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사법

조용히 죽어가는 대한민국 사법부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37

조용히 죽어가는 대한민국 사법부


이성호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 국가인권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대통령의 현직 법관 사랑이 입증됐다. 물론 당사자야 인권위원장으로 가는 것을 크게 기뻐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이라면 대법관을 원하지, 큰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고, 임기 내내 구설수에 휩싸일 수 있는 인권위원장을 선호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의 내정을 수락했다. 아마도 대법관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현실적 판단 아래 차선의 기회를 선택 했을 것이다.


오늘 내 관심사는 그 피내정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은 왜 그리도 법률가, 그 중에서도 현직 판검사를 좋아할까.


<대통령은 체제 순응형 법률가를 좋아 한다>

대통령은 법률가를 좋아해도 절대로 반골기질의 법률가를 좋아하진 않는다. 오로지 체제 순응형 법률가를 좋아할 뿐이다. 그 이유는 이들 법률가는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고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체제 순응의 기질은, 법관이나 검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법률가에게서 공히 발견되는 특성이다. 내 자신이 법률가라, 이 말은 누워서 침 뱉는 격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사실 말하기 거북하다. 하지만 이젠 법률가들 스스로 이 어둔 구석을 들추어 내지 않으면 안 될 때다.


법률가들에겐 혼돈보단 안정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있다. 그것이 진보적 법률가 보다는 보수적인 법률가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법의 테두리 내에서 혹은 높은 권위 아래에서 일하길 좋아한다. 그들은 스스로 법을 창조할 수 없고 오로지 주어진 법을 집행하는 게 자신의 본분이라 생각한다.


이런 법률가는 아무래도 재야 변호사 중에서 보단 현직 판검사 중에 많다. 그것도 연륜이 있는 판검사일수록 그렇다. 30년 가까이 판검사를 했다면 그들은 정권이 뭘 원하는 지 잘 안다. 고등부장판사가 되고, 법원장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검사장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급의 고등부장판사 자리보다 그 수가 훨씬 적으니 동료 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이들이 출세하기 위해선, 법률가적 양심과 관계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체제에 순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체제 순응형 법률가가 유독 대한민국에 많은 것은 법학교육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법학교육의 뿌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교육자들은 식민모국에서 법학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체제를 비판하고 대항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우리 선배 법률가들은 법률을 배운 것이다. 그런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다. 비판적 법률가들은 그 수가 적었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지금 법학교육을 담당하는 대부분 교수들은 바로 그 체제 순응형 법학교수들의 후예들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과 같은 국기문란사건이 일어나도 법학교수들 대부분은 침묵한다. 그들은 오로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사법시험·변호사시험에 나올만한 대법원 판례나 헌재 결정례를 이야기할 뿐이다. 국정원 사건이 조만간 대법원에서 최종 판단되면 그때서야 그것을 가르칠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 초점은 수험 전략적 차원의 학습 이상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건이 터져도, 학생들에게 그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국기문란사건임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거기에서 키워진 법률가들이 후일 어떤 법률가가 되겠는가.


<한국정치는 사법통치 시대에 들어섰다>

지금 한국은 적어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는 아니다. 하드코어 독재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체제인 것은 분명하다. 실질적 민주공화국의 모습은 아직 요원하다. 권위주의적 체제가 총칼을 쓰지 않으면서 통치할 수 있는 가장 교묘한 방법은 사법권력을 손에 넣는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통치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비판적 여론을 잠재우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대통령은 얄밉게도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법부의 역할이 점점 증대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의도 정치의 실종과 관련이 깊다. 사회적 갈등을 정치가 해결을 못하니 종국적으로 사법부(헌재 포함)가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난 10년간, 우리 사법부는 몇 가지 사건에서, 정치권을 능가하는 막강한 힘을 보여주었다.


헌재는 노무현 탄핵, 행정수도 이전, 통진당 해산사건 등에서, 대법원은 각종 노동사건, 선거법 위반 사건, 국정원 사건 등에서 정권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법관이 누가 되느냐는 대통령 퇴임 후 안전과도 관련이 있다. 퇴임 대통령의 안위와 관련된 사건도, 종국적으론 대법원이나 헌재에서 최종 판단을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사법부(헌재 포함)에 자신의 뜻을 따라주는 판사들을 강렬하게 요구할 것이다. 더군다나 박대통령에겐, 대법원 구성을 완벽하게 자신의 페이스로 바꿀 수 있는, 헌정 사상 보기 드문 행운도 따른다. 재임기간 5년 동안 무려 10명(전체 14명)을 임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대통령이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가 없다.


또한 사법부 외의 기관이라도 대통령의 권위를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는 기관이라면 배신하지 않을 법률가를 앉히는 건, 설혹 비난을 받더라도, 대통령으로선 자연스런 선택일 것이다. 사법부 길들이기는 이런 심리구조에서 이 정권이 택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수순이다.


이상이 대통령이 판사(같은 맥락에서 검사)들을 중용하는 배경이다. 바야흐로 판사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엇일까? 우리 사법부의 조용한 죽음이다. 권력분립의 형해화(形骸化)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후퇴다. 그것들을 다시 회복하는 데 또 얼마나 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암울한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