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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다

박찬운 교수 2018. 5. 31. 11:17

 

역사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다

-기억, 그것은 산 자의 의무-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31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사건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나는 사법연수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가을 결혼을 했으니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을 때다. 연수원을 졸업하면 바로 군대에 가야 할 처지니 마음은 신숭생숭. 하지만 살아 온 인생 중 가장 여유가 있을 때였다


그러던 중 1월 어느 날 박종철이 죽었다. 조사 중 고문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경찰 수뇌부가 필사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하나 진실이 드러났고 그것은  민주화 열기로 이어져 분노의 정점을 향해 달렸다. 박종철의 죽음과 시위 중 사망한 이한열의 죽음은 6월 항쟁으로 폭발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분수령을 만들어 냈다.

 



박종철(1964-1987). 종철은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고 1년 재수를 해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갔다. 고문으로 죽은 해인 1987년 그는 4학년이었다.



나는 873월 초 군대에 들어가 영천 3사관학교에서 장교 기본교육을 받았다. 바깥 세상은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어 감에도 군인 신분인 나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그저 간간히 들려 오는 뉴스를 통해 세상 변화를 확인할 뿐이었다


6월 항쟁은 기본교육이 끝나고 장교임관 후 병과교육이 시작될 때 쯤 일어났다. 수색에 있는 국군정신전력학교에서 4주간 교육을 받으면서 주말 외박이 허락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다녀 오면서, 차창 밖 시위대를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선 복잡한 상념이 올라 왔다. 역사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 그러면서도 피하고 싶은 이기심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나의 지난 30년은 이 기억 위에서 존재한다. 그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 것도 못한 사람의 부채 의식이라고 할까. 피를 흘린 종철이나 한열이 덕에 편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나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것이 변호사 초년 시절(90년 대 초) 민변에 들어가 활동한 배경이고 남들 하지 않는 공부를 해 보고자 동분서주한 동력이었다


시간이 화살같이 빠르다. 변호사를 거쳐 공무원을 했고 그리고 학교에 온지도 어느덧 만 12년이 되었다. 매일같이 젊은 학생들을 보면서, 대학 교수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들의 미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생각한다.

 

어제(5월 30일) 학부 교양과목 자유의 인문적 사색수강생들과 함께 경찰청 인권센터를 찾았다. 이번 학기 현장수업을 바로 그곳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박종철이 죽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젊은 친구들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공감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와 그에게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것은 산 자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감회는 특별했다. 31년 전 이런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한 세대가 지난 후 젊은 친구들을 인솔해, 박종철이 죽은 그 현장에 와서, 그 비극의 역사를 되새기며, 당신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뀐 것은 2005년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역사의 공간을 우리 모두의 기억의 장소로 만들면서 거기에 경찰의 인권부서인 인권센터가 들어 온 것이다. 이 건물의 5층은 과거 대공분실의 조사공간이었는데, 그곳은 지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특히 박종철이 고문 받고 죽어간 9번 방은, 그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둘러보는 곳이다.


 


김수근(1931-1986), 김수근은 한국 전쟁이 한참일 때 서울대 건축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졸업을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가서 동경예술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남영역 철 길 바로 옆에 만들어진 것은 1976년이었다. 유신정권의 독재가 최고조에 달할 때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당대의 최고 건축가 김수근. 지금도 우리나라 건축계를 주름잡고 있는 공간 사단의 창립자다. 서울대 건축학과를 다니다가 전쟁 통에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예술대학에서 현대건축의 세계적 흐름을 체득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를 특별히 좋아해 그의 건축 철학을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단순한 건축기능인이 아닌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은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예술종합지 <공간>을 만들었고, 자신의 설계사무소인 '공간' 사옥에 '공간 사랑'이란 소극장을 만들어 연극, 무용, 국악 등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 그런 건축가가 만든 건물이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된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니... 


그를 아직도 흠모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이 건물을 만들 때는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몰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그 누구라도 이곳에 와서 건물을 보는 순간 그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 건물 내부로 들어가 그 구조를 보면 이 건물은 처음부터 사람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장소로 쓰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김수근은 잡혀온 사람이 최대의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이 건물을 세심하고도 꼼꼼하게 만들었다.

