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인권고전강독

인권고전강독 12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고독한 군중

박찬운 교수 2016. 5. 24. 14:35

인권고전강독 12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고독한 군중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왜 가난한 이들이 보수의 첨병이 되는가

 

나는 자주 궁금했다. 왜 가난한 이들이 보수의 앞잡이가 되는지. 지난 20여 년 간 우리 사회가 70-80년대에 비해 민주화·자유화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교육수준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권위주의를 찬양하고 과거의 독재를 미화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잖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론조사를 하면 응답자 중 30%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하는 콘크리트 지지층인데, 내가 보기엔, 이들이 그들일 가능성이 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 상당수가 경제적으론 빈곤층이라는 사실이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만이 대통령과 여당을 굳건히 지지하는 보수층이 아니다. 어쩜 그보다 더 많은 지지자들이 돈과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통 빈곤층은 세상 바뀌는 것을 원할 것이므로 진보를 지지할 것 같은데,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해서 연로하고 궁핍한 어르신들이 거리에 나와 자본가를 대표하는 전경련을 위해, 권위주의적이고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정치집단을 위해 데모를 할까? 왜 빈곤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진보의 전위대가 되지 못하고 보수의 사탕발림에 번번이 넘어가는 것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이런 사람들의 멘탈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은가?

 

 

에리히 프롬이 발견한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

 

나는 11강에서 인간은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인 것 같아도, 현실에선 제대로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밀그램의 심리학 실험을 통해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자유를 누리는 데 있어, 인간 개개인에겐 심리적 장애기제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를 희망한다면, 교육을 통해 이런 장애기제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유를 누림에 있어, 인간심리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밀그램만 말한 게 아니다. 그가 말하기 전 20년 전, 에리히 프롬도 자유를 심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해, 매우 통찰력 있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게 바로 그가 쓴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라는 책이다. 이 책이 밀그램의 그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단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심리학책이 아니고, 이른바,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 사회심리학 책이라는 점이다.

 

프롬에 의하면, 인류는 역사적 흐름에서 특정 시기마다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 일정한 집단심리적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20세기 그가 발견한 집단심리는 사람들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심리였.

 

프롬이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인생역정에서, 어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강독하기 전에, 우선 그에 대해 알아보고, 그가 왜 이런 책을 썼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1900-1980)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정신분석학자, 사회심리학자다. 그는 1930년대 소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한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를 평하는 논자들은, 그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으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둘을 꼽는다.

 

인간의 사회경제적 문제에선 마르크스로부터, 인간정신의 문제에 대해선 프로이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사람의 사상을 단순히 종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에리히 프롬사회심리학을 만들어냈다.

 

그가 독일에서 경험한 나치즘은 하나의 사회현상이었다. 독일은 근대 합리주의 철학을 만들어낸 철학의 고향이자, 인간의 정신과 자유가 최고로 고양된 나라다. 그런 나라가 세계 대전의 주역이 되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 전화가 가시기도 전에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 인권은 간 데 없고 수많은 유태인이 박해받는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을 오로지 독재자 히틀러만의 책임으로 돌려야할까. 이런 현상에는 일반 독일시민의 책임은 없을까. 프롬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특정인만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 구성원 전체의 심리에서 찾아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원창화 옮김)는 바로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집필된 책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근대인

 

프롬이 발견한 근대인(여기서 말하는 근대인은 현대인과 다르지 않다)은, 고독한 존재로서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인간이다. 근대인은 한편으론 자유를, 또 한편으로는, 고독함을 간직하며 산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수백 년간 서구사회가 이성을 찾아 근대성을 확립했고, 신에게서 해방되어 개인을 회복했지만, 그것들은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고독감을 안겨주었다.

 

근대인에게 자유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근대인은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개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고립되고 무력해졌으며, 자기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어 외재적인 목적의 도구가 되었다.”(224)

 

이렇게 고독해진 근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고독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성취해 온 자유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유를 누리자는 것이다. 또 따른 하나는, 고독함이란 짐에 굴복해, 새로운 도피처를 찾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자유를 포기하고  불합리와 비이성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자유는 근대인에게 독립과 합리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또한 근대인을 고립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를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고립은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근대인은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피하여 새로운 의존과 복종을 찾느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독자성과 개성에 기인된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하여 전진해 가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서문)

 

