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삶의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60년

박찬운 교수 2022. 6. 8. 21:25

이제 환갑을 맞이하니, 과거 기억이 어느 때보다 새롭다. 점심을 먹고 명동거리를 걷다보면 40년 전 이곳을 걷던 내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환갑에 이른 사람은 분명 노인이었다. 환갑노인이라는 말은 그 시절엔 보통명사였다. 지금은 어떤가. 특별한 게 없다. 환갑잔치할 계획도 없다. 이제 더 이상 환갑노인이란 말도 없는듯 하다. 그저 스스로 인생 60을 음미할 뿐이다. 빛바랜 앨범을 찾아 사진 몇장을 골라 카메라에 담아 여기에 올려 본다. 사진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내겐 환갑기념 행사다.(이 글에선 일부러 내 가족이야기는 뺀다. 아이들이 프라이버시 문제에 민감해 허락없이 사진 한장이라도 올리면 가정의 평화가 깨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ㅜㅜ)

시계 제로 유년시절

나는 1962년 충남 청양 벽촌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그곳 면장. 변변한 땅떼기 하나 없이 박봉의 월급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는 어려웠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병고에 시달렸고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이 사진은 첫돌 기념으로 찍은 것인데, 아기의 얼굴이 제법 의젓하다. 이 놈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눈을 보면 벌써 약간의 고독함(?)이 묻어난다.

우리집은 1973년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서울로 이사를 왔다. 우리가 자리잡은 곳은 청계천 부근 사근동. 나는 사근초등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 이 사진은 1975년 초 졸업식 날 어머니,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시골에서 올라온지 1년 만에 그래도 공부는 잘했던지 각 반에서 한 명씩 주는 학교장 상을 받았다.


불안했던 청소년 시절

나의 중학교 시절. 나는 서울 중구의 성동중학교를 다녔다. 사근동 집에서 6-7 정거장 거리인데, 버스비를 아끼려고 매일 걸어다녔다. 이 사진을 보니 외로움과 고독은 점점 깊어져 가는 것 같다. 나는 멋지게 살고 싶었다. 여건은 좋지 않지만 마음 속엔 늘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당시 과외열풍이 불고 있었는데 가정형편으로 단 한 번도 과외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성적은 다행스럽게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나의 고교시절. 나는 청계천 변의 한영고등학교(지금은 상일동으로 이전했고, 같은 재단 내의 특목고인 한영외고가 함께 있음)를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인 고교 3학년 때 새로운 입시제도가 만들어졌다. 이 사진은 그 즈음 학교 뒤 뜰에서 찍은 것이다. 꿈은 많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다. 그 불안의 실체를 모른채 청소년기의 마지막을 보냈다.


치열했던 20대

1981년 한양대에 입학했다. 당시 세상은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었지만 나는 세상과는 담을 쌓고 고시 공부에 열중했다. 누구는 그게 학생의 본분이니 잘한 것이라 말하겠지만 내겐 오랫동안 세상의 빚으로 남았다. 팔자인지 행운인지, 1984년 대학 4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것이 내겐 그 후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 사진은 고시 합격 후 아버지와 함께 고향인 충남 청양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나를 마치 목사님처럼 생각한다. 얼굴에 그렇게 써 있다나... 그것은 영 재미 없이 세상을 산다는 핀잔이지 칭찬은 아닌 것 같다. 나도 즐겁게 살고 싶었다.

대학시절, 아마도 사법시험이 끝난 다음, 친구들과 어딜 가서 찍은 것인데 장소가 생각 안난다. 저 당시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장발이 유행했다. 얼굴을 보니 내가 봐도 선하고 청순하다. 약간의 우수, 그것은 내 팔자인 모양이다.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 여러 상을 받았다. 그 중에는 최고상이라고 하는 재단이사장상도 받았다. 지금 같으면 그 학점으로 받기 힘들 텐데, 당시엔 학점 좋은 동기들이 없었다. 사진은 한양학원 재단이사장이자 대학 설립자이신 김연준 박사께서 내게 상장을 수여하는 장면.

198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300명의 동기생들과 2년간 고락을 같이 했다. 동기생 중에는 대법관, 중앙선관위원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대형로펌 대표, 법대 교수 등 많은 고위 법조인과 저명한 학자들이 탄생했다. 사진은 사법연수원 졸업 기념 여행 중 동기들과 함께 설악산에서.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1987년 군에 입대했다. 영천 삼사관학교에서 12주 교육을 받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당시 나는 신혼 중. 1986년 25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였으니 지금으로선 조혼이다. 사진은 영천 삼사관학교 훈련 중 화산유격장에서.

