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은 가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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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잡으러 갔다가 호랑이를 잡은 격이다. 법관 블랙 리스트 의혹에서 사건은 시작되었지만 이제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 되었고, 더 중요하고 경악할 일이 드러나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하면서 청와대와 특정 사건을 두고 거래를 했다는 의혹이다. 단언컨대, 이런 일을 법원행정처가 앞장 서서 조직적으로 했다면, 그것은 정부수립 이후 초유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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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법에 위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권위주의 정권 시절 폭압적 외압으로 인해 법관의 독립이 흔들렸던 때였다. 그 시절 독재정권에 밉보인 법관은 미행을 당했고, 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으며, 재임명에서 떨어졌다. 그럼에도 법관들은 연판장을 돌리면서 정권에 저항했고, 시민사회는 그것을 지지함으로써 오늘의 사법부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이젠 영 딴판의 문제가 터졌다. 외풍이 아닌 내풍이다. 대법원장를 필두로 법원행정처 소위 엘리트 판사라는 자들이 사법부를 통째로 권부에 헌납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헌법유린으로 국헌문란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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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언어도단의 사태가 어떻게 발생했는가.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본다. 이유를 알면 고칠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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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는 사법부를 둘러싼 사악한 정치환경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9년 보수정권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은 대법원(나아가 사법부 전체)을 완벽하게 보수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명박은 자신의 정권과 컬러가 같은 양승태를 대법원장에 임명함으로써 대법원 보수화의 길을 열었다. 양승태에 의해 제청되는 대법관들은 대부분 법관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수십 년 간 사법귀족으로 길들여진 자들로서 자신의 컬러가 없는 자들이다. 간간히 소수자 약자를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의외의 인물이 대법관에 발탁되었지만, 그것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고, 그들에게서 그 어떤 가치도, 용기도 바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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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대법원은 하급심과 달리 전원합의체 13명, 소부 4명의 대법관들 모두가 완벽하게 독립된 지혜의 기둥이어야 한다.(미국 연방대법원을 ‘지혜의 9개 기둥’이라 부름)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에선 그것을 바랄 수가 없었다. 양승태의 제청에 의해 대법관이 된 자들은 독립한 대법관이 아니라 대법원장의 지휘 감독을 받는 부하 판관들이었다. 이들은 대법관이 될 때부터 대법원장과는 일심동체였기에, 대법원장과 다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을 바랄 수 없었고, 더욱 대법원장이 관심을 갖는 사건에서 다른 의견을 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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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급심의 결론을 뒤집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법원행정처 판사들은 그것을 알았기에 재판거래를 의심할 수 있는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이다. 만일 양승태 대법원 시절 임명된 대법관 중 단 몇 명이라도 대법원장의 그런 의도를 간파하고 내부적으로 반대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대법관들 (일부는 퇴임했고 일부는 아직도 대법원을 지키고 있음)은 양승태의 시녀요, 이번 사법농단의 공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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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권의 속성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어떤 제도나 법률도 결국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보수정권, 그것도 사악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현재의 제도 하에선 그에 걸 맞는 대법원장이 임명되는 것이고, 그런 자에 의해 사법부가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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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기억해 보자. 그 정권도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법에서 이런 문제가 일어났던가. 그 시절 임명된 대법관들이 이렇게 비열했던 적이 있었는가. 이홍훈, 전수안,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대법관을 기억하는가. 이들이 바로 독수리 5형제란 소리를 들으면서 대한민국 대법원의 격을 한 차원 높인 인물들이다. 이들이 누구에 의해 임명되었는가. 바로 진보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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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힘주어 말한다. 사법농단의 최고 책임은 이명박과 박근혜다. 우리가 이런 역사를 다시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 투표권을 잘 행사하는 일이다. 사악한 보수정권이 다시는 들어서지 않도록, 주권자로서 결심하고 또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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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른 하나는 제도적 환경이다.
사법농단은 우리 사법제도가 갖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권력분립 및 법관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는 대법원장이 임명된다면, 사법제도가 다소 후진적이라도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제도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대법원장이 되는 경우, 그 사람의 권력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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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쁜 게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제청하는 제도다. 이것이 바로 대법원을 수직화시키는 원흉이다. 우리 헌법은 아예 대법원을 대법원장과 대법관으로 구성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그 수직적 서열을 헌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대법원장은 그냥 대법원의 수장이 아닌 제왕적 대법원장이다. 전원합의체는 이론상 누구나 1/n의 지분을 가져야 함에도 지금의 대법원은 그렇지 못하다. 대법원장은 전원합의체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지위에 있고, 사법행정권을 독점하고 있다. 대법관들이 대법원장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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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런 대법원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하면 앞으로도 대법원장에 의한 사법농단은 계속 될 수 있다. 헌법을 바꾸어 대법원장을 대법관 중에서 호선하고, 그 대법원장에겐 대법관 임명 제청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 대법원장이 대법관 중에서 임명되고(이것은 지금 헌재소장이 그렇다), 대법관의 임명에 관여하지 못한다면, 대법원은 수평적인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법원에서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를 독점하면서 사법 행정권을 전횡할 수는 없다. 사법행정권은 법관들의 관여를 최소화시키면서 순수 사법 지원조직으로 전면적 개편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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