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겸산 최영도 변호사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3)

박찬운 교수 2018. 12. 16. 20:06

겸산 최영도 변호사는 누구인가(3)

-법률가를 넘어 시대의 지성을 추구하다-



음악감상가... 평생 음악을 듣다

미술 애호, 토기수집, 세계 여행과 더불어 선생이 몰입했던 취미는 클래식 음악감상이었다. 선생은 돌아가기 직전까지 기회가 될 때마다 가까운 지인을 자택으로 불러 음악감상을 함께 하셨다. 손님을 초대하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선곡을 하고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 놓은 다음 음악을 틀기 전에 곡의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하셨다. 나도 선생의 초대로 그 모임에 가 본 적이 있는데, 음악을 모르는 나로서도 격조 있는 선생의 설명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오래 전일 것이다. 내가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다. 변호사님, 어떻게 해서 음악감상을 취미로 하게 되었습니까.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 아닌가요? 선생은 대학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 한 토막을 들려 주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게 1957년인데, 그 때 종로에 음악감상실 ‘디 쉐네’와 ‘르네상스’라는 곳이 있었소. 입시가 끝나고 기분을 달래기 위해서 그런 곳을 들락날락했지.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 가보니 동급생 어머니가 명동에서 ‘돌체’라는 음악감상실을 하는 것이야. 그 덕에 거길 자주 다녔지. 거기 가면 도련님 친구라고 무료 입장에 특별 대우를 받았어요. 당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모든 게 궁핍한 시절이야. 서민들에겐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 게 고작이었지. 그런 상황에서 고급 앰프와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꽝꽝 울려대는 클래식 명곡을 들으니 완전히 뿅 갔던 것이지

 

선생은 평생 어지러워진 머리를 식힐 때 음악을 들었다. 물론 선생의 주지주의적 성향은 음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단지 듣고 즐기는 수준이 아니라 음악의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취미도 여간이 아니었다. 그 결과 2007년 선생의 음악 에세이 책 <참 듣기 좋은 소리>(학고재)가 세상에 나온다.


선생의 유고작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보정판)

 

최고의 심미안...미술감상가로 생을 마감하다

지난 9월 어느 날 연구실로 소포가 배달되었다. 책이었다. 보낸 이의 이름을 보자마자 내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나왔다. , 그 책이 나왔구나. 선생의 유고작 서양 미술관 순례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보정판)>(기파랑)가 나온 것이다. 나는 선생의 장례 식장에서 상주 최윤상 변호사로부터 선생의 마지막 작업을 듣고 눈시울 붉혔었다. 최윤상 변호사는 책과 함께 노란색 간지 한 장을 책 표지 뒤에 넣어 보냈다. 옮겨 적으면 이렇다.

 

“아버님께서는 입원 직후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고 병상에서 이 책 서문을 육필로 쓰셨습니다. 이어 저에게 책 출판 과정을 대신 챙겨줄 것과 책이 나오면 꼭 보내드려야 하는 분들을 일러주셨습니다....아버님의 유지 중 하나를 받들어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아들로서 홀가분한 마음입니다.

 

선생의 마지막이 눈에 선하다. 병상에서 꺼져가는 자신의 운명을 안채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한 노인의 모습. 그것은 성실한 모습을 넘어 경건한 자세이고, 경건함을 넘어 종교적이다. "변호사님, 영면을 기도합니다!"

 

선생은 병상에서 이 책 보정판을 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2011, 10년간 다듬은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되자 매우 기뻤다. 그러나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초판의 원고가 재교 때까지 458쪽이었는데, 스스로 88쪽 분량을 덜어내어 370쪽으로 줄인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인문서는 350쪽이 넘으면 독자들이 부담을 느낄 것이라고 지레 판단하고 내 피와 살같이 소중한 원고를 덜어낸 것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으면 보정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17 11월 나의 다섯 번째 저서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가 출간된 직후, 적적하여 곧 이 책 보정판을 쓰기 시작했다. 초판에서 덜어낸 부분을 회복하고 수정하고,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바티간 미술관을 새로 붙여, 이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제외한 유럽의 대형 미술관들은 다 섭렵한 셈이 되었다... 2018년 서울 강남의 어느 병원 병실에서 정관헌 겸산 최영도”(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제1권 보정판을 내면서)

 

이 서문을 보면서 마음이 짜릿했다. 2011년 초판을 내실 때 저런 사정이 있었구나. 독자들의 읽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면수를 일부러 줄였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피와 살같이 소중한 원고가 잘려 나가는 아픔을 느끼셨구나. 글자 하나하나가, 한 문장 한 문장이 피와 살이라니! 그리하여 이번에 나온 새 책은 선생의 그 살과 피가 회복되는 보정판이다. 거기에다 두 개의 미술관(바티칸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을 추가해 전부 10개의 서양 미술관 순례가 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 전부를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파리 루브르·오르세·오랑주리·마르모탕 미술관, 피렌체 피티 미술관과 우피치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런던 내셔널 갤러리, 바티칸 미술관.

책은 두 권 621. 변호사님의 피와 살 같은 원고가 무려 250여 쪽이 추가 된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서양미술관에 관한 책이 제법 있지만, 이 책만큼 꼼꼼하고 박식하고 정성이 가득 차고, 성실을 넘어 경건하기까지 한 책을 발견하긴 힘들 것이다. 이런 책이 미술 전공자가 아닌 법률가에 의해 집필되었다니...놀랍지 않은가?

