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소설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10. 10. 18:37

소설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내가 작가, 그 중에서도, 소설가에 대하여 무엇을 알랴. 이제껏 읽은 소설이 얼마나 된다고 작가에 대하여 말을 하랴. 작가는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고, 피안의 세계에서 사는 별스런 인간이라고만 여겨왔다. 그럼에도 오늘 작가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자 한다. 2년 전 우리 곁을 떠난 작가 최인호의 추모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를 읽고 나니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기 때문이다.

 최인호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린다. 어떤 이는 그에 대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려한 문체를 구사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인간본질을 추구한 문호라고 극찬한다. 또 누구는 그를 70-80년대 엄혹한 세상에서, 저항정신이라는 작가정신을 외면한 채, 오로지 인기영합의 대중소설만 쓴 삼류작가라고 혹평한다. 나는 여기에서 그가 어떤 작가인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다. 단지,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는 말하고 싶다. 그는 엄청난 문학적 에너지를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품고 산, 매우 드문 소설가였다고.


최인호(1945-2013)

 <나는 나를 기억한다> 두 권 중 제1권은 최인호가 나이 60 무렵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쓴 자전적 에세이고, 2권은 중학교 이후 대학노트에 써 놓은 미발표 원고를 모아 놓은 것이다. 두 권 중 제1권을 읽다보면 이곳저곳에서 최인호가 생각하는 작가론을 접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작가란 어떤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 이것이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다.

우선, 작가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창작의 원료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고단한 삶을 훈장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그것을 미래를 위한 자양분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작가로서 자격이 있다

 최인호는 어린 시절 부친이 돌아가심으로 인해 6형제가 홀어머니 밑에서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어려움을 당당하게 극복하고 오히려 그것을 창작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그는 소년 시절의 가난과 슬픔이 훗날 자신의 창작에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으면서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 나는 아주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슬퍼하느니보다는 미래에의 창작을 위해 오늘 나는 그 희귀한 곤충 하나를 날카로운 핀으로 채집해서 표본을 만들고 있다는 당당한 자부심을 갖고 성장하고 있었다.”(198

 미래를 꿈꾸며 소설을 생각하는 소년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그래서 가난을 슬퍼한 적도 없었으며, 자신을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언젠가는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미래에의 기쁨 하나로 나는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어릿광대의 곡예와 같은 것으로, 오직 먼 훗날을 위해 예비된 저당물과 담보로 생각하고 있었다.”(198-99)

 그는 초등학교 시절 독감에 걸려 홀로 학교 양호실에 누워 있을 때에도 그것이 이 다음에 소설 쓰는 작가가 되면 언젠가는 자신의 손끝에서 마법과 같은 주술적인 실로 엮어지리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쓰고 있다. 감기 걸린 것마저 그에겐 소설의 한 장면 혹은 소재로 수집해 놓았던 것이다.

 내가 최인호의 저 말에서 적지 않게 감동하는 것은 내 삶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나도 어린 시절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가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아픔이 언젠가는 내 삶의 영롱한 진주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소설가는 그저 글 잘 쓰는 재주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창작욕이 마음속에서 활활 타올라야 하며, 그것을 한 발화점을 향해 언어로, 말로 집약해야 한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인호가 소설을 어떻게 써왔는지 한 장면을 보자. 이 장면을 그리면 그에 대해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쓸 때 남들이 다 자는 밤에 깨어나 원고지를 든다. 여편네도, 자식도 나와는 무관하다.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는 백지이다. 빈 칸을 향해서 만년필을 든다. 머릿속에는 아직 뚜렷하지 않은 소재들이 간간이 키 큰 나무들처럼 우뚝우뚝 서 있다. 숨이 가빠온다. 손끝이 떨린다. 귀신이 머리맡에서 나를, 원고지를 노려본다. 나는 안개 속에 싸여 있는 말들을 조금씩 조금씩 꺼내본다.”(1권 209)

 글을 쓰면서 안개가 걷히고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인다고 그것을 한꺼번에 보여주면 안 된다. 독자를 위해 지금은 안 된다. 조금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중요한데... 최인호는 바로 이것을 이렇게 말한다.

 빨리 아껴두었던 것을 써버리고 싶다. 그러나 참는다. 자제해야 한다. ... 가장 적절한 곳을 찾아서 그것을 쏟아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감동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과 정사를 벌이는 것과 같다. 내가 사정해버리고 싶어도 상대편을 위해서는 인내해야 한다. 내 앞에서 누운 여인의 호흡을 가늠해야 한다. 그녀가 가장 원할 때 나는, 작가는 사정을 그녀의 깊숙한 곳에 베풀어야 한다.”

이 부분은 섹스를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작가가 무엇인지 알려면 완전한 섹스가 무엇인지를 터득하라. 소설이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배려한 완벽한 사정의 타이밍을 갖는 글, 그게 바로 최인호가 말하는 진정한 작가가 쓰는 글이다.

어떤가? 진정한 작가가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잡히지 않는가. 만일 그런 작가를 만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에서 어찌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최인호의 다음 말은 없어도 될 말이다. 당연하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은 작가를 너무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작가라면 머리나 기르고 수염이나 기르고 미사여구로 여자나 유혹하고, 불평이나 하고, 주머니는 텅 빈 친구로 생각해 주지 말기를 바란다.”(1권 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