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5)아버지를 넘지 못한 아들…피테르 브뤼헬 부자 이야기

박찬운 교수 2015. 9. 26. 22:36

인문명화산책 5

[아버지를 넘지 못한 아들…피테르 브뤼헬 부자 이야기]


요즘 그림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것들을 보면 뭔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서 한 점 한 점 설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 번 <고흐 그림이야기>처럼 열정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단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내가 선정한 명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명화를 감상하면서 인권, 평화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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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테르 브뤼헬(Peter Brueghel the Elder, 1525-1569)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아들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브뤼헬은 두 아들을 낳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을 때 큰 아들 피테르(Peter Brueghel the Younger, 1565-1636)는 4세, 작은 아들 얀은 1세에 불과했다. 그런데 용케도 두 아들 모두가 화가로 성장했다.


아들들이 화가가 된 것은 가업을 잇는 유럽인들의 직업관과도 관련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타고난 그림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들 형제가 화가가 되는 데에는 외할머니 영향이 직접적이었다. 이들 형제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자 외할머니에 의해 양육되는 데 외할머니는 당시로선 보기 드문 여류 화가였다.


둘째 아들 얀은 후일 네덜란드 황금기(17세기)에 꽃 정물화를 잘 그린 화가로 유명해지지만, 첫째 아들 피테르는 살아 생전 B급 화가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앤트워프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한 화가였지만 자신의 독창적인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아버지 그림을 모사한 것으로 후일 유명해졌다.


피테르 브뤼헬, 1566년, <12월의 베들레헴>,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중세 이후 서구 사회에선 그저 그림 그리는 재능만 있다고 해서 바로 직업적 화가가 되진 못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선 우선 화가 길드에 소속된 마이스터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일정 시점이 되어 그 능력이 인정되면, 길드의 허가를 받아 독립하여 스튜디오를 여는 방식으로 화가 생활을 하였다. 아마도 브뤼헬의 아들들도 그런 과정을 거쳐 화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피테르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명성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그림을 좋아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의 스튜디오엔 아버지의 그림을 모사해 달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 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에겐 여러 명의 도제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려낼 수가 있었다.


피테르가 아버지의 그림을 어떻게 모사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 방법으로 모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그린 원작을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다. 주문자가 원작을 보고 그것을 그것을 그대로 그려달라고 주문했을 경우이다. 피테르의 모사작 중 원작과 비교하여 거의 구별이 안 되는 경우가 이렇게 그린 때에 해당할 것이다.


피테르 브뤼헬, 1566년, <12월의 베들레헴>,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이 사진은 원작을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다음 가능성은 원작의 판화를 보고 그리는 방법이다. 원작은 이미 팔렸거나 주문자에게로 갔지만 브뤼헬은 상당수 작품을 판화로 남겨 놓았다. 이 경우 피테르는 이들 판화를 보고 원작에 가까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원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세부묘사는 그것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피테르가 남긴 모사작 중, 원작과 비교하여, 일부를 아예 생략하였거나, 세부표현을 달리한 그림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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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법으로 피테르는 아버지의 원작을 모사했는데, 그 인기에 따라 어떤 원작은 50점, 60점을 모사하기도 했다. 만일 피테르의 이런 모사가 없었다면 지금 유럽의 여러 미술관에서 브뤼헬의 흔적을 여간 해선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브뤼헬의 원작이 고작 45점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고, 그것마저 일부 미술관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소장한 상태에서(비엔나 쿤스트가 전체 원작 3분의 1을 소장), 어떻게 그의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겠는가. 아들 피테르 덕분에 모사작이라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는 게 아니겠는가.


자, 그럼, 오늘 아버지 브뤼헬이 그린 원작과 그 아들 피테르가 그린 모사작을 함께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피테르 브뤼헬(아들)의 <12월의 베들레헴> 모사작, 브뤼셀 왕립미술관 소장, 이 사진은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위 그림은 프랑스 릴 미술관에 소장된 모사작이다. 이 사진은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오늘 그림은 브뤼헬이 1566년 그린 <12월의 베들레헴>이라는 작품인데, 모두 내가 최근에 다녀 온 브뤼셀 왕립미술관과 프랑스 릴 국립미술관에서 직접 찍은 것이다. 첫 번째가 바로 브뤼헬의 원작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아들 피테르가 그린 모사작이다.