책의 구체적 내용은 이렇게 짧은 글에선 소개하기 어렵다. 수많은 도판이 들어간 미술 관련 책은 직접 보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도 더욱 감동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소개는 가급적 삼가고자 한다. 다만 선생이 어떤 마음을 갖고 평소 서양 미술을 대했는지 그것을 잠시나마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 책 초판 서문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내가 선생에게 이렇게 질문할 테니 선생의 답을 들어보자.

 

우리는 왜 미술품에 매혹됩니까? 변호사님은 어떻게 그림 공부를 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왜 미술품에 매혹되는가? 그 속에 자연과 역사, 예술과 문화, 종교와 철학, 이상과 현실이 모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78년 나는 내 미술 편력에 큰 영향을 끼친 책 한 권을 만났다. 일본 교토대학교 교수 다카시나 슈지가 쓴 <명화를 보는 눈>이었다. 그 후 그 책은 나의 회화 감상 지침서처럼 되어 유럽에 갈 때마다 가지고 가서 여러 미술관과 미술관의 그림들을 감상하였다.(‘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 제1권 초판 책 머리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데, 그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미술사나 미술 감상에 관한 국내외 서적들을 탐독하여 소양을 넓혀 나갔다. 회화작품을 대할 때, 주제나 유파적 특징, 작품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 화가의 생애와 사상, 더 나아가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까지 찾아가며 회화 탐구에 깊이 천착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씩 느끼게도 되었다. 그러면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초판 책 머리에)

 

유럽의 미술관에 가면 수백 수천의 작품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 보면서 느낄 수 있습니까?

 

“수백 점, 수천 점씩 전시되어 있는 큰 미술관에서 다 보려고 욕심을 냈다가는 미술관을 나올 때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미술 감상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아무리 큰 미술관이라 하더라도 20점 이내의 작품만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초판 책 머리에)

 

선생의 미술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한 마디만 더해야겠다. 서양미술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두 권의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미술과 기독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미술관에서 기독교 속에서 이해되는 수많은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고 찬미한다. 그러나 어떨 때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선생이 기독교인으로서 항상 고민한 문제의식이었다고 본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한 곳을 찾아보자. 2561쪽이다. 선생이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온 뒤의 감상을 적은 것이다.

 

“하느님의 집은 과연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해야만 했을까? 율리우스 2세를 비롯한 교황들은 왜 그렇게 허세를 부리고 과시적이었을까? 성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미술관을 다 보고 난 내 감상은 그랬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이다. 고통 받는 이의 눈물을 그 사랑으로 닦아 주고, 죄지은 자를 회개시켜 그 영혼을 구해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그런 교회가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무지한 신자들의 주머니를 털고, 성직을 매매하고 면벌부까지 팔아 가며 이렇게 사치스러운 궁전을 만들어야 했나? 그런 행태가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고,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수천 병력이 쳐 내려와 로마 시민의 절반인 2 3천여 명을 학살하고 약탈과 강간, 예술품 훼손을 자행하는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1981년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파티마 성모의 교회’에 갔던 감동을 잊지 못한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의 한 사람인 오스카 니에마이어의 대표작이라고 해서 찾아 갔는데, 도무지 작고 초라해서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곧 ‘그래, 바로 그거다! 이게 그리스도의 정신이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예수께서는 외양간의 말구유에 태어나셔서 시골의 목수로 평생 낮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셨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분의 생애와 사상에 장엄이나 화려라는 단어는 없다. 그분께서 계신 집이라면 이렇게 작고 초라해서 세속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번드르르한 외양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고매한 정신, 즉 ‘사랑’ 아니겠는가.(2 561)

 

끝으로 이 책 추천사를 쓴 강금실 전 장관의 한 마디를 여기에 옮긴다. 누구보다 이 책의 진가를 알고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글이라고 본다.

 

"이 책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성실한 교양의 자세로 회화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 감동 어린 궤적의 실례를 담고 있다. 루브르, 오르세 등 미술관들에서 겉의 규모에 파묻히지 않고서 그림의 정수를 체험하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준다. 이 책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울림에 눈과 귀를 공손히 기울여 보자. 보려고 하는 만큼 우리는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글을 마치며

짧게나마 겸산 최영도 변호사님의 삶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정리해 보았다. 나의 비재로 말미암아 선생의 삶을 제대로 그리는 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럼에도 이 글로 인해 선생의 진면모 일부라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서는 기쁨이자 영광이다. 선생은 언뜻 보면 범접하기 힘든 법조선배일지 모른다. 하지만 뵈면 뵐수록 선생은 따뜻한 분이고 자신을 낮추는 분이었다. 부형과 같은 연배임에도 나나 후배들에게 하대하는 법이 없었다. 자존심이 강했지만 부끄러움도 많은 분이었다. 그런 분이 작년 여름 내게 전화를 주었다. 박 교수가 출판기념회의 사회를 맡아 주어야겠어요. 당신의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 출판기념회 사회를 내게 부탁한 것이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기뻤다. 선생의 진정한 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선생의 말씀 하나하나를 되새겨 보았다. 당신이 쓴 글 한 구절 한 구절이, 내게 직접 말씀하신 하나하나가 큰 추억이자 기쁨이었다. 이런 추억을 남겨주신 선생께 감사드린다.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나 또한 세상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것을 잘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선생과 같은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남길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표상 겸산 최영도 변호사의 영전에 드리는 나의 약속이다.(끝)

 

후기: 선생은 미술, 음악, 문명기행 등에 관한 귀중한 서책을 남기셨다. 후대들이 그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유족은 서책 전체를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조만간 선생의 책 중 일부를 중앙도서관 기증도서관실에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