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겸산 최영도 변호사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1)

박찬운 교수 2018. 12. 16. 19:45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1)

-법률가를 넘어 시대의 지성을 추구하다-


이 글은 민변이 발간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111호(2018. 12) 인물탐구 코너에 실렸다. 긴 글이라 3편으로 나누어 이곳에 싣는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1938-2018). 판사로 봉직하다가 1973년 유신정권 시절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옷을 벗었다. 그 뒤 변호사로 인권변호에 힘썼고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민변 대표,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을 거쳐,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앙코르 티베트 돈황>, <토기사랑 한평생>, 클래식 음악 에세이 <참 듣기 좋은 소리>, 유럽미술관산책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가 있다.



이 글은 한 사람과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헌사다. 겸산 최영도 변호사(이하 선생이라 호칭함, 이것은 존경의 염을 담아 부르는 경칭임). 선생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 어떻게 소개하는 게 좋을까. 69일 선생이 갑자기 타계한 뒤 내가 신문에 쓴 추모의 글을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시작한다.


“변호사님은 1970년대 초 폭압적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재야 법조인이 되어 인권변호사로 외길을 걸으셨습니다. 민변 회장과 대한변협 인권위원장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옹호에 앞장섰고,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맡아서 인권문제를 시민운동의 지평으로 확장시켰습니다. 국가인권위 시절엔 저도 인권정책국장을 맡아 함께 힘을 보탰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님의 삶을 법률가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님은 법률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인적 지식인의 풍모를 한껏 발휘한 분입니다. 참된 지식인이라 함은 자신의 주업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와 정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런 지식인은 생업과 관련된 공부만이 아니라 문학·역사·철학·예술을 공부합니다. 제가 아는 변호사님은 법조계에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에서, 그런 향학열을 누구보다 뜨겁게 품고 사셨습니다. 후배 법조인들에게 부족한 인문학적 향기를 물씬 풍겨주신 분이었습니다.(2018. 6. 12.자 한겨레신문 추모의 글)

 

선생은 이렇듯 법률가이면서 그것을 뛰어넘은 삶을 살아온 이 시대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내가 법률가가 된 이후 몇몇 선배 법률가가 롤 모델이 되었지만 선생만큼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없다. 비록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가가 된 나지만 선생같이 고상한 풍모를 지닌 법률가로 성장하고 싶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밤을 새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예술을 알고, 문명의 발상지를 찾아 세상을 주유하는 멋진 여행가가 되고 싶었다. 그것이 과연 당대에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면이 있는 사람에게 끌리는 법이다. 내가 선생을 좋아하고 따르게 된 데에는 분명 선생과 내가 뭔가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일 게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호기심이다. 선생은 연세가 팔순에 들어서도 끊임없이 지식을 찾아 밤을 새우셨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기셨다. 호기심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외람스럽지만 나 또한 그렇기에, 새벽을 깨워 책을 읽고, 틈나는 대로 배낭을 둘러맨 채 세상을 주유한 뒤, 글을 써 왔다. 선생이 쓰신 책 한 권을 읽으면 나도 언젠가 그런 책을 쓰겠다고 결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남다른 어린 시절

선생은 1938121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부친 최경진과 모친 김상옥 사이의 336남매 중 넷째로, 아들로는 둘째로 태어났다. 부친 최경진은 1930년대 서울에서 중천상회라는 사업체를 세워 조선, 일본, 만주에 걸쳐 비료와 농기구를 도매업을 하였다니, 선생은 지금 말로 하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셈이다. 하지만 부친 최경진은 배일사상이 강했고 매우 비판적인 지식인이었으며 불의에 타협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7순이 넘었지만 아들, 손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 대열에도 참여하였다니 그 인물 됨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이런 부친 아래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해방이 되는 해 일제의 소개령으로 큰댁과 외가가 있는 개성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다섯 달 뒤 8.15 해방을 맞는다.

 

나는 어설픈 인간 결정론을 믿지 않는다. 사람은 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자연적 불평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할 일이 없다. 아무리 노력한들 무엇하랴,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하지만 어린 시절 성장배경이 평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엔 토를 달고 싶지 않다. 주로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이 성장배경이,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당위로 인해, 퇴색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선생의 어린 시절은 그 시대 평균적인 대한민국 사람과는 사뭇 달랐다. 선생이 한평생 법률가를 넘어, 특별한 심미안을 갖고 예술을 좋아한 것은 서울 장안의 어느 명문가에서도 보기 힘든 가풍과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선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선생의 말씀을 직접 옮겨보기로 한다.

