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겸산 최영도 변호사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2)

박찬운 교수 2018. 12. 16. 19:59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2)

-법률가를 넘어 시대의 지성을 추구하다-


용산중앙박물관 내 겸산 최영도 전시관. 나는 2018613일 선생의 발인 다음 날 박물관을 찾아갔다. 전시실 내엔 박물관에서 마련한 조화가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위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겸산 최영도 관 모습, 아래는 전시품 중 하나인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뼈단지>. 선생은 1983년 이 토기를 구입하는 데 거의 작은 집 한 채 가격의 돈을 지불했다.


한 평생 토기 사랑, 아낌 없이 사회에 환원하다

용산중앙박물관을 가면 상설전시관 중 기증전시관에서 겸산 최영도 관을 만날 수 있다. 선생은 30여 년간 모은 토기 전량 1,719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법률가 중에 예술을 탐미하는 사람이 꽤 있다. 그 중엔 고가의 서화나 도자기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 수집품은 무엇일까? 그 대부분은 수집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그의 재산이다. 때가 되면 후손들에게 상속될 것이니 부의 세습의 방편이기도 하다. 선생의 예술품 수집은 그런 용도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을 것이다. 도대체 선생은 무슨 이유로 그 많은 토기를 모았으며 그것을 왜 국가에 기증했을까? 선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만약 내가 토기를 수집하지 않고 그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했더라면 아마 꽤 큰 빌딩 같은 것을 가지고 노후를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나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높은 관직에 올라 출세한 친구도, 큰돈을 모아 부자가 된 이웃도 부럽지 않다. 이 세상에 와서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과 스승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열과 성을 다해서 모은, 자식처럼 사랑하던 토기들을 몽땅 국립중앙박물관에 두고 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하늘의 은총이 어디 있으랴.(‘토기 사랑 한평생’ 서문)


선생은 2011년 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증자 축제에 참석해 당신이 토지수집을 하게 된 계기와 기증 문화에 대해 공개강연을 한 바 있다. 이 강연에서 선생은 토기를 모은 사연과 그것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과정을 진솔하게 말했다. 토기수집가로서의 선생을 이해하는 데 이만큼 좋은 자료가 없을 것 같다(이 자료는 선생 사후 유품 정리 도중 발견한 것으로 선생의 차남 최윤상 변호사가 필자에게 보내 온 것임). 강연의 한 부분을 가감 없이 여기에 옮긴다.


1983 1월 어느 날 고미술시장에서 알게 된 토기수집가가 제게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한 사이에 한국 토기는 외국인들이 수집하여 다 가져나갑니다. 우리가 토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토기박물관을 하나 만듭시다” 저는 그 말에 크게 깨달아 토기박물관 설립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선 프랑스 외교관이 가져가려던 백제항아리를 하루 전에 빼돌려 해외 유출을 막고 본격적인 토기수집에 들어갔습니다. 시간과 돈이 아까워 골프와 고급식당 출입을 끊고 오로지 토기만 쫓아다니다 보니 주위 친구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습니다. 토기 몇 점은 당시 거의 작은 집 한 채 값씩 주었고, 제 수입의 거의 반 이상이 토기 수집에 들어갔습니다. 1999년까지 토기 1500여 점을 수집했습니다. 그러나 재단법인 설립, 박물관 부지 매입과 건축비용, 박물관 유지재원 마련은 제 능력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박물관 설립을 포기했습니다. 그 뒤 토기들을 수집목적에 합당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길을 건너 가다가도 만약 여기서 차에 치어 죽으면 토기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를 걱정했고, 해외여행을 떠날 때는 돌아오지 못하면 대학이나 공공기관에 무상으로 기증하라는 유언장을 써서 자식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마치 과년한 딸을 빨리 출가시키고 싶은 아비와 같이 초조해 하였습니다. 대기업 오너에게 무상으로 기증할 터이니 박물관을 설립해 운영해 달라고 했으나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화관광부장관에게 같은 내용의 정책건의를 했지만 접수한 지 6일 만에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통지서를 보내더군요. (그러던 중)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의사를 타진해왔습니다. 저는 망설이다가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기증품을 지하수장고에 넣어두지만 말고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쯤 전시품을 교체해 달라는 것, 둘째 기증유물 전품 도록을 만들어 박물관, 도서관, 대학 등에 배포하여 토기연구자들에게 자료로 제공해 달라는 것. 위 조건은 흔쾌히 수락되었고 저는 그해 5 12일 국립중앙박물관에 토기 1578점을 무상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저는 제 수집품을 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트럭의 토기가 집에서 실려 나가던 날 저는 텅 빈 수장고에 서서 이제 무거운 관리책임에서 벗어났구나, 무엇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속박이구나, 다주고 나니 자유롭구나, 그리고 무한한 해방감이 찾아왔습니다. 시원해서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1 5 7일 제 기증사실을 공표하고 기증문화재전을 개막했습니다. 저는 그 후에도 수집을 계속해서 2008년까지 총 6차에 걸쳐 1719점을 기증했습니다.(2011 12 5일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자 축제 ‘아름다운 만남:기증작품 특별전’ 강연원고 중에서)


