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여행

잔잔한 감동을 선물한 조용환 변호사의 <안데스를 걷다>

박찬운 교수 2017. 12. 24. 06:04

잔잔한 감동을 선물한 조용환 변호사의 

<안데스를 걷다>



 

 

1.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 아름다운 책을 읽었다조용환 변호사가 최근 출간한 여행기 <안데스를 걷다>(진실의 힘).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는데 독서와 관련해선 묘한 심리가 있다. 선물로 받은 책은 대체로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제 돈 주고 산 책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예외였다. 저자가 보낸 선물이지만 뭔지 읽어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있었다. 저자에 대한 나의 특별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쓴 책이라면 뭔가 틀림없이 다를 거야.’


드디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니 허전함과 함께 찐한 여운이 남는. 어떻게라도 이 책을 소개해 보고 싶은데 사실 막막하다. 갑작스럽게 언어의 빈곤함을 느낀다. 요령있게 내가 받은 감동을 전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편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멋진 책이다. 잔잔하면서도 감동이 밀려오는 책이다. 좋은 여행기가 갖춰야 할 요소, 곧 풍부한 정보와 현장감 그리고 그것들을 전달할 수 있는 문장력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책이다.'


저자는 지난 30년간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변호사다. 나보다는 시험으로 2년 선배(사법연수원 14)이자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선배로 오랜 기간 인연을 맺고 있는 사이다. 그에 대해서 나는 이런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작년 초에 연재한 나와 민변이란 글 중 스승열전에서다.


조용환 변호사는 매우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다. 조변호사가 쓰는 법률서면은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다. 민변의 국제인권분야에 초석을 쌓은 일등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시절 야당 몫의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되었지만 새누리당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향후 정권이 바뀌면 재판관이 될 1순위라고 본다.”

 (http://chanpark.tistory.com/entry/%EC%A0%9C6%ED%99%94-%EC%8A%A4%EC%8A%B9-%EC%97%B4%EC%A0%84?category=624373)


저자는 인상부터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일견 매우 건조한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조금씩 알아 가면 가늠하기 어려운 인간적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는 매우 인문적이다. 조용한 삶 속에서 은은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야생화를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며, 틈만 있으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여행을 즐긴다. 나처럼 떠벌리는 스타일도 아니니 진실로 내공 깊은 여행가다.


그런 그가 2달간 서울을 비우고 저 머나만 땅 남미를 혼자서 다녀왔다. 그리고 그 여정을 세밀하게 담은 책 한 권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안데스의 만년설과 빙하 그리고 곳곳의 야생화를 찍은 사진과 함께. 그는 왜 이런 여행을 하게 되었을까? 책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2016년 가을 남미에서도 안데스산맥을 끼고 있는 다섯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변호사 생활 30년을 정리하면서 시작한 세상 구경의 일환입니다. 그 세월을 살아온 저 자신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의 선물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마음에 담아온 오랜 꿈이기도 했습니다.”(5)

 

조용환 변호사의 남미 여정


2.

저자는 20161020일 서울을 출발해 다음 날 콜롬비아 보고타에 도착한다. 그리고 꼬박 2달간 안데스 산맥의 나라 다섯 나라를 여행하고 1218일 브라질 상파울루를 거쳐 서울로 돌아온다. 그의 주요한 행선은 다음과 같다.


콜롬비아: 보고타

페루: 리마, 나스카, 아레키파와 콜카계곡, 쿠스코, 맞추픽추, 무지개산

볼리비아: 태양의 섬, 라파스, 우유니 소금사막

칠레: 산페드로데아타가마, 칼라마, 산티아고, 이스터섬, 산티아고, 푸레르토나탈레스, 토레스델파이네, 푸에르토나탈레스

아르헨티나: 엘찰텐, 엘칼라파테, 우수아이아, 부에노스아리레스, 푸에르토이구아수

브라질: 포스두이구아수, 상파울로


안데스의 맨 북쪽에 위치한 콜롬비아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와, 남미대륙의 맨 아래에 위치한 파타고니아를 트레킹하고, 마침내 세상의 끝이라는 우수아이아를 돌아본 다음, 이구아수 폭포를 감상하고 브라질을 통해 귀국하는 여정이다.