1987년 장교교육을 마친 나는 육군 중위로 임관해 육군 제11사단 화랑부대에서 정훈장교로 복무했다. 당시 150여 명의 동기생 중 절반은 군법무관으로 복무하고 나머지는 헌병, 감찰, 정훈 등의 병과에서 일했다. 정훈장교로 일하는 것은 다른 동기생에 비하면 고충이 많았다. 더욱 그 시기는 전두환 정권 말기라 군이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념교육을 담당하는 정훈장교를 하다니! 그러나 나는 이 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많은 독서를 했기 때문이었다. 고시 공부를 할 때 못 읽었던 각종 사회과학 도서를 정훈장교를 한다는 명분으로 제한없이 읽었다. 국가보안법이 엄중하게 작동하는 시절에도 나는 무시로 금서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제대 후 삶을 결정했다. 사진은 육군 제11사단 군사법원 법정에서 국선변호인을 하던 장면.

20대가 끝나가는 시기 나는 군을 제대하고 바로 변호사가 되었다. 당시 나이 29세. 1년 가까이 선배 변호사 밑에서 일을 배우다가 1990년 말 서초동에서 단독 개업을 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라 변호사 수가 적었다. 현재 3만 5천 명, 당시 2천 명. 고용 변호사도 상당한 월급을 받았다. 기억하기론 내 변호사 초임이 군대 마지막 월급의 10배 정도였다. 덕분에 나는 특별히 돈을 버는 변호사가 아님에도 생활에는 큰 불편을 겪지 않고 가족을 건사할 수 있었다. 빈한한 가정에서 자란 내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었다. 사진은 1990년 단독 개업 전 고용변호사로 있었던 시절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29세의 변호사치고는 노련해 보이지 않은가?


도전의 시기 30대

나의 30대는 도전의 시기였다. 무엇인가 다른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내 가족의 안락한 삶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지식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민변활동을 했고 소위 인권변호라는 것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특기는 현장의 활동가로서의 일보다는 방안에 틀여박혀 연구하는 연구자로서의 일이었다. 독학으로 국제인권법을 공부하였고 변호사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변호사 경력 3-4년만에 당직변호사제도를 제안해 그 운영을 맡았고, 행형제도 연구를 요청해 연구회를 만든 다음 운영간사가 되었다. 사진은 1993년 일본변호사회와의 정기교류회에 참석했을 때 당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인 고 김창국 변호사님이 찍어준 것. 눈매가 무섭다.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변호사 생활 6년을 마치고 나는 유학을 결심하였다. 내 나이 35세의 일이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영어공부를 하고 노틀담 대학 로스쿨에 입학해 국제인권법 분야를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노틀담이 있는 인디아나 사우스벤드는 노틀담 대학을 위한 도시인데, 인근 도시를 합해도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학 미식축구. 노틀담은 전국 참피언을 11번이나 한 전설의 학교다. 20만의 도시에 8만명의 관중이 들어가는 스타디움에서 매년 가을 풋볼 시즌이열리고 그것은 NBC등에 의해 전국적으로 중계된다. 사진은 노틀담 로스쿨 시절 로스쿨 건물 앞에서.

1998년 5월 노틀담 로스쿨 LL.M. 과정을 끝내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날아갔다. 그곳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인턴쉽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같이 간 친구가 나이지리아에 온 콜라라는 친구. 우리 두 사람은 헤이그의 한 지붕 밑에서 살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다. 그와 나 사이엔 많은 추억이 있다. 특히 그가 집으로 귀국할 때 벨기에 브뤼셀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나는 한국에 있으면서 그가 지녔던 수표의 인출을 막아주었다. 지금 그는 런던의 앰네스티 국제사무소의 선임법무관으로 일하고 있다. 사진은 로스쿨 졸업식 날 찍은 것. 맨 오른쪽 친구가 콜라.

나는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 국제인권법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99년 내 나이 38세가 되던 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제인권법이란 교과서를 냈다. 사진 왼쪽은 바로 그 때 나온 책, 오른쪽은 그 책이 기초가 되어 나온 인권법 교과서. 인권법 교과서는 내가 교수가 되고 나서 2008년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은 두번의 개정을 거쳐 2015년 제2개정판을 냈다.