선생은 이런 기증을 하면서 어떤 대가도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하나 선생이 바란 것이 있다. 선생은 위 연설 마지막에서 기증자로서 미술관에 이런 부탁을 한다. 듣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하는 말이다.


“기증자는 자기 애장품을 가장 잘 보존하고 국민에게 오래오래 보여주리라 믿고 국립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입니다. 미술관이 애정을 가지고 기증품을 관리해주시면 기증자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부디 ‘기증품에 사랑을 듬뿍 주십시오’ 듬뿍!

(위’ 강연원고 중에서)

 

선생의 필생의 역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표지 아잔타 1굴의 연화수보살(), 석굴암 본존불(아래), 이 두 걸작이 선생이 반백 년간 발로 쓴 불교기행의 최종결정판이다. 하나는 불교 발상지인 아잔타에서, 또 하나는 동쪽 끝 경주 석불사에서 만난 것이다.



 세계문명 여행가...불교미술 기행가, 필생의 역작이 탄생하다

선생은 1980년 초부터 30여 년간 틈만 있으면 한국을 떠나 세계 곳곳의 문명을 찾아 헤맸다. 사진기를 들고 찾아간 곳을 세밀하게 촬영하고 다녀온 다음엔 밤새 정리해 글을 남겼고 그것은 몇 권의 책으로 남아 우리를 지적으로 자극한다. 선생은 어떤 자세로 기행문을 썼을까?


”나는 내 경험을 통하여 ‘모든 사물은 아는 보인다. 모르면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하면 좋은 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행문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여행 목적지의 지리와 역사, 그곳 문화유산의 미술사적 배경과 의의 등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많이 전달하기 위해, 나의 개인적 감상이나 문학적 수사 같은 것은 가급적 절제하고, 주지주의적이고 인문학서 같은 성격의 기행문을 써 내려갔다.(‘토기 사랑 한평생’, 108-109)


선생의 문명 기행여정은 실로 찬란하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남미와 아프리카로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특별히 천착한 것은 불교문명을 탐구하기 위한 기행!(고로 이 글에선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아잔타, 엘로라, 바간, 앙코르, 티베트, 둔황 막고굴, 용문석굴, 중국 시안과 뤄양, 일본 교토와 나라 그리고 실크로드... 선생이 찾은 여정의 일부다. 선생의 말씀대로 그것은 불교미술의 순례이었고, 불교의 동점에 대한 추적이었다. 그 결과 선생은 불교미술이 그 발상지를 떠나 동쪽 끝 경주 석불사(석굴암)에서 위대한 예술적 정점을 이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나는 그 여정을 이 제한된 지면에 소개할 능력이 없다. 선생이 감상한 수많은 불상과 사원 그리고 불화를 일목요연하게 전달할 능력은 더욱 없다. 그 여정의 일단이라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선생의 필생의 역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기파랑)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 책장을 넘기며 그 속에 있는 400장에 가까운 도판을 직접 본다면 선생의 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선생이 그 책에서 남긴 몇 마디 말을 통해, 선생이 어떤 분인지, 그가 무슨 이유로 불교미술에 천착해 수십 년 간 문명기행을 해왔는지를 독자들에게 전할 뿐이다. 그 정도만 해도 선생의 삶과 그의 심미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하루라도 빨리 이 책을 주문해, 책장을 넘기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리라 믿는다.


선생이 다니신 불교미술유적지 여정(지도상 붉은 점과 그것을 잇는 선)


 적지 않은 세월 선생과 인연을 맺고 살아오면서 나는 인간 최영도란 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역시 그의 박식함이다. 선생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나 같이 평소 말 많은 사람도 말 수가 적어진다. 괜히 고수 앞에서 밑천을 빨리 드러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생은 어느 자리에서도 예술과 여행에 관해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강의를 할 수 있는 분이다. 그의 기억력은 비상해서, 이름, 지명, 연도를 정확히 기억해낸다. 사실 나도 자랑을 조금 하면, 매우 폭넓은 지식을 가지려고, 누구보다 노력한 사람인데... 선생 앞에선 한마디로 고양이 앞의 쥐였다. 기본적으로 선생은 호학자다. 이런 분이 불교미술에 필이 꽂힌다면 당대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그 계기인데.... 하필 그 많은 예술 분야 중에서 왜 불교에 심취했을까. 그 단초를 연 것은 젊은 시절 경주에서 본 석불사였다. 석불사는 선생에게 불교미학의 출발이었고 종점이었다.