 

”나는 (또한) 비교적 예술 친화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선친께서는 1948년 서울 장충동에 처마가 높이 솟은 기와집을 짓고, 미산 황용하의 석란도 열여섯 폭으로 방을 도배하셨다. 그리고 백단향을 피워 놓고 녹차를 음미하며 한시를 읊으시고, 노장 철학에도 심취하셨다. 내 이름의 도()자도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그런 멋쟁이 아버지 손을 잡고, 1949년 제1회 국전부터 미술전람회와 서화전을 관람하면서 자랐다. 1954년 보성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백부님이 근무하시던 국립박물관에 자주 가서 백부님의 제자인 최순우 과장님의 호의로 국보급 문화재들을 눈에 익혔다. 1955년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우리나라1세대 서양화가의 한 분인 청구 이마동 화백의 서양미술사와 동양미술사 강의를 들었다. 고등학교에서 동서양미술사를 가르친 경우는 아마 보성 말고는 없을 것이다. 또 학교법인 이사장 간송 전형필 선생께서는 매년 개교기념일에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어 국보급 도자기와 서화를 보여 주셨다. 비록 전시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이런 환경과 체험이 나를 미술에 일찍 눈뜨고, 석불사와 불교미술에도 쉽게 빠져들게 했던 것 같다. 그런 성향이 중년기 이후에는 미술사학을 새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잔타에서 석불사가까지’ 16-17)

 

이렇게 선생은 학교도 가기 전 코흘리개 시절부터, 예술을 아는 선친을 통해, 미산 황용하(개성 출신으로 사군자에 뛰어난 당대의 화가)를 알았고, 국전 전람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고교(보성고등학교) 시절 이후엔 문화재 애호가로 유명한 간송 전형필 선생과 우리의 문화재를 한국적 미학으로 설명한 최순우 선생을 통해서 수많은 국보를 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은 소년의 뇌리에 박혀 그 후 60년 세월을 남달리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말씀을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 여러 차례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들을 때마다 감탄했고, 솔직히 부러웠다. 식민지를 경험하고, 전쟁의 참상을 목도했음에도, 이런 남다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게 모두 조상의 음덕 때문이었을까? 여기에다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연민까지 느끼며 평생을 살아온 선생. 내가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선생의 모습은 내 연구실 서가의 초상화 주인공인 영국의 현인 버틀런드 러셀(1872-1970)과 중첩된다. 나는 러셀을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다. 그는 대영제국의 수상이자 백작의 손자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아 수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일세를 풍미했지만, 또 한편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으로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지식을 추구하면서도 철저히 사랑을 실천했던 러셀... 나는 선생의 삶에서 러셀의 그림자를 진하게 느낀다.


1차 사법파동의 주역이 되다

선생은 대학을 졸업한 1961년 치러졌던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함으로써 법조인의길을 걷는다. 당시 상황은 박정희 소장에 의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정국은 몹시도 혼란했다. 1962년 군에 들어가 육군법무관이 되어 3년 만기 제대를 한 후 1965년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판사로서 법관생활을 시작한다. 같은 해 선생은 평생의 반려 신청자 여사와 결혼한다. 신혼의 판사가 천안, 대전, 수원, 서울을 전전하며 판사생활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다. 더욱 그 시절 판사의 월급은 지금과도 많이 달랐던 터라 선생으로선 여유 있는 삶을 꿈꾸기 어려웠다. 분유 값이 없어 고생을 하던 시절이라 취미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선생이 말하는 이 당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판사 월급으론 도저히 먹고 살기 어렵다고 생각해 부업이라도 해서 살림에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부친으로부터 사업자금을 받아 동료 판사와 양돈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뻔한 일 아니겠는가. 1년이 안 돼 투자금의 대부분을 까먹고 손을 뗐다. 지방판사를 하면서 판사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웠지만 조금씩 판사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생긴 여유시간은 독서에 투자했다. 60년 대 말 선생이 즐겨 읽었던 책들은 주로 서양 고전. 을유문화사 판 세계사상교양전집을 애독했는데, 그 중에서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플라톤의 <향연>, 루소의 <사회계약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파스칼의 <팡세>가 그 당시 선생이 읽었던 독서목록에 포함된 책들이다. 이런 독서 중 어느 날 운명적으로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한국과 그 예술>(박재삼 역)이라는 책을 만나게 된다(이에 대해선 후술).

