한다고 해도 그것은 짝퉁일 뿐입니다. 한강을 넘어오는 순간 귤이 아니고 탱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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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배심은 지구상에서 사실상 미국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희귀한 제도입니다.
원래 대배심의 출발은 영미법 제도의 원조국인 영국입니다. 영국에선 10세기 이후 사법절차에서 대륙과 뚜렷한 제도적 차이를 보여 왔는데 그게 바로 시민의 사법참여입니다. 시민이 배심원으로서 사법절차에 직접 참여해 왔는바, 형사절차에선 대배심이 그 방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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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배심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이미 폐지된 지 오래입니다. 복잡한 다수의 사건에서 일반 시민의 참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실효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미법계 국가 상당수가 재판 단계에선 아직도 배심제도를 많이 사용하지만 수사단계에서 대배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외가 미국(자료에 의하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도 미국식 대배심이 있다고 함)입니다. 더욱, 우리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에선 어느 나라도 대배심을 제도화한 나라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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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유사한 법제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예는 언제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배심제도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 결과 대배심의 일부 기능을 본따 검찰심사회라는 것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대배심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시민이 참여해 검찰의 불기소 결정을 심사하는 것이지만 매우 제한적 범위에서 그 당부당을 판단합니다. 심사과정에서 증인을 부를 수는 있지만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강제구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기소결정을 하는 경우엔 지정 변호사가 검사의 직무를 대신해 기소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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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대배심을 도입하면서 미국과 다른 대배심을 도입한 것은 일본의 제도와 현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이와 같은 검찰심사회의 성과는 어땠을까요? 그리 성적이 좋지 않습니다. 최근까지 강제기소가 된 예는 강제기소 제도가 도입된 2010년 이후 10여 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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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배심은 공수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공수처는 그동안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못했던 주요 공직자 범죄에 대해 (공수처란) 제2의 검찰청을 만들어 대응하는 방법입니다. 공수처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검찰은 원칙적으로 모든 수사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수처 수사대상에 대해선 공수처에 우선권이 있으므로 고위 공직자 관련 사건은 공수처가 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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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수사에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공수처가 수사권을 자제해 문제가 있는 사건에만 개입하면, 현재의 검찰권 남용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수처가 만들어지면 매번 문제 있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치권이 요구하는 특검도 사실상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물론 정치권이 공수처를 못 믿겠다고 하면서 특검으로 가자고 하면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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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는 검찰의 수사와 기소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위에서 본 대배심과는 기능에 있어 사뭇 다릅니다. 따라서 대배심이 공수처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대배심을 도입한다고 해도 그것은 검찰기능의 일부만을 대신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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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처의 권한남용을 우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우려합니다만, 공수처는 검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강원랜드 사건처럼 만일 공수처 고위 간부가 직권을 남용한 혐의가 있다면 검찰이 견제할 수 있을 겁니다. 쉽게 위법 부당한 수사를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것으로도 공수처 수사권 남용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기존의 법원을 통한 재정신청 제도(불기소 결정에 대해 법원에 이의를 하는 제도)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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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검찰개혁 방향은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최소화시키는 것입니다. 검찰 수사의 문제는 대부분 직접 수사에서 나옵니다. 직접 수사는 가급적 경찰로 넘기고 검찰은 기소여부를 결정하며, 필요한 경우 보완수사를 하는 기관으로 남으면, 검경간의 견제가 가능합니다. 바로 이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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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대배심을 도입해 검찰권 남용을 막자는 주장은, 그 취지는 높이 평가하지만 우리나라 검찰권의 행사 현실과 제도를 고려하면, 그대로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변용해 도입한다면 일본 검찰심사회 정도라고 봅니다. 저는 검찰심사회를 도입하는 것엔 반대하지 않습니다만(오히려 그것은 환영합니다) 이것만으로 우리 검찰권 남용을 막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대배심이 공수처의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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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조직 권한남용의 가장 강력한 대응은 대등한 수사조직으로 견제시키는 방법입니다. 검경 간의 관계가 완전 대등하고 경찰-수사 검찰-기소의 원칙을 관철할 수 없는 현실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공수처의 필요성은 그런 이유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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