자유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체주의의 광란을 생각해 보라. 지금 프롬은 나치즘과 파시즘을 신봉하면서, 독재자의 말 한마디에 죽고 죽는 군상들을 발견한다. 여기서 무슨 민주주의, 무슨 인권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이 집단광기 속에선 인류의 꿈인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하다이에 대해 프롬은 듀이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은 외국에 전체주의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태도와 제도 내부에 외국 여러 나라들에서 외적 권위와 규율, 획일성, 지도자에 대한 의존 등 파시즘이 승리를 얻게 한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협이 된다. 따라서 싸움터는 바로 여기우리 자신과 우리의 제도 안에 있다.”(10)

 

이런 상황에서 프롬은 이런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도대체 우리에게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는가. 전체주의 사회를 보면, 인간에겐 자유에 대한 욕망보다 오히려 복종에 대한 본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에 대해 민중은 저렇게도 열광한단 말인가.

 

"자유에 대한 본유적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욕구가 없다면, 오늘날 어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1)

 

 

인간의 두 가지 본능

 

전체주의 사회에서 독재자들에게 열광하는 민중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의 본능을 심각하게 분석해 보아야 한다. 프롬은 두 가지 본능을 제시한다. 첫 번째 본능은 자기보존적인 욕구다. 이 욕구는 굶주림, 갈증, 수면욕과 같은 인간의 생리적 조직에 뿌리를 둔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을 얻어야만 하는 인간성의 한 부분이며 인간행동의 1차적인 동기를 형성한다.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구와 사회제도라는 두 가지 요소는 원칙적으로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변경될 수 없으며 그것은 또한 보다 큰 유연성을 가진 다른 여러 특성들의 발달을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경제 제도의 특성에 의해 한 개인에게 정해진 삶의 양식이 그의 성격 구조 전체를 결정하는 제1차적인 요소가 된다.”(20-21)

 

프롬이 제시하는 두 번째 인간본능은 정신적인 것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욕망이다. 생리적으로 제약된 욕구만이 인간본성의 절대적인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신체적 과정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양식과 관습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있는,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 고독을 피하려는 욕구이다


이 단절감은 육체적 굶주림이 마침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죽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이 고독을 피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고독해서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낫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와의 관계에는 고귀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지만 비록 가장 낮은 수준의 양식으로라도 관계를 맺는 일이 홀로 있는 것보다는 낫다. 부당하고 비천한 속성의 관습 또는 그런 신념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민족주의도 그것이 각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이어주기만 한다면,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즉 고독으로부터 피난처가 된다.”(22)

 

인간은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성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게 되면 될수록...사랑이나 생산적인 작업의 자발성 안에서 외부 세계와 결합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유와 개인적 자아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외부 세계와의 유대에 의해 일종의 안전함을 구할 수 있을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4)

 

 

인간의 고독과 사회경제적 구조

 

프롬에게 있어 인간심리는 사회구조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의 견해는 구조주의적이다. 인간의 외부환경이 결국 인간의 심리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그는 인간이 르네상스 이후, 점점 개인으로서 개체성을 회복해 왔지만, 반면 사회경제적 구조 하에서의 인간은 그 이전보다 점점 불안해졌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라, 근대 이전의 세상을. 그 시절이 다 나쁜 게 아니었다. 그 때는 영주가, 교회가 삶의 상당부분을 책임져 주었다. 비록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삶은 안정되었고 세상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근대의 자유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사회, 바로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다. 이 체제 하에선 민중은 괴롭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만 그 결과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안은 시작된다


이런 불안이 지속될 때 사람들은 그 것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개인의 자유를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지속되는 불안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가 이 불안을 잠재워줄 수 있다면 그게 악마의 손짓이라 할지라도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

 

개체화의 모든 과정을 추진시켜 가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이 ... 개체성 실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지 않고, 그리고 인간들은 그들에게 일찍이 안전감을 부여해 주던 관계들을 잃는다면, 이러한 지연은 자유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담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자유는 회의 그 자체가 되며, 의미와 방향을 상실한 삶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자유로부터 벗어나, 비록 개인으로부터 자유를 빼앗는다 할지라도 불안으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하는 인간과 외부 세계에 대한 복종으로 이들과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도피하고자 하는 강력한 성향이 생겨난다.”(36-37)

 

 

종교개혁에 대한 열광은 고독 때문이었다

 

