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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샘에서 나온 물도 전혀 다른 목적지로 흐른다

박찬운 교수 2018. 10. 26. 04:50

같은 샘에서 나온 물도 전혀 다른 목적지로 흐른다



1986년 겨울 사법연수원 수료를 앞두고 설악산 여행을 갔을 때 동기생들과 함께 

 

어제 오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아는 기자가 영장발부 가능성을 물어 왔다. 나는 말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가 언론에 대고 그의 구속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임종헌, 그는 나의 사법연수원 동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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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글 하나가 생각 나 찾아보았다. 작년 3월 이정미 헌법재판관이 정년퇴임을 하는 날, 나는 이곳에 이런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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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정미 재판관이 퇴임했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임기 마지막에 대한민국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의 재판장이 되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국민의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결정문을 낭독하는 떨리는 음성은 많은 사람들 뇌리에서 오래 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 헤어 롤의 해프닝은 커리어 우먼에겐 오히려 자긍심을 주기에 알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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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1987년 사법연수원을 함께 수료했다. 우린 동기생이다. 젊은 시절 2년간 같은 공간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3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주변을 돌아보니 동기생 중엔 이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어쩜 지금이 그런 동기생들에겐 인생의 정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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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으로 간 동기생 중엔 대법관, 헌재재판관, 법무부장관(퇴임), 검찰총장, 경찰청장(퇴임), 법원장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재야 법조에선 여러 명이 이미 유명 로펌의 대표를 지냈거나 대표급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나와 같이 로스쿨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동기생 중엔 높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 학자로 이름을 내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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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탄핵사건과 특검수사에서 동기생들은 두각을 나타냈다. 탄핵사건에선 재판장이, 대통령 측 대리인단 속의 핵심 변호인들이 동기생들이었다. 특검수사의 하이라이트였던 삼성 이재용 부회장 뇌물사건에선 변호단의 간판변호사들이 다 내 동기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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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니 우리 중 여럿이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그 뭔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성공한 법조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이들 동기생들에겐 남다른 점이 분명 있다. 뛰어난 능력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그런 점에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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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동기생들의 이런 성공을 아직껏 크게 자랑하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개인적 성공 이상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성공은, 그저 위를 바라보며 성실이란 남다른 무기를 사용해,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고지를 점령하는 빼어난 경쟁력의 대가, 그 이상은 아니지 않았는가. 도대체 그 경쟁은 누구를 위해, 왜 하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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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지난 몇 년간 우리 동기생들이 이 사회 법조의 정점에 서 있을 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고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간 동안 대법관,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헌재재판관, 대형 로펌의 대표 변호사, 대학의 유명 교수로서 우리 동기생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반성할 필요는 없을까(이번에 이정미 재판관의 탄핵사건은 예외로 하자).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의, 공정, 민주주의, 법의 지배...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그 공직에서 무엇을 했는지 떳떳이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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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부끄럽지만 감히 부탁한다. 동기생들이여, 이제 후배들에게 그 자리를 넘겨줄 날도 얼마 안 남았다. 그 자리에 있을 동안 조금만 더 잘해주길 바란다. 당신들의 판단 하나하나는 혼돈 속에 있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희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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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창문 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자. 젊은 날 그렸던 풋풋한 꿈이 생각날 것이다. 동기생들의 이름을 내 강의실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다시 한 번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을 축하한다. (2017.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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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을 한지 1년 반 뒤 또 한 사람의 동기생을 연일 티브이에서 본다. 사법농단 사태가 끝날 때까지 그 이름과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 동기생들의 명암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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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샘에서 흘러나온 물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물길을 만들어, 언젠가는 전혀 다른 목적지에 도착함을, 오늘 아침 새삼 깨닫는다.
(2018.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