또 다른 도전의 40대

40대 초 내가 가장 열심히 활동한 것은 민변의 국제연대 활동이었다. 연대위의 위원장으로서 유엔기구에 한국의 인권상황에 관한 민간단체 리포트를 낼 때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엔에서 회의가 열릴 때는 몇 몇 회원들과 함께 제네바에 가서 로비활동을 하였다. 사진은 그 즈음 제네바 유엔유럽본부에 갔을 때 동료들과 찍은 것. 가운데는 김선수 변호사(현 대법관), 오른쪽은 한택근 변호사(민변회장 역임)

미국 유학 후 40줄에 들어서 민변의 국제연대위원회와 난민지원위원회를 이끈다. 특히 난민문제는 내가 국제연대위원장 시절 민변과 유엔난민기구 간에 특별협정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난민인정이 단 한 명도 이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민변의 활동으로 한국에서도 난민인정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다. 사진은 2000년대 초 한국을 방문한 유엔난민기구 수장인 고등판무관(전 네덜란드 수상)과 단독면담하는 장면. 나는 당시 판무관에게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난민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1990년대 초부터 나는 활발하게 일본의 변호사,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 덕분에 2003년 내 나이 42세가 되는 해 일본의 현대인문사에서 내 일본어 책인 '국제인권법과 한국의 미래'가 출간되었다. 나는 이제껏 책을 출판하고 기념회를 해 본적이 없는데, 이 때는 예외였다. 그 해 가을 동경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일본 각지에서 나를 아는 법률가들이 기념회에 참석해 출간을 축하해 주었다. 특히 오사카변호사회의 회장을 지낸 사에키 변호사 부부는 직접 참석하고 상당액의 부조금까지 내고 갔다. 사진은 당시 출간한 책을 들고 있는 모습.

내 나이 43세가 되던 해 2004년 나는 일본의 변호사들로부터 특별한 부탁을 받는다. 일제강점기 소록도에서 강제수용되었던 한센인들을 위해 일본에서 보상소송을 하자는 것. 나는 처음에는 감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거절했지만 결국 그들과 손을 잡고 이 소송에 뛰어든다. 2004년 5월 5일 처음으로 소록도를 방문해 한센인들을 만났다. 이를 바탕으로 대한변협에 한센인인권소위원회를 만들고 소위원장이 되었으며 한국 변호단을 만들어 그 사무국장이 된다. 그 해 가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장을 내고 법정에 섰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한국에선 한센인 인권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내가 인권위의 정책국장 시절 인권위는 한센인 인권증진을 위한 권고를 정부에 했고, 그것은 결국 특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일본에서의 소송은 패소했지만, 그 소송은 일본 정부를 움직여 보상법 개정으로 이어져 수백명의 한센인들이 일본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2005년 내 나이 44세 때, 나는 인권위 정책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고 최영도 변호사님(당시 위원장)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이미 많은 영역에서 인권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정책안건을 삽시간에 만들어 위원회의 의결로 연결시켰다. 대표적인 것 몇 개를 열거하면,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차별금지법, 사형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난민보호, 한센인 인권보호 등등. 사진은 최영도 위원장님의 후임인 조영황 위원장님을 모시고 국회 상임위에 출석했을 때 의원 질의 답변하는 모습.

2005년 인권정책국장 시절 조영황 인권위원장님를 비롯해 상임위원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때 김대통령은 인권의 중요성, 남북관계에서의 인권문제 등에 대해 평소 생각을 우리들에게 피력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인권을 무기로 상대의 자존심을 공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말씀. 북한인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은 당시 방문한 일행(조영황 위원장님, 최영애, 정강자, 김호준 상임위원, 곽노현 사무총장)과 김대통령.

나는 45세가 되던 2006년 가을 대학으로 옮겼다. 모교 교수가 된 것이다. 2008년엔 뒤늦게 법학박사(국제법, 고려대)를 받아 연구자로서 기본적인 조건도 충족했다. 학자란 무릇 강의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직업이다. 학자로서의 삶이란 고독한 것이나 나는 비교적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고독은 내 정체성인 모양이다. 사진은 내 연구실 모습. 연구실을 보면 내 관심 영역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세상을 주유하고 세상에 책임을 지는 50대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학교로 옮긴 다음 독서와 여행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방학이 되면 배낭을 짊어지고 세상을 주유했다. 내 여행은 단순한 도락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녀오면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객관적 자료를 참고해 글을 써 세상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문명과의 대화'(2013)이다. 그 외의 여행 글은 이 블로그 여행편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머지 않은 장래에 '문명과의 대화' 후속편이 나올 것이다.

51세가 되던 2012년 연구년을 맞이해 1년간 스웨덴 룬드대학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머물렀다. 북구에서 1년을 보낸 대한민국의 법률가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인 복지제도를 흥미롭게 보았다. 북구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도 했다. 나의 인생 후반의 지적 토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귀한 1년이었다. 사진은 라울 발렌베리 연구소 도서관에서의 내 모습.

2016년 여름 나는 두번째 연구년을 맞이해 런던으로 떠났다. 그곳 런던대학(SOAS)에 몸을 담고 런던 곳곳과 유럽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40편에 가까운 런던 체류기를 써서 이곳 블로그에 올렸다. 아마 언젠가 책으로 나오지 않을까. 사진은 런던 체류시절 런던 에서 머지 않은 윌리엄 정복의 격전지 헤이스팅스의 무너진 고성에서 찍은 것이다.

