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서울 이곳저곳

40년 전으로의 여행

박찬운 교수 2017. 4. 24. 14:56


 40년 전으로의 여행

 


점심을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11시 반쯤 연구실을 나섰다. 혼밥을 하는 날은 이렇게 일찍 식당에 가야 주인 눈총을 덜 받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학교 뒤 사근동으로 향했다. 그곳 명희네 집에서 칼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근처 베이루트에서 즐겨 마시는 카페 라테를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근동 거리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사근동에서 지대가 높은 한양대 부속고등학교 쪽에서 바라다 보는 사근동, 한양대 뒤에 있는 후미진 동네다.

 


나는 그 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온 날,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학교에서 시골 촌뜨기가 처음 맞이했던 그 황망했던 일... 그게 정확히 44년 전 일인데...

 

커피를 한 잔 하고 내가 이곳 사근동에 처음으로 이사를 와 살았던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대학 4학년 때까지 대략 10년 조금 넘게 이곳에서 살았다. 그 기간 중 우리 집은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했다. 셋방살이, 참 지긋지긋했다



사근동의 번화가, 사근동 거리, 저 위로 올라가면 사근 고갯길이다.



처음 시작은 방 한 칸에서 예닐곱 식구가 살았다. 고등학교 때에야 비로소 방 두 칸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지금도 잠을 험하게 자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다가 모로 자다가는 어느 새 옆에서 자는 형들에게 내 자리를 뺏겼으니...

 

70년대의 사근동과 청계천 판자촌, 사진 상단이 한양대다.(자료사진)



소년의 눈물

-나의 사근동 시절-

 

19731010

어머니 손에 끌려

사근초등학교 5학년 1

문턱을 넘었다

 

OO 선생님

굵은 검은 뿔테 안경 너머

번뜩이는 눈매에서 서울 선생님의

모습을 보았다

 

첫날, 배우지도 않은 산수시험

형편없는 점수

짝꿍 김OO의 냉소 짓는 얼굴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선생님 왈, 너 오늘 처음 왔지

그래 오늘은 봐 주마

60점 아래 다른 친구들

손바닥 얼얼토록 맞는 모습에서

앞으로 닥칠 비정한 서울이 보였다

 

셋방살이 좁은 방

10시 일일 연속극이 끝나면

가족들은 일찍 잠이 들었다

집안의 희망 그 때서야 책장을 넘겼다

 

소년의 눈가에는

항상 우수가 넘쳤다

80명이 넘는 동급생들

그 중에는 소년보다 훨씬 우울한

친구도 있었다

 

어느 날 동급생들과

1, 라면 2박스 어깨에 메고

청계천 판자촌 사람 살 곳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돌아오는 길 우리 모두는 울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우리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생일 날 케이크 한 쪽 먹어볼 신세는 되겠지

 

꼬박 30년이 지난 오늘

아련한 추억의 한 가닥을 잡아당기니

오랜 세월 고였던 소년의 눈물은

메말라 있던 나의 가슴을 타고 한 없이

흘러만 간다


(이 시 아닌 시는 2004. 11. 29. 내가 근무하던 변호사 사무실에서 쓴 것이다. 그 때 창밖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 그것을 기억하며 쓴 것이다.)

 

 

내가 서울에 처음으로 올라와 살았던 사근동 1호집과 2호집이 있었던 골목



그 시절 처음으로 살았던 사근동 1호집을 찾을 수 있을까? 위치는 정확하게 알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 집이 안 보인다. 그 사이 집들이 몇 번이나 개축을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직도 서울의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지만 70년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한 곳이었다. 청계천 판자촌이 바로 지근거리인데다, 시골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집을 구하던 시절이라, 동네는 온통 무허가 불량주택뿐이었다.

 

1호집에서 1년여를 산 다음 바로 건너편의 2호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집은 1호집보다 더 형편없는 집이었다. 한 겨울이면 위풍이 얼마나 셌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참을 만 했다. 나를 제일로 괴롭힌 것은 화장실이었다


나는 지금도 아침에 화장실에 가면 시간이 걸리는 사람인데, 그 버릇은 그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열 사람도 넘게 사는 집에 딸랑 하나, 24시간 하늘을 볼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그런 화장실을 아침에 이용하려니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 밥을 먹고 그곳을 들어가야 그런대로 속이 편한 상태로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살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건물은 대부분 개축되었다.



오늘 살피니 그 2호집도 찾을 순 없었다. 분명히 위치는 알겠는데 집은 간곳이 없다. 단층 슬레이트집 위치에 허름한 양옥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사근동 시절 1호집과 2호집을 찾는 것은 모두 실패했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세월이 흐른 것뿐이다.

 

내가 자주 가는 사근동 식당, 오늘은 명희네에서 손 칼국수를 먹었다.



열두 살 어린 아이가 경험한 서울은 매몰찼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청계천의 쾌쾌한 냄새, 천지사방에서 온 사람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그 속에서 자신감 없이 머뭇거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나. 그게 40년 전 내 모습이다. 그러던 내가 반백을 훨씬 넘겨 나의 서울 정착 1호집과 2호집 사이에 이렇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