 

1971년 선생은 서울형사지방법원 단독판사로 일한다. 선생 일생에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사법부에 일대 회오리바람이 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제1차 사법파동이라고 부른다. 선생은 바로 이 광풍의 한 가운데서 그 주역이란 쓴 잔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 파동의 시작은 그해 7월 검찰이 서울형사지방법원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에 대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제주에 검증 차 출장을 갔다가 변호사가 대접하는 소주를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말린 표고버섯 한 포씩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이 뇌물수수의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공안부 검사 김종건과 이규명이 경찰 형사를 시켜 제주까지 미행을 해 들춰낸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명목일 뿐 정권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사법부를 완전히 길들이기 위한 공포정치의 일환이었다. 이것을 모를 리 없는 선생과 동료판사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자명한 사실. 당장 37명의 판사들이 사표를 쓰고 대법원장 면담을 요구했다. 선생은 이 때 후일 사법부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사법권독립침해사례를 문서로 작성했다. 홍성우 판사 등과 대법원장을 만나 그간의 사법권 침해사례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만나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 관련자를 해임시킬 것을 요구하라고 건의했다. 이런 것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의를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태로 정권에 부담되는 판사들 면면이 확인되었고 그들은 바로 이어진 유신헌법 시행과정에서 법복을 벗어야 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당시 상황을 선생이 써 놓은 기록에 의해 직접 들어보자.

 

1971년 사법파동 당시 선생이 작성한 사법권독립침해사례와 그 여파로 법관 직을 사직할 때 쓴 사직원


1973 3월 법관 임면권을 대통령이 대법원장으로부터 빼앗아간 유신헌법의 시행으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행한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해 해직판사가 되었다. 3 22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어떤 법조 출입기자 한 명이 판사실로 헐레벌떡 찾아와, 제퍼슨이 누구냐고 물었다. 제퍼슨은 미국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게 아니고 사법파동 때 ‘사법권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누구냐고 했다. ‘사법권독립서’는 아니지만 ‘사법권독립침해사례’는 내가 썼다고 하자, 그는 그것을 쓴 판사가 이번에 재임명에서 탈락됐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사법파동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무죄 판결과 구속영장 기각률도 가장 높았으므로 검찰에 미운 털이 박혔다더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법원장이 내게 재임명 탈락 사실을 통고하며 사표를 내라고 종용했다. 나는 3 31일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를 내지 않더라도 4 30일이 되면 유신헌법 부칙에 따라 자동해직이었다.(토기사랑 한 평생, 31-32)

 