내 여행의 중심은 문명기행이다. 그 중에서도 동서 문명의 교류로 기능했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제껏 두번에 걸쳐 실크로드 기행을 했고 첫번째 기행문은 '문명과의 대화'에 실려 있다. 사진은 54세가 되던 2015년 여름 두번째 실크로드 기행할 때 타클라마칸 사막의 키질 석굴 앞에서 찍은 것이다.

나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왔다. 학자라고 해서 연구실에만 있을 수 없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이 일어난 후 사법농단 사태가 일어났다. 대법원장을 비롯해 고위 법관들이 정부와 거래해 판결에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태가 우리 사법의 존망이 걸린 문제로 인식하고 관련자를 엄히 문책할 것을 요구했다. 사진은 당시 변호사들과 서초동 변호사회관 앞에서 집회를 할 때 마이크를 잡은 내 모습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경찰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경찰 설립 이래 가장 큰 개혁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나는 개혁위원으로 활동했고, 개혁위 활동이 종료된 후에는 수사정책위원으로 활동했다. 사진은 개혁위 활동 중 수사분과 회의 장면

2019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마와 싸우는 일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큰 일이었다. 그해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 마자 배낭을 짊어지고 티벳으로 떠났다. 고도 5천 미터의 고원지대는 며칠간 내게 큰 고통을 주었다. 고산증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나서야 여행다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사진은 라사에서 버스로 2시간 이상을 달려 닿은 고원 호수 암드록초에서 찍은 것.

1993년 이후 30여 년에 걸쳐 많은 글을 썼고 그것들은 책으로 출간되었다. 처음에는 인권 관련 전공서를 쓰다가 2010년 이후엔 대중적 글쓰기를 시작해 최근까지 교양도서를 출간해 왔다. 그렇게 해서 쓴 책이 거의 20여 권에 이른다. 사진은 연구실 내 서가를 채우고 있는 저서들.

50대의 일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중적인 글쓰기와 그에 따른 교양서 출간이다. 40대가 끝나가는 2010년 즈음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서에 관한 글을 연재했고, 다음에는 여행에 대한 글을 썼다. 이것이 후일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와 '문명과의 대화'로 출간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글쓰기는 SNS를 통한 것이었다. 페이스북에 여러 글들을 올렸지만 그중에는 예술에 대한 것도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빈센트 반 고흐에 관심이 있었는데, 페이스북에 그의 그림을 설명하는 글을 연재한 것이다. 많은 친구들이 내 글에 감동하고 댓글을 달아주니 내 필력은 더욱 살아났다. 50여회의 연재가 끝나자 나는 이글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54세에 출간한 '빈센트 반 고흐 새벽을 깨우다'. 제목대로 나는 이글들을 새벽 4시부터 썼다.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간 다음 페이스북에 올려 친구들을 깨웠다.

2019년은 다사다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 형마저 희귀병으로 5-6년 간 병상을 힘겹게 지키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마음 아픈 상황에서도 기쁜 소식이 있었으니 우리 집 큰 딸이 결혼을 한 것이다. 사진은 결혼식 날 양가를 대표해 하객들에게 한 마디하는 장면. 나는 이 날 딸과 사위에게 자유롭게 살되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2020년 1월 59세, 나는 대통령 지명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에 임명된다. 임기 3년의 정무직 공무원(차관급)이 된 것이다. 14년만의 친정행이라고나 할까. 인권위는 많이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상임위원 업무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 나의 모든 경력은 인권위의 업무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임기 3년 중 2년을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사태 한 가운데서 보냈다. 제대로 국제회의 한 번 가보지 못한채, 책상 앞에 쌓인 기록을 읽고 사건을 처리하고, 하루에도 몇 개씩의 회의에 들어 가고 있다. 사진은 2020년 1월 13일 첫 출근 일 사무실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60대를 맞다

인권위 상임위원의 일은 살인적이다. 차관급 공무원의 일로서는 아마 비교할 자리가 없을 것 같다. 두 개의 소위원회를 담당하고, 상임위와 전원위에 들어가야 하며, 2-3개의 전문위원회도 담당한다. 연간 내가 처리하는 사건 수만 적어도 2천 여 건이 넘는다. 사진은 2000년 가을 인권위 주최 국제회의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장면.

이제 사진으로 본 내 60년을 마감하자. 여기 올린 사진 몇 장으로 내 인생을 온전히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내 인생 주요한 몇 부분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후일 무엇이 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살았다. 그러던 내가 법률가가 되고 대학교수가 된 다음 지금 여기까지 왔다. 내게도 아쉬운 것은 많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돌아갈 것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단연코 'NO'이다. 사진은 지난 6월 초순 목포에서 열린 인권위원 워크샵에서 발언하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