이 작품은 성경의 한 기사를 모티브로 해서 그려진 것이다. 바로 누가 복음 2장 1절-5절에 나오는 인구조사를 위한 호적이야기다. 해당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누가복음 2장 1-5절)


예수의 부모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사 아구스도(로마제국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말함)의 명령에 따라 호적신고를 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방법이었고, 유태민족에겐 압제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림은 바로 예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신고를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마리아는 이미 잉태한 상태이었고,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뒤 말 구유간에서 예수를 낳는다. 그림 아래 부분을 보면 말을 탄 마리아가 보인다. 요셉은 마부 역할을 하고 있다. 왼쪽 건물 앞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호적 신고를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장면이다.


사실 이 그림은 성경의 기사를 모티브로 한 단순한 성화로 보긴 어렵다. 16세기 중엽 네덜란드에선 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성화는 이미 한 물 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브뤼헬이 전통적인 성화를 그렸을 리가 없다. 나는 이 작품이 상당히 정치적인 그림이라고 본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 이 지역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스페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16세기 중엽은 이미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로 네덜란드엔 신교가 들어 와 날로 그 교세를 넓히고 있을 때다. 이 상황에서 네덜란드 인들이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양측의 긴장은 고조되고 마침내 전쟁 기운이 무르익어 가던 시절 이 그림은 그려졌다. 그리고 2년 후(1568년)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에선 소위 8년 전쟁이라는 독립전쟁이 터진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면, 이 그림을 성경의 기사를 통해 스페인의 압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려고 했던 작품으로 해석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른들은 이런 정치적 긴장 속에서 사는데 그림에 나타난 아이들은 마냥 즐겁다는 사실이다. 그림 중앙을 보면, 아이들이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빙판에서는 썰매를 끌고 팽이를 돌리고 있다. 한 겨울 눈과 얼음 위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선하다. 지난 번 <아이들의 놀이>에서 본 것처럼, 브뤼헬이 아이들을 좋아하고, 자연 풍경을 중시한 것은 이 그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2월의 베들레헴>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그림이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을 그렸을 것이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그림 풍경이 베들레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본다. 베들레헴의 날씨에선 이런 겨울놀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베들레헴의 날씨를 직접 조사해 보았더니 12월 기온이 섭씨 7도에서 14도를 오르내리는 날씨다. 지구 온난화를 고려한다고 해도, 2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눈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빙판 위에서 썰매를 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그림은 제목과 관계없이 네덜란드의 겨울을 그린 작품이다. 브뤼헬은 네덜란드의 겨울을 그린 그림을 몇 작품 남겼는데, 거기에서도 이 그림에서와 같이 아이들이 눈과 빙판에서 노는 장면이 나온다. 눈과 빙판에서 노는 아이들이야말로 브뤼헬 그림의 겨울 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두 번째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이 바로 큰 아들 피테르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들어오는 상황이어서 원화의 생생함을 전달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이 그림은 현재 브뤼셀 왕립미술관의 브뤼헬 방에 있다. 한 방에 아버지 원작과 아들의 모사작이 동시에 전시되고 있어 브뤼헬을 좋아하는 관람객들이 두 작품을 비교·음미해 보는 데는 그만이다.


사진상으로도 금방 원작과 모사작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나무들을 비교하면 금방 차이가 난다. 나무 가지 묘사가 크게 다르지 않는가. 직접 본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아버지 그림이 역시 낫다. 아들의 것은 아버지의 세밀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 본 모사작이 태어난 과정의 한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우연히 발견한 피테르의 모사작이다. 지난 여름 프랑스 북부도시 릴에 갔을 때 그곳 국립미술관을 들렀다. 거기에서 예상치 않게 이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릴이란 도시는 지금이야 프랑스 도시지만 과거에는 플랑드르 남부의 중심 도시였다. 그곳에 이 그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그림을 원작과 비교하면 물론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두 번째 그림에 비하면 원작에 훨씬 가깝다. 피테르가 여러 모사작을 만들면서도 그것들 모두를 똑 같이 그리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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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