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신 서유견문

신 서유견문(3) (내가 미국을 알아간 방법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9. 28. 20:12

신 서유견문(3)

 내가 미국을 알아간 방법에 대하여


나는 가끔 상상한다. 1883년 조선인으로선 미국을 처음 간 유길준이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몇 년 전 완공된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해 맨해튼의 반짝이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을 땐 어떤 기분이었을까? 워싱턴 디시의 캐피탈 홀(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보았을 때는....

아마도 유길준이나 그 일행들의 문화적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얼마나 충격이 컸고 당황했으면 사절단장 민영익은 뉴욕 호텔에서 만난 아서 대통령에게 조선식 큰 절을 올렸을까? 짧은 미국 체류기간 중 유길준은 서양세력의 발전상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그곳에 남고자 했다. 도대체 미국이란 곳이 어떤 나라인지, 서양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발전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1883년 조선 보빙사 사절단이 아서 대통령에게 절하는 모습


나는 유길준이 미국에 도착한 지 113년 만인 1996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유길준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놀랐다. 하루하루를 경이적인 눈으로 미국의 이곳저곳을 경험했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다름을 발견했을 때마다 나는 그 실체와 원인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로선 내 유학의 목표 중 하나였다. 내 공부의 목적은 단순히 내 전공영역의 지식습득만이 아니었다.


금문교와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사진 위키피디아)


미국으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 비지팅 스칼라로 온 교수들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교민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미국지식이란 참으로 빈약한 것이었다. 의문이 있어 물어보면 대부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 것 같다혹은 누구한테 들으니 ‘...카더라식의 답이 전부였다. 법률을 공부해 온 나로서는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정확한 것을 알고 싶었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미국을 지탱하는 뿌리를 알고 싶었다. 이를 위해선 먼저 미국의 구조적 이해가 필요했고, 그런 다음 미국인의 의식을 이해해야만 했다.

지금부터 그 분투기를 소개한다.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알아갔을까?


나의 미국 이해에 도움을 준 책 두 권


우선 미국 역사를 알아야 했다. 이것은 우연하게 서점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집필한 US History and Government(Andrew Peiser 1인 공저) 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나같이 언어의 벽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표현이 매우 간결하고 곳곳에 그림과 도표 그리고 지도가 나와 있어 미국 역사를 매우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수준의 책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여러분은 지금 한국 역사에 대해 고등학교 역사책 이상으로 알고 있는가). 나는 이 책을 통해 역사는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자주 생각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 이 책은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논술식 문제가 레벨을 달리해 두 문제씩 나온다. 그 중 레벨 1의 문제를 보자.


<문제>

국내문제나 외교정책 중 어느 하나에서 대통령의 행위는 간혹 대통령 권한의 한계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다음은 두 대통령이 그들 재임기간 중 봉착한 문제다.

린든 존슨 베트남 전쟁

리처드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

(1) 위 각 경우에서 대통령이 취한 행위와 그에 대한 의회의 반응을 서술하라.

(2) 각 문제에 대응하는 대통령들의 행위는 어떻게 대통령 권한의 한계로 나타났는지 논하라.

나는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말이다. 600쪽이 넘는 책 대부분에 형광펜이 칠해진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똑똑한 책 한 두 권을 완전하게 '조지는 것' 이 내가 법서를 공부하면서 터득한 공부방법론이다.  미국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이 방법론이 주효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참으로 진지했다. 아직도 미국을 알고 싶을 때는 이 책을 꺼내 읽는다.

자랑 좀 하는 것을 이해하시라. 지금은 많이 잊었지만 나는 그 당시 미국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그들을 꽤나 놀라게 만들었다. 역사적인 문제가 나오면 여지없이 내 입에선 특정 사건의 연도, 인명, 지명 등이 튀어 나왔으니 말이다. 그들은 감탄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미국 역사를 그리도 정확히 아느냐고 되물어 오곤 했다.

미국 역사를 대충 이해하니 그 다음은 좀 각론적인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수많은 일들을 체계적으로 알고 싶었던 것이다. 간간히 벽에 붙어 있는 선거벽보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디에선가 프라이머리(예비선거)...어쩌고저쩌고 하는 데 그게 무엇인지, 선거운동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주정부는 어떻게 운영되는지, 법률안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통과되는지, 주의 사법시스템은 어떻게 작동되는지, 지방정부의 종류와 관계 그리고 역할분담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교육제도와 의료제도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등...


