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여행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신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출간에 부쳐-

박찬운 교수 2017. 11. 17. 06:21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신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출간에 부쳐-

 


책 표지 아잔타 제1굴의 연화수보살(위), 석굴암 본존불(아래), 이 두 걸작이 선생이 반백 년간 발로 쓴 불교기행의 최종결정판이다. 하나는 불교 발상지인 아잔타에서, 또 하나는 동쪽 끝 경주 석불사에서 만난 것이다.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이 글은 한 사람과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헌사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이하 선생이라 호칭함, 이것은 존경의 염을 담아 부르는 경칭임). 모르는 분들에게 선생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까. 4년 전 출판된 문명기행기 <문명과의 대화>(네잎클로버) 서문에서 내가 선생께 드린 감사의 말씀을 옮기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자.

 

겸산 최영도 변호사(1938-현재, 사진 브라보라이프). 판사로 봉직하다가 1973년 유신정권 시절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옷을 벗었다. 그 뒤 변호사로 인권변호에 힘썼고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민변 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앙코르 티베트 돈황>, <토기사랑 한평생>, 클래식 음악 에세이 <참 듣기 좋은 소리>, 유럽미술관산책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가 있다.

선생은 대한민국 제1의 토기 수집가였다. 평생 모은 토기 1,700여 점은 지금 용산 국립박물관 특별기증 전시실 '최영도관'에서 볼 수 있다.(위사진 중앙박물관, 아래 사진 브라보라이프)

이런 글을 쓰게 되는 데는 적잖게 주변 도움이 컸다. 우선 법률가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지난 20년간 큰 깨달음을 주신 최영도 변호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최 변호사님은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하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원로 인권변호사이시다. 그분은 법률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문학적 소양이 넘치는 분으로 일찍이 사라져가는 옛 토기를 모아 아낌없이 국가에 기증했고, 틈만 있으면 세계 곳곳을 여행하시어 그것을 글로 남기신 분이다. 내게 항상 여행과 인생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글을 써 주변과 나누라고 권면해 주신 분이기도 하다.“(<문명과의 대화> 서문)


선생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과 참여연대 대표를 역임한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이고, 세계문명 발상지를 답사하고,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은 문명여행가이자 예술 감상가이며, 자신의 경험을 품격 있는 글로 옮겨온 저술가이다. 나와는 지난 20년간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내가 법률가가 된 이후 몇몇 선배 법률가가 내 롤 모델이 되었지만 선생만큼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없다. 비록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가가 된 나지만 선생같이 고상한 풍모를 지닌 법률가로 성장하고 싶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밤을 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예술을 알고,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 세상을 주유하는 멋진 여행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과연 당대에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선생이 국가인권위원장 시절 나는 인권정책국장으로 일했다. 선생 왼쪽은 당시 사무총장으로 일한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면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가 선생을 좋아하고 따르게 된 데에는 분명 선생과 내가 뭔가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게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호기심이다. 선생은 연세가 팔순에 들어섰음에도 끊임없이 지식을 찾아 밤을 새우신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기신다. 호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 또한 그렇기에, 이처럼 새벽을 깨워 책을 읽고, 그것을 정리해 글을 쓴다. 선생이 쓰신 책 한 권을 읽으면 나도 언젠가 이런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필생의 대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2017년 가을 캠퍼스의 단풍이 유난히 고운 자태를 뽐내는 날 선생으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았다. 뜯어보니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기파랑). 600쪽이 넘는 대작이다. 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화려한 도판으로 수놓아져 있다. 이 책은 지난 반백 년선생이 도전했던 문명기행과 불교미술 감상의 결정판이다. 책을 받자마자 서문을 읽었다. 그리고 며칠간 틈틈이 선생과의 인연을 생각하면서 다녀오신 길을 들여다보았다.

 

책 뒤 표지 아잔타 제26굴 '석가열반상'(위)와 석불사 '십일면관음상'(아래), 앞 표지에 이어 뒤 표지에 세계 불교 미술 조각의 최고 걸작품 두 개를 실었다.