프롬은 근대인이 전체주의에 열광하는 것을 역사적인 맥락으로 진단한다. 그가 보기엔 이 현상은 과거 서구인들이 종교개혁에 대한 반응과 다르지 않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가 서구인에게 준 반작용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르네상스에 대해, 우리는 인간과 개인의 발견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이게 무엇인가. 중세 천 년 속에서 인간은 신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 인간은 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고 개인은 무의미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맞이하면서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나라는 개인은 더 이상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자유로운 존재라고 자각했다. 르네상스인들은 이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생각하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체제의 붕괴는 사회의 모든 계급에 걸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개인은 홀로 떨어져 고립되었다. , 개인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자유는 이중적이었다. 인간은 그때까지 누렸던 안정성과 더불어 의심할 바 없는 소속감을 상실했으며,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개인의 안전함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그 결과 개인은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혔다.”(85)

 

프롬은 중세적 체제의 붕괴를 목격함과 동시에 르네상스인들의 고독 그리고 그 고독에 따른 복종의 심리를 발견한다.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인들의 고독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 속으로 파고 든 일종의 권위주의였다는 것이다.

 

루터의 신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복종이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신앙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만일 그대가 완전히 신에게 복종하여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면, 전능하신 신께서는 기꺼이 그대를 사랑하여 구원할 것이고, 만일 결함과 의심뿐인 자아를 철저하게 제거해 버린다면, 그대는 비로소 그대 자신의 허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신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71)

 

불안해진 르네상스인들은 종교개혁이란 미명 하에 새로운 형태의 복종 및 비합리적인 활동을 감행하고 만다.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신교(프로테스탄티즘)는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의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교보다 오히려 더 인간을 옥죄는 복종의 종교였던 것이다.

 

새로운 종교(프로테스탄티즘)... 개인에게 불안을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철저하게 시인함으로써 전 생애를 속죄하는 과정으로 삼아, 극도의 자기비하와 끊임없는 노력으로써 비로소 회의와 불안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87)

 

 

자본주의 체제와 인간의 자유

 

서구인들에게 있어 종교개혁 이후 수 백 년은 또 다른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기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시킨 게 자유로운 자본주의체제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는 겉으론 인간에게 자유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측면에선 인간을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그리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 그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더 한층 고립시킴으로써 개인들에게 하찮음과 무력감을 갖게 했다.”(94)

 

그렇다면 이런 근대인에게 놓인 선택의 길은 무엇일까? 앞서 본 서문에서 보았듯이 근대인은 두 개의 길 앞에서 방황하고 있다. 근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은, 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밀고나가, 진정한 해방의 길로 나가는 것이다. 근대인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자유를 포기하고 다른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고독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근대인은 어떤 길을 걸었는가? 나치즘에 열광한 독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망명자인 프롬의 눈엔 하나의 거대한 광기가 보였을 것이다. 그 광기는 ,근대인들이 고독의 심리에서 강력한 권위에 항복하는, 과정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찾아

 

이제 이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 의 결론을 들어보자. 그럼, 근대인이 맞이한 이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방법 없이 속수무책으로 이 전체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분명이 길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주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에 달려 있다. 프롬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내가 밑줄 친 부분을 특히 주의하면서 말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근대사상의 이념적 목표였던 개인주의 실현의 정도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는 개인주의의 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가 빈껍데기가 되고 말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자유의 승리는 개인의 성장과 행복이 문화의 목표인 동시에 목적인 사회, 삶이 성공이나 그 밖의 어떠한 것으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사회, 개인이 국가 또는 경제기구와 같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힘에도 종속되지 않는 사회, 마지막으로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이 외부 요구의 내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것이며 그의 자아의 특성에서 생겨나는 목표를 표현하는 그런 사회로 발달할 경우에만 가능하다.”(225)

 

인류가 자유로부터 도피가 아닌 보다 더 적극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해, 프롬이 제시하는 결정적인 방법은, 사실 사회경제체제의 변화다. 지금과 같이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이 경제에 종속되면,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유를 누려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인간의 행복에 경제가 종속되도록 하고, 사람들은 사회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인간은 고독감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롬이 이 책의 마지막에서 강조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경제기구를 종속시킬 때에만, 또한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회과정에 참여할 때에만, 지금 인간을 절망-고립감과 무력감-으로 몰아넣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 모든 권의주의적 체제에 대한 승리는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고 공격태세를 취하여, 지난날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현실화하는 데까지 전진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229)

 

그럼 도대체 프롬이 원하는 사회경제체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할까? 그는 그 체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사회민주주의체제일 거라고 짐작한다. 그는 경제에 종속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와 자유를 잃어버린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다. 그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체제란, 자유가 존중되고 민주주의가 살아 있으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체제, 곧 사회민주주의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2016.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