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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을 찾아 -한 가문에 빚진 마음을 갖다-

박찬운 교수 2018. 9. 1. 17:48

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을 찾아
-한 가문에 빚진 마음을 갖다-




금요일 오후 연구실을 나섰습니다. 마음이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가보았어야 할 곳이기에 때 늦은 방문이지만 좋은 기회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세 정거장을 가니 효자동. 박근혜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입니다. 정거장에서 도보로 3백 여 미터를 걸어가니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어딜까요?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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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들어가니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철우 교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지인이지만 이곳에서 만나니 기분이 특별합니다. 이 교수는 우당 선생의 증손자입니다. 이번 방문은 지난 번 제가 이곳에 포스팅한 ‘한 가문을 넘어 모든 이의 역사가 된 가문 이야기 <서간도시종기>를 읽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교수가 이 글을 읽고 저를 기념관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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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선생 흉상 앞에서 이철우 교수와 함께


기념관에서 뜻밖에도 이교수의 부친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님도 뵐 수 있었습니다. 평소 인사를 한 번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기념관 주변으로 이원장님 사저가 있어 그야말로 이곳은 이 집안의 아지트더군요. 어제 기념관엔 저 말고 두 분이 더 와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한 분은 이철우 교수의 당숙이자 이종찬 원장님의 사촌인 가천대 이종현 교수(이종걸 국회의원의 동생), 또 한 분은 지난 1년간 파리에서 한국교육문화원장을 지내다 귀국핫 김현아 전 명지대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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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내 응접실에서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문가이자 재산가로 불린 우당 선생 6형제는, 1910년 나라가 일본으로 넘어가자 전 재산을 급히 처분하고, 가족 40여 명과 함께 고난의 망명길에 오릅니다.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떠난 것이지요. 대다수의 권문세가와 부자들이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을 할 때, 왜 이들은 이런 고난의 행군을 했을까요? 이 형제의 행동을 사람들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부르지만 그 말만으론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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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명문가라 불리는 집안 족보 들추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만, 이 집안은 한 가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되었으니, 좀 소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집안은 한 마디로 우리 근세사 최고의 권력과 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사책에 나오는 상당수의 주인공들이 이 집안을 조사하다 보니 발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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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선생을 중심으로 가계를 살펴보면, 그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우승입니다. 우당의 6형제 중 둘째 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에게 양자로 들어가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됩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석영의 집(이유원 가)이 있었던 남양주(가오실이라는 곳인데, 지금의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서 한양에 올 때 동대문에 당도할 때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6형제가 만주로 떠날 때 이 분의 경제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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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원장의 어머니 조계진 여사와 관련된 자료 평풍


우당 선생 바로 아래 동생이 성재 이시영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과거 급제를 하고 평안 관찰사를 지냈습니다. 그의 첫 부인은 갑오경장의 주역 김홍집의 딸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뒤 김구 선생과 환국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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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선생의 3남 이규학은 이종찬 원장의 부친으로, 그 부인 조계진은 흥선 대원군의 외손주입니다. 그러니까 고종은 이종찬 원장의 외종조부가 되는 것이지요. 조계진 여사는 100세까지 살다가 1996년에 타계했으니, 이철우 교수는 30대 중반까지 할머니의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이런 연유인지 이철우 교수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조선 근세사에서 이름깨나 날린 사람들로 이 집안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응접실 벽에 붙어 있는 6형제 초상화


저의 관심사 중 하나는 이런 집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저 같은 성정이라면 집안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몇 번이나 도망을 쳤을 지도 모릅니다. ㅎㅎ 그런데 이 집안 분들은 참으로 대단들 하더군요. 세간의 이목이 부담스러웠을 텐데도 그것을 담담하게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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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 교수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요. 기념관에서 우당 선생 순국 일(11월 17일)을 맞이해 추모식은 하지만 명망가 집안이라면 요란하게 할 법한 제사가 없다니요! 아마 이게 우당 선생의 개혁정신과 맞닿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당은 조선시대 혁신 사상인 양명학과 서구의 진보사상에 일찍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일체의 억압과 독재를 배격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중시했습니다. 우당의 반상계급의 타파, 적서 차별의 금지, 남녀불평등 반대는 바로 이런 사상에서 나온 것이지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그런 생각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종현 교수(가천대 교수, 이철우 교수의 당숙), 김현아 교수(전 프랑스 한국 교육원장 등과 함께


기념관을 둘러보고, 이종찬 원장님, 이철우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풍찬노숙 속에서도 조국 광복의 꿈을 꾼 선열들의 모습 하나하나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빚을 갚는 것은 단 하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잘 가꿔나가는 것입니다. 자유가 넘치는 사회, 서로 연대하는 사회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는 이명박, 박근혜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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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역사가 된 가문에 경의를 표하고, 이 역사가 후대에게 많이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기념관을 나섰습니다. 2018년 8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2018.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