선생이 지난 수십년간 다니신 그 여정은 실로 찬란하다. 선생의 나이 40대 중반인 1985년 이후 감행한 문명여행은 열 손가락으로도 열거하기 어렵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아잔타, 엘로라, 바간, 앙코르, 티베트, 둔황 막고굴, 용문석굴, 중국 시안과 뤄양, 일본 교토와 나라 그리고 실크로드... 거개가 불교미술과 관련이 있다. 선생의 말씀대로 그것은 불교미술의 순례이었고, 불교의 동점에 대한 추적이었다. 그 결과 선생은 불교미술이 그 발상지를 떠나 동쪽 끝 경주 석불사(석굴암)에서 위대한 예술적 정점을 이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나는 그 여정을 이 제한된 지면에 소개할 능력이 없다. 선생이 감상한 수많은 불상과 사원 그리고 불화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할 능력은 더욱 없다. 그 여정의 일단이라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책장을 넘기며 그 속에 있는 400장에 가까운 도판을 직접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곳에서 선생이 이 책에서 남기신 몇 마디 말씀을 통해 선생이 어떤 분인지, 그가 무슨 이유로 불교미술에 천착해 수십년 간 문명기행을 해오왔는지를 독자들에게 전할뿐이다. 그 정도만 해도 선생의 삶과 그의 심미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하루라도 빨리 이 책을 주문해, 책장을 넘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리라 믿는다.

 

선생이 다니신 불교미술유적지 여정(지도상 붉은 점과 그것을 잇는 선)



성장배경이 미래를 결정한다
나는 어설픈 인간 결정론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자연적 불평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할 일이 없다. 아무리 노력한들 무엇하랴,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평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엔 토를 달고 싶지 않다. 주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이 성장배경이,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로 인해, 퇴색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선생의 어린 시절은 그 시대 평균적인 대한민국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선생이 한평생 법률가를 넘어 예술을 좋아하고, 특별한 심미안을 갖게 된 것은, 서울 장안의 어느 명문가에서도 보기 힘든 가풍과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선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선생의 말씀을 직접 옮겨보기로 한다.



나는 (또한) 비교적 예술 친화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선친께서는 1948년 서울 장충동에 처마가 높이 솟은 기와집을 짓고, 미산 황용하의 석란도 열여섯 폭으로 방을 도배하셨다. 그리고 백단향을 피워 놓고 녹차를 음미하며 한시를 읊으시고, 노장 철학에도 심취하셨다. 내 이름의 도()자도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멋쟁이 아버지 손을 잡고, 1949년 제1회 국전부터 미술전람회와 서화전을 관람하면서 자랐다.
1954년 보성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백부님이 근무하시던 국립박물관에 자주 가서 백부님의 제자인 최순우 과장님의 호의로 국보급 문화재들을 눈에 익혔다.
1955년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우리나라1세대 서양화가의 한 분인 청구 이마동 화백의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동서양미술사를 가르친 경우는 아마 보성 말고는 없을 것이다.
또 학교법인 이사장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는 매년 개교기념일에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어 국보급 도자기와 서화를 보여 주셨다.
비록 전시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이런 환경과 체험이 나를 미술에 일찍 눈뜨고, 석불사와 불교미술에도 쉽게 빠져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 성향이 중년기 이후에는 미술사학을 새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서장, 16-17)
이렇게 선생은 학교도 가기 전 코흘리개 시절부터, 예술을 아는 선친을 통해, 미산 황용하(개성 출신으로 사군자에 뛰어난 당대의 화가)를 알았고, 국전 전람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고교(보성고등학교) 시절 이후엔 문화재 애호가로 유명한 간송 전형필 선생과 우리의 문화재를 한국적 미학으로 설명한 최순우 선생을 통해서 수많은 국보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은 소년의 뇌리에 박혀 그 후 60년 세월을 남달리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말씀을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 여러 차례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들을 때마다 감탄했고, 솔직히 부러웠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음에도, 이런 남다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게 모두 조상의 음덕 때문이었을까? 여기에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남다른 연민까지 느끼며 평생을 살아온 선생. 내가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야나기 무네요시(悅)(1889-1961), 일본의 민속 예술가. 메이지대학 교수. 동양 미술 국제 연구회 상임 이사 역임, 도쿄에 민속 예술관을 설립하였고 한국 민속 예술의 우수성을 상찬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 1984년 9월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받았음(사진 위키피디아)

불교 미술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선생과 인연을 맺고 살아오면서 나는 인간 최영도란 분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역시 그의 박식함이다. 선생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 같이 평소 말 많은 사람도 말 수가 적어진다. 괜히 고수 앞에서 밑천을 빨리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생은 어느 자리에서도 예술과 여행에 관해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강의를 할 수 있는 분이다. 그의 기억력은 비상해서, 이름, 지명, 연도를 정확히 기억해낸다. 사실 나도 자랑을 조금 하면, 매우 폭넓은 지식을 가지려고,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인데...선생 앞에선 한마디로 고양이 앞의 쥐다.