이 책은 단순히 남미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서정적으로 전달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근대사에서 남미인들이 경험한 미증유의 인권유린의 현장을 답사한 답사기의 성격도 있다. 저자는 여정 중 인권침해를 상기하며 또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말자는 취지로 만든 인권박물관을 빼지 않고 방문하며 그곳에서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한다


이것은 시인 엘리엇 말대로 "모든 여행의 끝은 우리가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 와서 그곳을 새롭게 아는 것"이라는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동안 대한민국의 인권증진을 위해 살아온 저자의 삶의 여정을 생각해 보면 더 큰 의미가 있는 여행일지도 모르겠.



3.

여행기가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저자가 아무리 유려한 필체로 전한다고 해도 내가 직접 보는 감동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기행문에서 그런 것을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데스의 경관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 그것보다는 저자가 직접 경험한 그 느낌이나 현장에서의 생각에 관심이 많다. 더욱 믿을만한 저자라면 그가 경험한 그 느낌과 생각은 피안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경험한 그것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감동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의 삶을 비교적 잘 알기에 그가 안데스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은 나 또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여행은 했지만, 그와 함께 상상의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 그게 바로 이 책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는 인권변호사 조용환 변호사의 삶을 알아간다. 어쩜 소시민인 나와는 거리가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나와 같은 소심함을 그에게서 발견할 때는,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페루여행 때 그는 무지개산을 등정한다. 해발 5,100미터의 고산. 그가 남미 여행 중 가장 어려운 여정이었다고 고백한 산이다. 이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여행객들이 현지인들이 모든 말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그 때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아마도 잔잔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전 8시에 출발했다. 출발지점에서 조금 올라가니 소문대로 많은 현지인이 말을 끌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 올라가는 길에 말을 타려고 했다. 말에 올랐는데 마침 페루 화폐가 부족했다. 달러로 환산해보니 35불 정도여서 넉넉하게 계산해 40불을 주겠다고 하니 60불을 요구했다. 손으로 숫자 계산까지 해서 보여주며 60불은 너무 비싸다고 했지만 그냥 우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2만 원 정도 더 주어도 대수로울 것이 없는데, 막상 여행을 다니다 보면 10불이 엄청나게 큰돈으로 느껴진다. 40불도 많은데 60불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말에서 내렸다.”(18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빙하 페리토모레노. 저자는 이 빙하를 보면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그라시아스 알 라 비다'를 노래했다. "삶에 감사합니다.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흰 것과 검은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두 눈을 주었습니다. 높은 하늘에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아름다운 페리토모레노 빙하가 언제까지나 평형을 유지하며 제 모습을 간직하길 빌었다. 우리 아이들, 손자들, 그 손자들의 손자들까지도 볼 수 있기를. 이 빙하를 볼 수 있게 해 준 삶이 가슴 저리게 감사한 하루였다."(403)


4.

저자는 평상시 꼭 할 말만 하는 좀처럼 수다를 모르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까칠한 이미지의 사나이다. 이런 사람에게도 무지개산의 등정 성공은 보통의 사건이 아니었다. 거길 다녀오고 나니 마치 천하를 얻은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글로 쓴 독백이지만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강렬한 수다다.


무지개산에 다녀오며 무리한 탓에 며칠 동안 고생했다. 나로서는 죽을 뻔했다고 할 만큼 고생했고, 몸이 무척 괴로웠다.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나간 듯 온몸이 축 늘어진 느낌이었다. 사람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다리를 질질 끌고 다녔다. 그런데 마음은 뿌듯하고 날아갈 것 같았다. 괜히 기분이 좋고 히죽히죽 웃고 다녔다. 자심감도 들었다. 장대 같은 서양 젊은이들도 말을 타고 올라가는 무지개산을 온전히 내 두 발로 걸어갔다 돌아왔다. 내가 대견했다. 파타고니아 트레킹도 잘 해낼 수 있겠다 싶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떠들며 자랑하고 싶은데 옆에 아무도 없어 서운했다.”(193)


5.

