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단상

이들이 있기에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박찬운 교수 2018. 11. 27. 17:35

이들이 있기에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 시대의 작은 영웅들-


내가 이 공간을 수년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무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글을 보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오프라인에서 만나다 보면, 같은 한국인으로서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게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내킨 김에 생각나는 대로 몇 사람을 열거해 본다. 본인들이 이 글 보면 부끄러워할 것 같아, 신상은 밝히지 않고, 그저 영문 알파벳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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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생. 지방 고등학교 영어 교사. 포스팅하는 글마다 수백 명의 친구들이 열광적으로 ‘좋아요’와 댓글을 단다. 왜 그럴까 호기심이 생겨 유심히 읽어보았더니 그럴만하다. 그의 어린 시절 가정사의 어려움, 대학시절 교사가 되는 과정의 역경을 듣다보면 듣는 이의 눈가에 이슬을 맺게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음악을 좋아하고 끊임없이 자기성찰의 글쓰기를 해왔다. 자신을 둘러싼 많은 제한 속에서도,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삶에서 조금씩 실천한다. 맵시 있는 옷 입기와 과하지 않는 화장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 사람들은 이런 A선생을 보면서 저것이 바로 자신 같은 소시민이 추구해야 할 확실한 행복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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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선생과 C 선생. 서울과 수도권 교사. 지난 몇 년 동안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두 분과 교유해 왔다. 미친 입시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학생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들이다. 촛불집회가 한참일 때는 어김없이 광화문 광장에 나와 정권퇴진을 외쳤다. 숨 막히는 현장 속에서도 방학이 되면 전국 이곳저곳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그 감동을 학생들에게 돌려준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여전히 마음은 청년이자 소녀다. 어린 학생들과 지지고 볶는 삶이 그것을 가능케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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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선생. 지방 소도시에서 사는 시인이자 독서운동의 리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으로 책 읽기를 좋아했다. 대학원에서 독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했고, 틈나는 대로 자신의 삶을 잔잔한 운율의 시로 옮겨, 벌써 몇 권의 시집을 냈다. 도서관 지킴이로서 동네 주민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운영한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살려 (나 같은 ㅎㅎ)유명 인사를 불러 강연도 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그가 만드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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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선생. 내 고향 충청도에서 양돈업을 하는 사업가. 이 분은 유수한 대학을 나와, 젊은 시절 세계를 무대로 금융업에 종사한 금융계 출신의 재원이다. 갑작스런 계기로 양돈업에 뛰어들었는데, 역시 배운 사람이라 다르다. 그가 추구하는 양돈업은 종래의 방식을 완전히 탈피한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서 손색이 없다. 첨단 축사를 만들어 양돈과정에서 나오는 환경문제를 해결했고, 방목을 시도함으로써 고품격 양돈을 추구한다. 농장운영을 단순히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변 마을주민들과 상생을 도모한다. 그는 얼마 전 국회에 나가 자신의 환경 친화적 양돈업의 가능성을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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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선생.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일하는 엔지니어. 몇 년 전 갑자기 큰 병이 찾아와 사경을 헤맸지만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했다. 이 분은 내가 편견으로 알고 있는 엔지니어와는 급이 다르다. 인문학을 제대로 아는 엔지니어라고나 할까. 매우 고급스런 영어를 구사하고 한학 또한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자신이 경험하는 삶의 현장을 깊은 통찰력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포스팅하는 글을 읽다보면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단순한 삶을 추구하지만 추구하는 세계는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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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선생. 영국에 사는 교민으로서 현지 초등학교 교사. 현재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키우는 싱글 맘. 고독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표현이 직선적이며 개성이 강하다. 글씨와 그림에 소질이 있어, 간간히 포스팅하는 작품을 볼 때마다, 신사임당이 환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한국 정치에 매우 관심이 많아 줄기차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포스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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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수많은 선생들. 오늘 이 글에선 언급하지 못하지만 내가 매일같이 대하는 대단한 분들은 수없이 많다. 굳은 심지로 좋은 책을 내는 출판인, 치열한 예술혼으로 사람과 세상을 그리는 화가, 골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가는 소설가....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지만 신의를 갖고 수년 간 하루도 빠짐없이 좋은 글에 ‘좋아요’와 댓글을 달면서 글쟁이들을 격려하는 남다른 인격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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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들을 매일 같이 이곳에서 만난다. 이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숨은 인재이자 작은 영웅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있기에 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201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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