인권변호사...민변회장...국가인권위원장, 인권증진에 노력하다

선생은 19733월 정들었던 법원을 뒤로 하고 재야로 나온다. 선생의 연고는 서울이었지만 당시 변호사 개업지 제한 때문에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못하고 초임지인 천안으로 내려가 개업한다. 이 당시 변호사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후배들은 70년대 혹은 80년대의 변호사의 모습을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사법시험을 1984년에 합격하고 법조인의 삶을 시작한 터라 선배들의 모습과 그들의 무용담(?)을 직접 보고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변호사는 특권계급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이 말은 그 즈음 일본변호사들이 써 놓은 글에서도 여기 저기 발견된다. 그들이 한국 변호사들을 만나면 일본 변호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 그리고 사는 모습이 일반 서민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선생의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1975년 서울로 사무실을 옮긴 선생의 삶은 여유가 있었다. 실력 있는 변호사니 사건이 없을 리 없고 당연히 수입도 좋았다. 선생의 고상한 취미생활이 시작되었고 (뒤에서 말하는) 사라져가는 토기를 수집한다. 그러나 선생이 매일같이 살던 시대는 한 인간의 고상한 삶을 그대로 놓아두지는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민주주의 유린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달려갔고 마침내 1979년 암살이라는 비극을 맞이한다. 1980년의 봄은 모든 이의 가슴을 한껏 부풀게 만들었지만 역사가 알려준 대로 새로운 비극이 잉태하고 있었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출현!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후퇴하여 수많은 인권유린사태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벌고 고상한 취미생활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선생을 필요로 하는 이 땅의 양심수들의 신음과 고통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시국사건 변론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전두환 정권은 수많은 학생과 시민을 구속하고 그들을 빨갱이로 몰아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1980년대는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시국사건이 쏟아진 시기다. 그러니 당연히 인권변론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상황에서 그 동안 당국의 탄압을 피해 조직체계도 없이 각자 개별적으로 정치범과 양심수들을 변론해 오던 변호사 30여 명은 19865정의실천법조회(정법회)를 발족시킨다. 그리고 이어 19885월 정법회는 진보적인 소장 변호사들로 구성된 청년변호사회(청변)와 통합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창립한다. 선생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법회와 민변 창립에 참여했고 종교단체나 가족들로부터 들어오는 시국사건을 배당 받아 그 변호에 매달린다. 그리고 몇 년 뒤 92년엔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이 되어 변협 차원의 인권보호에 매진한다.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 시절 선생이 직간접으로 변호하고나 관여한 시국사건은 셀 수 없이 많다. 선생이 직접 기록한 것을 토대로 간단히 사건명만 언급해도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지만 여기에 그 일부를 기록한다.

 

198653일 발생한 세칭 5.3 인천소요사건 연세대 김수영 등 변호

19871애학투사건 서울대 미학과 이승문 변호(국보법 위반)

19876월 세칭 ML당 사건 서울대 사회학과 최형두 변호(국보법 위반)

19883반미청년회사건 고려대 철학과 안희정 변호(국보법 위반)

19928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으로서 피의자 김낙중에 대한 안기부의 접견거부처분에 대해 인권침해라고 성명 발표 및 불법체포 감금죄로 수사관 고발


선생이 국가인권위원장 시절 나는 인권정책국장으로 일했다. 선생 왼쪽은 당시 사무총장으로 일한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


 인권변호사로서 선생의 전성기는 90년 대 중반 이후 민변의 대표가 되고 나서부터일 것이다. 선생은 19966월 민변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민변의 역할을 시국사건 변호를 넘어 양심수 석방 사면, 반민주악법개폐, 인권침해실태조사, 시민사회와의 연대, 국제인권단체와 교류와 연대사업 등으로 확대해 나갔다. 98년엔 회장을 연임함으로써 4년간 한국 최대의 인권변호사 모임을 이끌었고, 참여연대, 민노총 등과 함께 한국인권단체협의회를 만들어 상임공동대표로서 각종 인권현안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주역이 된다. 민변 회장 기간 중 선생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독립적인 인권기구를 설립하는 것. 선생은 982월 한국인권단체협의회 대표로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 대통령공약사항이었던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꼭 이루어달라고 간곡히 요청한다. 그러나 이 작업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법무부는 인권위를 그 산하에 두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독립기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권단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권법 제정 및 국가인권기구 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선생은 공동 상임대표를 맡게 된다. 당시 상황을 선생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권위원회를 법인체로 만들면 필연적으로 주무관청인 법무부장관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고, 그런 법무부 산하의 민간기관은 검찰의 인권침해를 제대로 감시하고 조사하고 시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권위원회는 반드시 어느 행정부서에도 속하지 않는,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된 국가기구여야 하며, 정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2 8개월에 걸친 길고도 험난한 투쟁이 시작되었다.(토기 사랑 한평생, 75-76)

 

당시 공대위의 투쟁은 처절한 지경까지 갔다. 혹한의 계절에 명동성당에선 천막농성에 들어가는 사태까지 발생했으니 말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015월 인권위법은 마침내 국회를 통과하고 그 해 말 역사적인 설립에 이르게 된다. 비록 공대위의 주장이 완벽하게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 주요 인권기구 중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만큼 독립적이고 규모 있는 기구를 발견하기 어렵다. 적어도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인권위 설립과정에서 보여 준 헌신성과 역량은 그 후 노무현 정부에서 제2대 인권위원장으로 임명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제2편으로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