2008년 뉴햄프셔 대통령선거 프라이머리,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했다.(사진 위키피디아)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내가 읽는 법학서적엔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대체로 미국 대법원 판례가 중심이었다. 헌법 책을 보면 연방운영은 대체로 이해되었지만 주에 대해선 설명이 거의 없었다.

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고민을 하다가 버클리 대학 근처의 한 커뮤니티 칼리지를 찾아갔다. 커리큘럼을 보니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정치학 입문을 가르치는 교수일거라 생각하고 염치불고하고 교수 방문을 두드렸다. 키가 작은 백인 교수는, 내가 온 목적을 이야기했더니, 호방하게 웃으면서, 서가에서 책 한 권 꺼내주었다. 책 이름? California State & Local Government in Crisis(Walt Huber)라는 책이었다. 그는 이것을 내게 선물로 주면서 한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감사한 맘에 한국식으로 넙죽 절하고 집에 와서 책을 열어보니 기가 막힌 책이었다. 내가 알고 싶은 게 거기 다 있지 않은가! 미국에 있는 동안 위 역사책과 함께 이 책은 항시 내 곁을 떠나질 않았다. 어디 가서 미국 시스템과 관련해 저게 뭐지 하는 의문이 있을 때는 집에 돌아 와 이 책을 찾아보았다. 대부분 내가 알고자 하는 수준의 답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교수로부터 한 가지 보너스 선물도 받았다. 동양에서 온 변호사라는 사람이 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원하면 자기 클래스에 와서 청강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미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나는 1996년 가을 일주일이면 한 번 이 교수의 클래스에 들어갔다. 50여 명의 젊은 학생들이 작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열기가 가득했다.


 미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이만한 책이 없었다. 내가 본 것은 8판이었는데, 어느새 15판이 나왔다.


교수가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 거의 모든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교수가 하는 일은 공정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음번엔 그 반대로 가면서 손든 친구 중에서 일부를 지명했다. 나는 아직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열기를 미국 명문대학에서 본 게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일개 커뮤니티 칼리지 강의실에서 본 것이다.

나는 이 때 그 교수가 강의 시 사용하는 교과서 한 권을 샀다. 미국 정치학 입문서, The basics of American politics(Gary Wasserman) 이란 책이었다. 1996년 8판을 샀는데, 이 책을 통해, 나는 미국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미국 정치를 이해하려고 할 때 이 책을 본다. 설명이 의외로 쉽고, 법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연방대법원 판례가 미국 사회에서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 평소 내가 알고 싶은 곳을, 적절히 풀어주었다.


미국의 대표적 전국지 뉴욕타임 (사진 위키피디아)

샌프란시스코 지역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사진위키피디아)


마지막으로 미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신문이었다. 미국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두 종류의 신문을 읽어야 한다. 미국 전체가 돌아가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소위 전국지, 자신이 있는 지역을 알기 위해서는 지방지를 봐야 한다. 내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있을 때는 전국지로 뉴욕타임을, 지방지로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를 보았다.

1996-97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이었다. 뉴스를 보면 매일같이 스타 검사가 자기 집 앞에서 기자들에게 한 마디씩 하는 데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지 들리지 않아 애를 태웠다. 유학생들에게 물어보아도 제대로 아는 친구가 없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으로 국내신문이라도 읽었을 것이다. 미국에 있다고 해서 미국을 제대로 아는 게 아니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대부분 유학생이나 교민들은 한국 신문 제대로 읽는 사람들보다 미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다.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 내 스스로 뉴욕타임을 열심히 읽는 수밖에 없었다. 스타 검사가 방송을 통해 말하는 것을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신문을 열심히 읽다보니 그 내용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한국인 중 이런 문제에 대해 나만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도 드물었다.

지역신문도 틈만 나면 열심히 보았다. 그것을 읽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 무슨 축제가 있는지, 무슨 요일, 몇 시에 벼룩시장이 어디에서 열리는지, 어디에서 세일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지역에서 미국인들처럼 살기 위해서는 지역신문도 반드시 읽어야 함을 그 때 여실히 알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미국에 간지 2년 만에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8년 미국을 떠나기 몇 달 전부터 유학생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했다. 주변 유학생들을 2주에 한 번 우리 집으로 초청한 것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서로 토론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아는 정보를 토대로 토론을 이끌어갔다. 유학생활을 몇 년 씩이나 하였지만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르는 젊은 친구들을 위해 선배인 내가, 한국에서 온 한 법률가가 해줄 수 있는 선물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위의 책들과 뉴욕타임 그리고 로컬 신문을 꼼꼼히 읽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