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기억 그리고 기록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7. 4. 6. 14:26

기억 그리고 기록에 대하여

 




이른 아침이다.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시작한다. 머리맡 서가를 둘러보다가 책 한권이 눈에 뜨였다. <일본방문보고서>(2001). 서울지방변호사회가 2001년 일본 변호사회와 교류를 마치고 만든 보고서로  내가 만든 책이다. 나는 당시 서울변호사회의 섭외이사(국제이사)로 일하면서 국제교류를 담당했다. 그 해 가을 우리 서울회의 임원들은 일본 변호사회와의 정기교류 차 토쿄와 오사카를 방문했다. 264쪽의 보고서는 바로 그 교류회에 관한 기록이다. 잠시 쭉 훑어보니 당시 상황이 어젯일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지금도 이런 보고서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16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제교류가 많은 지금 이런 식의 보고서를 매번 만든다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때도 쉽지 않았다. 내가 섭외이사를 하기 전에도 교류회 보고서가 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든 것은 없었다. 내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 보고서는 내 정성과 열정의 산물이다. 당시 나는 교류회를 제대로 기록해 그것을 오래 동안 기억하길 바랐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완전히 다른 차원의 보고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서울지방변호사회장 박재승 변호사는 이 보고서의 서문에서 이 보고서의 발간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이 보고서를 통하여 우리 방문단은 이번에 어떤 교류를 하였는지를 회원 여러분들에게 빠짐없이 알리고, 방문단이 어떤 결심과 소회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 회의 운영방향을 어떻게 설정하여야 할 것인지를 회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3부로 구성된 보고서 제1부에서는 우리 참석자 중 몇 분이 경험기를 썼다. 전체적인 개관은 내가 썼다. 무려 50쪽에 걸친 내용이다. 나는 토쿄와 오사카의 두 변호사 단체의 활동상황과 교류회의 대강을 스케치했다. 발표자로 참석한 박성호 변호사(현 한양대 교수)와 도두형 변호사, 법제이사 황덕남 변호사는 각각 담당한 영역의 글을 썼다. 나아가 두 분의 사모님들에게도 글을 부탁했다. 배우자로서 남편들의 교류회에 참석한 사모님들의 감상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2부엔 교류회의 자료를 넣었다. 당시 두 변호사회와 토론을 벌린 주제는 정보공개제도, 변호사의 규제와 자유, 변호사 공익활동, 징계제도 등이었다. 모두 양국 변호사들에겐 실무적으로 중요한 내용의 토론이었다.

 


3부엔 기타 자료를 집어넣었다. 일반적으로 그냥 넘어갈 내용이지만 기록해서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교류회의 일정표, 행사 순서, 심지어는 심포지엄 및 환영만찬 좌석배치까지 수집해 넣었다. 향후 교류회에서 의전상 참고가 될 만한 자료였다.

 


꽤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이 기록을 다시 읽는다. 2001년 가을 토쿄와 오사카에서 일본 변호사들을 만나 대화한 내용이 귓전을 울린다. 만일 내가 이 기록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그 해 그 교류회는 내 기억에서 이미 지워졌을 것이다. 변호사회의 공적 경험도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록을 남겼기에 누구든지 2001년 가을 서울 변호사들이 토쿄와 오사카에서 일본 변호사들과 어떤 내용으로 토론을 했는지, 한국 변호사들 나아가 그들의 배우자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후배들은 선배들의 활동상을 볼 것이고 그것에서 배우고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기록이란 이런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보존해야 한다. 이것이 쌓이면 역사가 되는 게 아닌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면 당장 기록으로 남기자.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역사는 없다. 우리는 하루하루 기록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