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백제관음상과 밀로의 비너스가 만나다

박찬운 교수 2016. 7. 17. 21:58


백제관음상과 밀로의 비너스가 만나다



일본 호류사의 <백제관음상>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


일요일 밤이다. 이 밤이 가면 분주한 한 주가 시작된다. 글을 쓰면서 사진첩을 뒤적이다 여러 해 전 찍은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찍은 날이 2006년 7월 15일, 꼬박 10년 전 사진이다. 일본 나라 호류사의 <백제관음상> 사진이다.


생각해보니 이 사진을 찍는 데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 불상이 모셔진 호류사 백제관음당은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이 사진을 찍었다. 


당일 내가 이 사진 하나를 찍는 데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백제관음당 최고의 보물인 이 불상 근처엔 항시 경비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상 주변에서 기다리면서 경비의 헛점을 찾았다. 경비원이 움직여주길 바랐다. 한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마침내 경비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화장실을 가는지...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내 손에 들어온 게 저 사진이다. 물론 급하게 찍다보니 화질도 좋지 않다. 더군다나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는 지금 내가 가지고 다니는 카메라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그럼에도 나는 이 화질 나쁜 사진을 소중하게 여긴다. 내가 그렇게 체면 다 구기면서 찍은 사진이니.


2012년 내가 두번 째로 호류사를 갔을 때도 백제관음당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비원이 잠시 자리를 비워주길 바라면서 기다렸지만 이 만만치 않은 친구는 결코 빈틈을 주지 않았다. 함께 간 일행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회를 찾지 못하고 그곳을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언젠가 다시 가 최고 화질의 사진을 찍으리라!


나는 왜 이 사진을 그렇게 찍고 싶었던가. 그것은 이 백제관음상이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혼이 담긴 불상이기에 그렇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 보아 응당 세계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나는 이것을 친견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친견의 증거를 어떻게 해서라도 남기고 싶었다. 


이 <백제관음상>은 7세기 초 한 둥치의 녹나무를 조각해 만든 입상(전체 높이 280센티미터, 불상높이 210.9센티미터)이다. 일본의 공식자료는 이 불상의 백제와의 관련성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불상은 백제에서 직접 만들어 수출된 것이거나 백제의 장인이 일본에 가서 만든 것 중 하나라는 것이다. 


2007년 내가 처음으로 이 백제관음상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백제관음당에 들어갔을 때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우선 이 보물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내 눈에 떡 나타난 것이 바로 저 사진의 불상이었다. 어두운 내부에서 천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 온 불상이 천정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내 앞에 당당하게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역시 들은 대로 이 불상은 보통의 불상이 아니었다. 큰 키도 압도적이었지만 그 호리호리함과 머리와 몸통과의 비례가 여느 불상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내가 눈대중으로 재보니 정확히 8등신 불상이었다. 나는 여직껏 이런 비례의 불상을 본 일이 없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 이런 8등신 불상이 있다던가. 알고 보니 일본에도 이것 외에는 없다.  


내 앞에 8등신의 늘씬한 매녀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것이다. 오른 손으론 중생의 고통을 당장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손짓을 하고 있고, 왼손으론 엄지와 중지로 보병의 목을 가볍게 쥐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끝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다. 가히 기막힌 연출이다. 그뿐인가. 발 아래까지 흘러 내려뜨린 옷자락 속으로 보이는 군더더기 없는 몸매!


이 백제관음상을 보고나서 집에 오자마자 루브르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 사진을 꺼냈다. 비너스상이야말로 8등신의 원조가 아닌가. 헬레니즘 시대 서구인들은 가장 이상적인 미를 8등신의 비례미로 보았다. 이 미의 기준은 그 후 시대를 넘어 세계의 미의 기준이 되었다. 지금 티브이를 켜서 좀 예쁘다고 하는 탤런트를 보라. 모두가 머리가 작다. 비롯 8등신은 안되어도 7등신에서 8등신 사이라고는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미의 기준이 어떻게 일본에서 발견되었을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저것은 분명 서구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는 동양인이 만들 수 있는 불상이 아니다. 저것을 만든 어느 장인은 당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동아시아의 불상을 만든 게 아니다. 그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의 미술 속에 전해 오는 어느 특별한 8등신 불상을 만든 것이다. 그럼 그는 그 8등신의 불상 아니 8등신의 미인을 어디서 어떻게 보았을까? 그것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활발한 동서문명의 교류가 그 답일 것이다. 그러니 저 불상은 아시아인의 손으로 만든 동양의 비너스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이 백제관음상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 일본 열도가 침몰할 때 단 한 가지만 가지고 비상탈출이 허용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백제관음상을 갖고 나갈 것이다." 그만큼 이 백제관음상은 서구인의 눈으로도 보아도 대단한 예술품이다. 


그러기에, 서구인들은 이 백제관음상을 유럽의 한 복판에서 보는 것을 오래 동안 고대했다.  1974년  프랑스인들이 국보 제1호로 여기는 모나리자가 동경전시를 위해 모처럼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그 때 프랑스 대통령 퐁 피두는 개막식에서 언젠가 백제관음상이 파리에서 전시되길 기대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마침내 이 보물을 서구인들이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996년 9월 파리 루브르에서 특별전시가 이뤄진 것이다. 루브르! 그곳에서 서양 8등신의 원조 비너스와 동양 8등신이 감격의 해후를 한 것이다.


(2016.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