 

견학은 인권센터의 이준형 경감의 해설로 이루어졌다. 그는 현직 경찰관으로서 인권 문제 전문가답게 학생들에게 쉬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이 건물의 내력을 설명했다. 우리는 우선 건물 출입구로 가서 아직도 남아 있는 두 개의 이중 철문부터 살펴 보았다. 그리고 건물 외관 전체를 돌아보며 이 건물의 특징을 알아보고 건물 뒤 조사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섰다. 이경감은 이 때 학생들에게 잠시 눈을 감으라고 했다. 


"여러분은 이제 30년 전 영문 없이 눈에 안대를 한채 끌려온 어느 피조사자입니다. 그가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당했을까요? 이제부터 그것을 생각하며 저를 따라 오십시오." 


이제 그가 안내한 곳을 하나하나 보기로 하자. 내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이경감의 말을 기억하면서 설명해 볼 것이다. 

 

 


투어의 첫 장면. 이준형 경감이 인권센터 구내 나무 아래에서 한양대 학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학생들의 태도가 자못 진지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유신정권이 한참 독재를 할 때 남영역 철 길 바로 옆에 세워졌다. '정초'란 한자에 기공일이 써 있다. 1976년 10월 2일 내무부장관 김치열. 당시 치안본부는 내무부 소속이었는데, 장관은 김치열이란 인물이었다. 김치열은 일제시대 고등문관 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자로 해방 후 줄곧 관료생활을 했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는 검찰총장, 중앙정보부 차장,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을 지냈다.





건물의 뒷 부분인데 오른쪽 담을 넘으면 철길이다. 바로 이곳이 얼마 전 개봉된 영화 1987에서 공안검사 하정우와 치안본부 대공처장 박처원이 격돌한 곳이다. 유신정권은 왜 대공분실을 하필 이런 곳에 만들었을까? 고문을 해도 기차 소리 때문에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본관 건물의 뒷부분이다. 저 창문을 보라. 창문의 크기는 사람 머리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다. 왜 저런 크기의 문을 만들었을까? 추측건대 두 가지다. 하나는 피조사자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안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피조사자는 저 속에 들어가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것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는 본관 건물 바로 뒤 출입구다. 고문이 자행된 조사실은 이 건물 5층인데 피조사자들은 현관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았다. 연행장소에서 승용차에 태워지고, 눈을 가린채 건물 뒷쪽으로 도착해, 이 문을 통해 조사실이 있는 5층으로 올라갔다. 저 출입문을 들어서면 3평 남짓의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서 조사실 전용 엘리베이터나 나선형 계단을 이용해, 5층 조사실로 올라갔다. 상상해 보라. 눈이 감긴채 여기까지 온 다음 저 문을 들어가는 순간 눈의 안대가 풀린다. 잠시 암흑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갑자기 전깃불이 켜진다. 조사관들이 피조사자의 양쪽에 붙어 팔장을 끼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5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그려 보라. 





조사실까지 이런 나선형 계단이 있다. 마치 첩보영화에 나올듯한 계단이다. 적막한 시간에 이 계단을 밟으며 5층 조사실로 올라간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가 5층 조사실이다. 모두 15개의 방이 있다. 방은 크기에 있어 다소 차이가 나지만 거의 같은 규모의 같은 내부시설을 한 방들이다. 





15개 방 중 하나다. 이런 방에 가운데에 책상을 두고 조사를 받았다. 뒤엔 세면기와 좌변기가 있다. 저 가림막은 70-80년대엔 없었다고 한다. 벽은 사면에 모두 방음장치를 했다.





이곳은 15번 방이다. 고 김근태 선생이 1985년 조사를 받은 방이다. 그는 이곳에서 고문 경관으로 유명한 이근안에 의해 전기고문을 받았다.





여기가 바로 박종철이 고문을 받다 사망한 9번 방이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았다. 그는 여기에서 조사를 받다가 저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흉부압박으로 질식사했다.





4층에 있는 자료실이다. 이곳엔 주로 1987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신문자료 및 사진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박종철 고문사건, 이한열의 죽음 그리고 6월 항쟁... 6. 29 선언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자료실 내에 있는 이부영 선생의 편지다. 박종철 고문 사건이 일어난 뒤 경찰 수뇌부는 필사적으로 축소 은폐를 시도한다. 이 당시 재야 운동가 이부영 선생이 영등포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그 은폐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이선생은 그 사실을 편지로 써 또 다른 재야 운동가 김정남 선생에게 알려 세상에 공개한다. 이것이 6월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바로 그 편지가 여기에 있다. 영화 1987년에 그에 관한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견학이 끝나고 학생들과 건물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자유의 인문적 사색' 수강생 20명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건물을 떠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