기본적으로 선생은 호학자다. 이런 분이 불교미술에 필이 꽂힌다면 당대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그 계기인데.... 하필 그 많은 예술 분야 중에서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 그 단초를 연 것은 젊은 시절 경주에서 본 석불사였다. 석불사는 선생에게 불교미학의 출발이었고 종점이었다.
선생이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뜻밖에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종교철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이고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 그가 쓴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라는 글은 선생에겐 가히 충격이었다. 60년 대 후반 우연히 만난 야나기의 이 글에서, 그의 석불사 독법을 발견한 선생은 자신을 이렇게 한탄했다.


야나기 선생은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그분의 눈은 금강석으로 만든 혜안이었고, 내 눈은 진흙으로 빚은 허접한 눈깔이었단 말인가!"
이 때 선생은 담대한 도전을 한다. 석불사의 미학을 스스로 완성하리라, 보편 불교미학에서 석불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내 손으로 직접 알아보리라. 그렇게 해서 반백 년이 넘는 그의 불교문명기행이 시작되었다.


약간은 여담이지만, 내가 문명기행을 하고, 잡문이지만 문명기행기를 써온 데에는,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선생이 야나기 무네요시를 통해 불교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선생의 실크로드 기행 중 둔황편을 보면, 그곳 명사산과 월아천에 대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금까지 본 경치 중 어디가 가장 아름답던가?“라고 친구가 물으면, ”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이었다네.“
그까짓 사막이 뭐 그리 아름답겠나?“
자네, 사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 적이 있나?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네. 직접 가서 느껴 보게.“ 라고 대답하겠다.”(208)

 

둔황 명사산(위)과 그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월아천(아래), 나는 이곳을 2010년 동료교수들과 기행했다.(사진은 당시 일행이 찍음)

나는 이 이야기를 20여 년 전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날부터 나는 실크로드 기행을 꿈꿨고, 드디어 7년 전인 2010년 7월 첫 번째 기행(시안-우루무치 구간)에 도전했다(2015년 여름엔 두 번째 도전으로 우루무치-카슈가르 구간을 다녀 왔음). 한 여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오후, 선생이 말씀하신 천하 제1경 둔황의 명사산에 올라, 월아천을 바라다 볼 때의 그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그 여정의 결말
선생이 반백 년 불교문명기행은 석불사에서 시작해, 인도 아잔타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동진하여, 다시 석불사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통해 선생이 내린 결론이 무엇일까? 이 부분도 사설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선생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게 좋을 것이다.

 

아잔타 석굴을 설명하는 부분(52), 왼쪽 그림이 제1굴의 '연화수보살' 연꽃 한 송이를 들고 한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 관세음보살. 아잔타 벽화 중 최고라 알려져 있다. 불교회화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석불사를 설명하는 부분. "그동안 내가 자바의 보로부드르, 인도의 아잔타 ... 등 많은 불교유적들을 탐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내가 석불사를 알게 되고, 불교미술의 동점과 석불사의 연원을 캐 보고 싶어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세계적인 대형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나서는, 그때마다 우리 석불사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것은 결코 국수적인 생각이 아니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해도 그렇다는 말이다."(541)



석불사는 보로부드르나 앙코르 와트처럼 크지도 않고, 바간이나 막고굴처럼 많지도 않으며, 시슈 마할이나 타지 마할처럼 사치하지도 않고, 카일라사나 포탈라처럼 위압적이지도 않다. 또한 백성들을 오랜 기간 가혹하게 착취한 반인권적이고, 비종교적인 산물도 아니다.
석불사는 참배자가 붓다를 예배하기에 쾌적한 거리와 높이, 넓지도 좁지도 아니한 가장 이상적인 규모로 조영되었으며, 그 안에 붓다를 위시하여 신중과 인왕, 천왕과 천부, 보살과 제자가 알맞은 구성과 크기로 조각되어, 조화롭고 주도면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석불사는 인도의 간다라 마투라 굽타 미술이 실크로드를 타고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들어와, 동과 서의 예술이 서로 어우러져, 탁월한 예술적 기량을 뽐내어, 붓다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펼친 것이니, 이를 어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나고 가장 위대한 예술문호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한평생 추구하고 지구 반 바퀴를 답사하고 돌아와, 공정한 눈과 객관적인 잣대로 내리는 결론이다. 이런 위대한 유산이 우리 조상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또 오랜 세월 온전하게 보전되었으니, 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여정을 마치며, 583)


여기에 무엇을 덧불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 미학을 겸비한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 반백 년 발로 쓴 순례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는 석불사에 대한 평가이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님의 만수무강을 빈다.