진정한 여행가라면 여행의 윤리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나의 여행이 현지인들에겐 어떤 모습으로 받아들여질까. 특히 대상지역이 경제적으로 빈곤한 지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저자는 틈만 나면 전국 곳곳의 야생화를 사진에 담아온 아마추어 사진작가다. 그럼에도 그는 이번 여행에서 큰 사진기를 갖고 가는 것을 포기했다. 왜 그랬을까?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밤하늘의 은하수를 제대로 찍지 못하는 아쉬움을 전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게 사진기다. 욕심껏 사진을 담으려면 큰 사진기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렌즈와 삼각대를 준비해야 하는데 크기와 무게가 만만치 않다. 더구나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에 부담이 더욱 컸고 치안도 염려됐다. 그런 데다 두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하나는 내가 사진에 너무 열중해 정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여행의 본질에는 소흘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게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 안데스로 떠나며 큰 사진기를 포기한 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태양의 섬과 우유니 사막에서 잉카의 하늘을 가득 채운 황홀한 은하수를 보면서 가슴을 쳤다. 사진기 문제는 풀기 어려운 딜레마다.”(250-251)

 


6.

안데스를 걸으면서 저자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고생스럽게 산을 오르면서 끊임없이 삶의 근원적 문제에 자문자답한다. 어려운 길일수록 그런 생각은 많았다. 남미의 끝 파타고니아를 트레킹하면서 되내긴 이 말은 특히 내게 인상 깊다.


인생길도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지금이 항상 제일 힘들고 고생스럽게 느껴진다. 이미 지나온 길은 실제보다 평탄하고 쉬웠던 것처럼 기억한다. 한나 아렌트도 어디선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현실의 아버지는 언제나 병석에 누워 있는 연약한 환자였지만 꿈속에 나타나는 아빠는 자기와 즐겁게 놀아주는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사람의 기억이란 그런 것이라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푸시킨이 쓴 것도 그런 뜻 아니었나 싶다.”(357)


7.

책을 읽다보면 야생화를 좋아하는 조용환 변호사가 어떤 인물인지를 실감나게 알 수 있는 부분이 여러 곳에 걸쳐 나온다. 들에 핀 한 떨기 야생화도 그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다. 파타고니아 트레킹 셋째 날 이런 일이 있었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던 중에 뭔가 스쳐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봤지만 특별한 것 보이지 않았다. 5-6미터 남짓한 거리지만 비탈길이라 내려갔다 오기가 부담스러웠다. 별 거 없는데 그냥 올라갈까, 내려가볼까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갔다. 숲 안쪽에 빨간 게 보였다. 야생 후쿠시아였다. 젊은 시절, 화원에서 이 꽃을 보고 신기해서 화분을 구입해서 키운 적이 있다. 그 꽃을 파타고니아에서 만나다니.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야생화 아닌 꽃이 없지만, 후쿠시아가 야생화라는 게 새삼 신기했다. 기분이 좋았다. 행운이 함께 하는 느낌이었다.”(362)


8.

모두의 스승열전에서 나는 저자를 내게 법률가의 삶을 가르친 한 분의 선배로 소개했다. 오늘 이 여행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에게서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안데스를 걷는 어느 법률가의 찐한 휴머니즘이. 역시 배울 게 많은 인물이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언젠가 안데스를 걷는 꿈을 꾼다. 그 때도 나는 이 책을 현지에서 또 읽게 될 것이다. 그가 느끼고 생각한 그 위에 나도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게 대체 무엇일까? 지금부터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