2017년 말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던 최영도 변호사님의 저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출판기념회, 왼쪽은 이덕우 변호사. 나는 이 기념회에서 사회를 보았다.



선생이 불교미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뜻밖에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저명한 종교철학자이자 예술평론가이고 민예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그가 쓴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라는 글은 선생에겐 가히 충격이었다. 60년 대 후반 판사 시절 우연히 만난 야나기의 이 글에서, 그의 석불사 독법을 발견한 선생은 자신을 이렇게 한탄했다.


“야나기 선생은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그분의 눈은 금강석으로 만든 혜안이었고, 내 눈은 진흙으로 빚은 허접한 눈깔이었단 말인가!"(‘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14)


이 때 선생은 담대한 도전을 한다. 석불사의 미학을 스스로 완성하리라, 보편 불교미학에서 석불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내 손으로 직접 알아보리라. 그렇게 해서 반 백 년이 넘는 그의 불교문명기행이 시작되었다. 약간은 여담이지만, 내가 문명기행을 하고, 잡문이지만 문명기행기를 써온 데에는, 선생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선생이 야나기 무네요시를 통해 불교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선생의 실크로드 기행 중 둔황 편을 보면, 그곳 명사산과 월아천에 대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금까지 본 경치 중 어디가 가장 아름답던가?“라고 친구가 물으면, ”둔황의 명사산과 월아천이었다네.“ ”그까짓 사막이 뭐 그리 아름답겠나?“ ”자네, 사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 적이 있나? 그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네. 직접 가서 느껴 보게.“ 라고 대답하겠다.(‘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208)


나는 이 이야기를 20여 년 전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그 날부터 나는 실크로드 기행을 꿈꿨고, 드디어 8년 전인 20107월 첫 번째 기행(시안-우루무치 구간)에 도전했다(2015년 여름엔 두 번째 도전으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가는 우루무치-카슈가르 구간을 다녀왔음). 한 여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기온은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오후, 선생이 말씀하신 천하 제1경 둔황의 명사산에 올라, 월아천을 바라다 볼 때의 그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이 반백 년 불교문명기행은 석불사에서 시작해, 인도 아잔타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동진하여, 다시 석불사로 돌아오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통해 선생이 내린 결론이 무엇일까? 이 부분도 사설을 늘어놓을 필요 없이 선생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게 좋을 것이다.


“석불사를 설명하는 부분. "그동안 내가 자바의 보로부드르, 인도의 아잔타 ... 등 많은 불교유적들을 탐사하게 된 것은 어쩌면 내가 석불사를 알게 되고, 불교미술의 동점과 석불사의 연원을 캐 보고 싶어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세계적인 대형 문화유산을 둘러보고 나서는, 그때마다 우리 석불사가 비록 규모는 작지만 세계에서 으뜸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것은 결코 국수적인 생각이 아니라.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해도 그렇다는 말이다."(541)


“석불사는 보로부드르나 앙코르 와트처럼 크지도 않고, 바간이나 막고굴처럼 많지도 않으며, 시슈 마할이나 타지 마할처럼 사치하지도 않고, 카일라사나 포탈라처럼 위압적이지도 않다. 또한 백성들을 오랜 기간 가혹하게 착취한 반인권적이고, 비종교적인 산물도 아니다. 석불사는 참배자가 붓다를 예배하기에 쾌적한 거리와 높이, 넓지도 좁지도 아니한 가장 이상적인 규모로 조영되었으며, 그 안에 붓다를 위시하여 신중과 인왕, 천왕과 천부, 보살과 제자가 알맞은 구성과 크기로 조각되어, 조화롭고 주도면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석불사는 인도의 간다라 마투라 굽타 미술이 실크로드를 타고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들어와, 동과 서의 예술이 서로 어우러져, 탁월한 예술적 기량을 뽐내어, 붓다의 드높은 정신세계를 펼친 것이니, 이를 어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나고 가장 위대한 예술문호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한평생 추구하고 지구 반 바퀴를 답사하고 돌아와, 공정한 눈과 객관적인 잣대로 내리는 결론이다. 이런 위대한 유산이 우리 조상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또 오랜 세월 온전하게 보전되었으니, 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여정을 마치며, 583)


여기에 무엇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 미학을 겸비한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 반백 년 발로 쓴 순례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는 석불사에 대한 평가이다.(제3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