<후기>

2017년 12월 18일 저녁 프레스 센터에서 겸산 최영도 변호사님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나는 이 행사의 사회자였다. 사회자로서 나는 이렇게 최변호사님을 소개했다.


최영도 변호사님 소개


오늘 뜻깊은 자리에서 내빈들께 최영도 변호사님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최변호사님께서 저에게 사전에 부탁을 하신 게 있습니다. 소개는 가급적 짧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만큼은 사회자에게 맡겨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이 사회를 맡게 된 것은 후배로서 제가 존경하는 한 선배님의 삶을 여러 내빈께 말씀드리는 게 임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께는 특별히 소개하지 않아도 최변호사님을 익히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내 가족과 내 친구가 항상 나를 잘 안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때론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를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걸음 두 걸음 떨어져 있는 저와 같은 후배가 최변호사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들어보시는 것도 좋은 소개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최변호사님은 1938년에 출생하시고, 보성고등학교와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하셨으며, 고시 13회로 법률가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인권변호사
최변호사님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1973년 사법파동 후 법관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재야로 나와, 서울법대 동기이며 고시동기인 홍성우 등과 함께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리셨습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표,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등을 역임하셨고,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해 공대위의 대표 등을 지내셨으며, 노무현 정부에서 인권위 2대 위원장으로 일하셨습니다.
인문학적 정서라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는 법률가로서의 최변호사님의 모습 보다는 다른 면모를 보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참된 지식인이라 함은 자신의 전공 외에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정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 지식인은 자신의 생업과 관련된 공부 외에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공부합니다. 제가 아는 한 최변호사님은 법조계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서, 이런 정열을 누구보다 많이 갖고 사셨다고 봅니다. 후배들에게 법조인의 인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겨주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 남다른 성장
아마 이것은 최변호사님의 남다른 어린 시절과 청장년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최변호사님의 선친께선 장충동에 하늘로 솟은 기와집을 지으시고, 방에는 13폭 병풍을 치시고, 백단향을 피운 채 다도를 즐기신 분이라고 합니다. 최변호사님은 그 아버님을 따라 제1회부터 국전 관람을 하셨고, 큰 아버지 제자인 최순우 선생이 있는 국립박물관을 무상출입하셨다고 합니다. 보성학교에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셨고, 대학부터 클래식과 독서에 특별한 취미를 붙이셨습니다. 판사시절엔 드디어 야나기 무네요시의 책을 만나 석불사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됩니다.
토기수집가
최변호사님은 이 나라 최고의 토기 수집가였습니다. 30년간 수집한 토기 1700여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해 누구나 그것을 즐겨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용산박물관에 가셔서 특별기증관 내에 있는 겸산 최영도관을 찾아 주십시오. 최변호사님이 수집한 귀한 토기 문화재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즐거움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미술품 감상과 수집
최변호사님은 미술품 감상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이에 관해 두 권의 책을 쓰셨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는 책은 미술관에 관한 책이고, ‘, 듣기 좋은 음악은 클래식에 관한 책입니다.
세계문명기행
최변호사님은 진정한 문명여행 답사가였습니다. 세계 곳곳의 문명 발상지를 틈만 나면 다니셨고 그것을 글로 옮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책 아잔타에서 석불사를 탄생시켰습니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선 혜초스님이 되었고, 둔황에선 소설 돈황의 주인공 조행덕이 되어 아름다운 명사산과 월아천을 뒤로 한 채 막고굴의 불교미술을 탐미했습니다.
남다른 기억력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최변호사님은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이십니다. 법조인 중 최고의 기억력 소유자였던 고 유현석 변호사님에 버금가는 기억력이라고 후배들은 말합니다. 다녀오신 곳의 지명, 읽으신 책의 저자와 도서명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시는 것에서 후배들은 늘 감탄과 함께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최변호사님의 책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출판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