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2천 년 시공을 뛰어 넘은 예술감각

박찬운 교수 2015. 11. 4. 11:15

2천 년 시공을 뛰어 넘은 예술감각


<춤추는 곡예사>(Dancing Jugglers), BC 100년경, 서한시대, 위난성 장촨 리쟈산 출토, 높이 12센티미터, 1956년 출토


저 사진 상의 청동 조각품이 언제 적 작품일까요? 편견을 갖지 말고 말해 보십시오. 낡고 빛이 바랬기 때문에 막연히 옛날 것인가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저 청동상의 금도금이 떨어져 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어 번쩍번쩍 광채를 발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까? 아마도 그 때는 근현대의 어느 최고수준의 조각가가 만든 걸작 예술품이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저게 지금으로부터 대충 2,000여 년 전 중국 서한시대의 청동 조각상입니다. 제가 저 조각상을 처음 본 것은 제 페친인 심재훈 교수(단국대 사학과)가 번역한 리쉐친의 <중국 청동기의 신비>(학고재)라는 책을 통해서입니다. 참고로 심교수는 우리나라에 몇 명 안 되는 중국 고대사 전공자입니다. 중국 고대사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석학이 있는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지난한 공부를 한 뒤 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중국 고대의 청동기 문명이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책 속엔 중국 곳곳에서 발굴된 수 백 점의 청동기물 사진이 실려 있는데, 어느 것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책 220쪽을 펴는 순간 발견한 사진 한 장에서, 저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저것이 정령 지금으로부터 2,000년도 넘은 작품이란 말인가!” (위 사진은 제가 인터넷 서핑을 통해 찾아낸 것인데, 책 속에 있는 사진보다 화질이 좀 낫습니다.)

제가 왜 이런 단발마를 냈는지는 예술에 대한 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쉽게 이해할 겁니다. 이 조각품의 예술적 수준이 현대 미술에 비추어 보아도 조금도 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청동 조각상은 두 사내가 양손바닥에 접시를 올리고 춤을 추는 장면을 포착해낸 겁니다. 지금 저 두 사람은 접시 네 개를 하늘로 던진 다음 그것을 기묘한 동작으로 받아내는 소위 접시 저글링이란 걸 하는 중입니다. 두 사람의 다리는 갈지()자로 날렵하게 기어가는 뱀 한 마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 중 왼쪽 사내의 얼굴을 보십시오. 양 손바닥에 접시를 올린 다음, 입을 짝 벌리며, 뭔가 뽐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 필시 그 직전에 하늘 높이 접시를 던지고 그것을 멋지게 잡았을 겁니다.

오른쪽 사내는 슬로모션으로 달려가는 듯한데, 그 모습이 사람들을 꽤나 웃기게 할 것 같군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지요? 앞에 있는 관중들은 이들의 묘기에 따라 한순간 놀라기도 하고 또 한 순간 웃기도 할 겁니다. 두 사람의 곡예사가 벌리는 묘기 대행진 중 하이라이트가 바로 이 장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 조각상을 보면 동적 표현의 역사가 확연히 드러난다. 위는 기원전 6세기 말 작품, 아래는 5세기 중엽 작품이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위 작품은 정적이고, 아래 작품은 동적이다.

이 조각품의 예술성이 왜 높은가? 무엇보다 두 곡예사의 동적 모습이 기가 막히게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술사에서 조각품은 정적 표현에서 동적 표현으로 나아갔고, 그것을 조소예술의 진보라고 합니다. 동적표현은 정적표현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기예의 수준이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 조각품을 보더라도 기원전 6-7세기까지는 두 다리를 나란히 하면서 정적으로 표현된 인체 조각상이 대부분입니다. 다리의 모양을 앞뒤로 하면서 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조각상은 기원전 5세기 이후에나 발견되지요. 이 조각상의 동적 표현은 한 눈에 보아도 그리스인들의 동적 표현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조각품의 예술성이 왜 높은가? 두 번째는 자연스런 균형감의 백미입니다. 미의 고전적 요소 중 하나는 역시 균형감(proportion)입니다. 밀로의 비너스가 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합니까. 그것은 균형미가 절대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플라톤의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팔등신적 요소와 콘트라포스트의 균형미 넘치는 여체로 미의 여신을 표현한 겁니다. 이처럼 균형미는 미의 요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 이 조각상을 보십시오. 두 사람은 등을 마주하고 좌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두 팔은 모두 뻗고 있지만 엇갈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좌우로 물결치듯 나아갑니다. 두 사람이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지만 늘어지지 않고 팽팽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뱀에 의해 두 사람이 중앙으로 붙들려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이 조각품은 기계적 균형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스 고전기 조각상의 균형미가 수학적 아름다움이라면 이 조각상의 균형미는 자연적 아름다움입니다. 균형미 속에서도 뭔가 자유분방함이 있지 않습니까. 제겐 이 균형미가 아테네의 균형미보다 한 단계 위로 보여지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조각품의 예술성이 왜 높은가? 세 번째는 묘사의 세밀성입니다. 물론 세밀한 묘사 그 자체가 예술성의 척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술이란 본시 기예에서 나온 것이므로 세밀한 묘사란 분명히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조각상을 확대해서 보면 이 두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보통 옷이 아닙니다. 이 옷들은 위아래 여기저기에 수백 가지의 문양이 촘촘히 그려져 있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무대의상입니다

이것을 만든 장인은 바로 이런 세밀한 묘사까지 할 수 있는 매우 수준 높은 기예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세밀성이야 말로 르네상스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나타난 서양의 사실주의의 대 선배 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 서한시대의 청동 조각품 <춤추는 곡예사>는 근대 예술의 미적 요소를 모두 갖고 있는 놀라운 예술작품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사람의 미적 감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공을 넘는 보편적인 것인가? 이 조각품을 보면 그렇다고 답할 수밖에 없군요. 2천 년 전에 저와 같은 보편적인 미학의 예술품을 만들어 낸 중국문명에 경외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