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사상

누구도 내 생각의 자유를 죽일 수 없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를 추모함-

박찬운 교수 2017. 7. 24. 11:08

누구도 내 생각의 자유를 죽일 수 없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를 추모함-







창밖을 내다보니 제법 빗줄기가 굵다. 나는 이 소리를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긴다. 오래 전 읽은 것이기에 이미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다.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안인희 옮김)이다. 다음 학기 수업을 위해서 간단히 정리해 놓아야겠다.

 

기독교 개신교 역사에서 루터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 칼뱅(1509-1564)이다. 그가 없었다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혁명은 미완으로 끝나 개신교는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교리적으로 볼 때 장로교가 득세한 우리나라도 칼뱅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내 책장에도 그의 책 <기독교강요>가 광채를 발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렇듯 칼뱅은 개신교의 영웅이지만 그가 철저한 독재자였다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가 지배한 16세기의 제네바는 실로 암흑의 도시였다. 종교의 자유는커녕 모든 시민은 새로운 지배자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모든 것이 금지된 상태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36세에 홀몸이 된 남자는 그것으로 결혼은 물론 여자와의 관계도 영원히 끝난 것이라 여겼다. 죽을 때까지 건장한 남자로서 20년을 살면서 이 자발적인 금욕주의자는 다시는 여자를 건드리지 않고 오직 정신적인 것, 종교적인 것, 그리고 가르침에만 몰두했다.

 

칼뱅(1509-1564)


제네바의 모든 권력은 칼뱅의 수중에 있었다. 교회, 관청, 시당국, 종교국, 대학, 재판소 모든 곳에서 그의 가르침은 법이었다. 그가 누군가에 대해 반대하는 듯한 눈치만 보여도 상대는 곧바로 감옥에 가거나 추방되었고 운이 없을 경우엔 화형장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칼뱅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생각에 따라 제네바에선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단 하나의 의지는 칼뱅의 생각이었다. 그는 일생 동안 한 순간도 자기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권리, 자기만이 진리를 알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칼뱅은 루터가 선언한 기독교도의 자유’(성서의 해석은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전권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이념을 다른 모든 형식의 정신적 자유처럼 사람들에게서 가차 없이 빼앗아버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의 모든 즐거움도 빼앗아버렸다. 연극, 오락, 축제, 춤 등 온갖 유희가 금지되었다. 장신구가 달린 옷은 금지되었고 오로지 수도사 같은 의상 외에는 입을 수 없었다. 붉은 포도주 외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세례식과 약혼식에서 일정한 가짓수 이상의 요리나 설탕 들어간 음식물의 제공이 금지되었다. 모든 게 금지 또 금지되었다.

 

제네바 시민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살고 죽는 일, 일하고 복종하고 교회에 나가는 일만이 허락되었다. 칼뱅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 제네바에선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의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

 

이 상황에서 그 누구도 서슬 푸른 칼뱅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일세를 풍미했던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이자 자유로운 영혼 에라스무스는 은둔처에서 가끔 비난의 화살을 날려 보냈다. 프랑스의 작가 라블레는 어릿광대의 의상을 입고서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걸작을 냈다. 철학자 몽테뉴는 세기의 에세이 수상록에서 현자의 능변을 토해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광기의 폭군에 대해 진지하게 공격하지 못했다. 칼뱅의 뒤에는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있고 국가 공권력까지 가세하고 있는데, 어떻게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개인이 칼뱅을 공격해서 이길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가장 순수한 진리라 해도 폭력으로 그것을 남에게 강요한다면 그것 자체로 죄악이며, 그것 또한 진리다. 칼뱅의 독재는 하느님의 말씀을 빙자한 폭력이었다. 누군가가 나타나 저 폭주하는 열차를 막아 세워야 한다. 저 무자비한 폭력 앞에 나아가 당신이 틀렸소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또 다른 하느님의 역사다.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이 역사적 임무를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1515-1563)가 맡게 된다. 그만이 유일하게 칼뱅 앞으로 나아가는 비극적 운명과 단호하게 맞섰다. 그는 박해 받는 사람들을 위해 감히 입을 열었고, 그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었다. 그는 칼뱅에 의해 화형을 당한 세베르투스에 대해 죄 없이 살해당한 사람이라고 불렀고 칼뱅의 온갖 궤변에 대해 불멸의 언어로 항거했다. 그것은 그의 말대로 코끼리 앞의 모기의 상황이었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인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227)

 

어느 누구도 강제로 유린해서는 안 된다! 강제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강요해서 믿음을 갖게 하려는 행동은, 영양가 있는 음식을 환자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는 사람의 행동과 똑 같이 소용없는 것이다.”(228)

 

이 말을 하면서 그는 관용을 선언했고, 사상의 자유를 옹호했다. 바로 이 신념을 위해 그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카스텔리오의 목숨 건 행동은 후일 볼테르의 관용으로, 에밀 졸라의 드레퓌스 옹호로 나타났지만, 그들의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볼테르가 살던 시대, 에밀 졸라가 살던 시대가 어떻게 칼뱅의 신정정치 하에 지배되던 제네바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볼테르도, 에밀 졸라도 목숨을 걸면서까지 관용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400년 후 카스텔리오를 세상에 끌어낸 사람이 바로 독일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다. 그는 히틀러가 독재의 길을 걸어갈 때인 1935년 경 칼뱅의 독재에 반대했던 카스텔리오의 이야기를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이란 이름의 책으로 냈다. 어쩜 츠바이크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마치 카스텔리오라는 기분으로 썼을 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새로운 칼뱅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 마지막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권력자들이 자유정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양심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는 인류와 인간성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한 싸움을 떠맡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의무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모든 칼뱅에 맞서 어떤 카스텔리오가 다시 나타나서 폭력의 모든 폭행에 맞서 사상의 독자성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288)

 

어떤 시대에도 칼뱅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면 그에 맞서는 자, 카스틸리오가 나타나야 한다. 그게 인류가 살아온 길이다. 그것은 내가 사는 이곳 대한민국 아니 저 북녘 땅에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누가 카스틸리오가 되느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