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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고전강독 8 나는 자유주의자다

박찬운 교수 2016. 5. 12. 15:21

인권고전강독 8

 

나는 자유주의자다

버트런드 러셀의 <자서전>

 

 


 

나는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내가 그를 제대로 안 때로부터 나는 러셀처럼 살다가, 러셀처럼 죽고 싶다는 꿈을 간직해왔다. 그는 내가 사모하는 자유주의자의 표상이었다. 오늘 나는 그에 대해, 한 자유주의자에 대해, 그가 쓴 자서전을 기초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래의 말은 오래 전부터 독자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것이다. 러셀이 보내는 메시지다. 나는 학기 초가 되면 다음과 같은 러셀의 말로 수업을 시작한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러셀 자서전()>, 서문)

Three passions, simple but overwhelmingly strong, have governed my life: the longing for love,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unbearable pity for the suffering of mankind.(원문)

 

이 말은 러셀이 나이 아흔이 넘어 쓴 <러셀 자서전(, )>(송은경 옮김)의 서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살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래 러셀처럼 살아보라’, ‘당신과 이 나라에 희망이 보인다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금세기 미국의 지성이자 양심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가 있는 미국 MIT 연구실에도 러셀의 이 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촘스키는 말한다. 러셀의 세 가지 열정은 바로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러셀은 1872년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그의 조부 존 러셀은 백작이며 빅토리아 여왕 시절 두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다부모인 존과 엠벌리 부부는 러셀이 어린 시절 모두 사망했지만 당대의 대표적 자유주의자였다아버지는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이자 친구였고 어머니는 당대의 모든 철학자를 집으로 초청하여 대화를 즐겼다고 한다.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10년에 걸쳐 자신의 스승이자 친구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에 필적하는 <수학의 원리>을 출간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반전운동에 가담했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 러셀은 철학자로서, 교육자로서, 문학가로서, 반전평화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러셀이 1945년 쓴 <서양철학사>는 서양철학의 흐름을 알려주는 걸작이고 이외에도 철학·수학·과학·윤리학·사회학·교육·역사·종교·예술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1950년대에는 핵철폐운동에 혼신을 다했고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을 비판하는 러셀 민간법정을 조직하기도 했다. 러셀은 1970 2 2 98세의 나이로 영국 웨일스에서 사망했다.

 



연인에 대한 사랑그 열정을 갈망하자


내가 러셀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지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사랑의 열정이 자신을 지배한 첫 번째 열정이었다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만일 러셀의 생애가 그 뛰어난 지성만을 보여주었더라면 나는 그를 존경하기는 했겠지만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셀은 젊은 시절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는 영국의 귀족 집안에서 자랐다. 당시 영국 사회의 도덕률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인간의 본능은 중시되지 않았고 이성의 통제 대상으로만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허위의식에 가득 찬 도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본능에 기초한 남녀의 사랑을 강조했다. 자유연애를 지지했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 막는 어떤 가식도 허용하지 않았다.

 

도덕주의자들은 그가 몇 번이나 이혼을 하고 주변에 여러 연인을 거느린 것을 두고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몰아쳤지만 그는 인간의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단순한 도덕 기준에 의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했다. 러셀은 연인과의 사랑이야말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라고 찬미했고, 연인과 나눈 그 짧은 사랑마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사랑의 희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생각했다." (<러셀 자서전()>, 서문)

 

그러나 이것은 기억하자. 러셀이 무분별한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란 사실을. 그는 분명히 말한다. 연인 사이에 아이가 있는 경우 그 아이에 대한 책임은 무한한 것이라고. 그러니 책임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성적 관계는 두 사람의 모든 인격이 융합하여 새로운 공동의 인격을 형성하는 관계라는 것을.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깊은 친밀감과 굳센 일체감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할 수 없다. 우리가 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나이 아흔이 넘어 이것을 진실된 마음으로 고백한다. 일흔이 넘어 마지막 연인으로 만난 이디스(Edith)에게 러셀은 자서전의 첫 장에서 감동적인 시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디스에게

 

오랜 세월

평온을 찾아 헤맸소.

인생의 환희도, 고통도 만났다오.

인간의 광기를 목도했고

고독함이 무엇인지도 알았소.

내 심장을 갉아 먹던 그 외로움의 고통도 느꼈다오.

그러나 나는 결코 평온을 발견하지는 못했소.

 

이제, , 늙고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신을 알아

인생의 환희와 평온을 찾았다오.

그리고 쉼을 얻었소.

그토록 외로운 세월 끝에

인생이, 사랑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았다오.

, 이제 잠든다 해도

여한은 없을 것이오.


(<러셀 자서전()>, 첫 머리, 이 시는 내가 직접 번역했다. 번역서에 실린 것으로는 러셀의 마음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우리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 이런 시를 바칠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정녕 감사하라. 이런 연인이 없다면 어딘가에 있을 그 연인 찾기를 쉬지 말라.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열정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별이 빛나는 이유를 알고 싶은가

 

러셀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진리추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누구나 진리추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왠지 의무감에서 나오는 소리로 들린다. 내게 큰 공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데 러셀은 다르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시절부터 이런 고백을 해왔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하늘의 별이 왜 반짝이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유전 너머에서 수들이 힘을 발휘한다고 설파한 피타고라스를 이해해 보고자 했다."(<러셀 자서전()>, 서문)

 

러셀은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 들어난 것 이면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알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러셀을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는 본질적인 것을 수로써 풀어보고자 하는 러셀의 꿈을 그린 책이다. 그것은 뉴턴이 만유인력을 기술한 <프린키피아>에 도전하는 또 다른 프린키피아(원리)였다. 그는 이 책을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화이트헤드와 함께 썼는데 무려 10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책을 쓰는 데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작업이었는지를 이렇게 회고했다.

 

"1907년에서 1910년까지, 나는 1년에 8개월 정도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씩 작업을 했다. 원고가 점점 방대해지자 산책길에 나설 때마다 집에 불이 나 원고가 타버리지 않을까 염려하곤 했다. ……마침내 그것을 대학 출판부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양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낡은 4륜 마차까지 대령시켜야 했다." (<러셀 자서전()>, 269)

 

그의 지적 탐구는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철학으로 이어진다. 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대한 그의 진리탐구는 우리가 영원한 명저로 이야기하는 <서양철학사>에서 볼 수 있다. 1,000여 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책을 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의 지적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철학의 세계를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무인지대라 정의하고 2,000년 철학의 역사를 유려한 필치로 그려 나갔다. 그는 어떤 대철학자에 대해서도 결코 주눅이 드는 법이 없었다. 칸트마저 러셀에게는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없었다. 서양철학 전체를 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러셀만의 자신감이었다.

 

자유주의자란 어떤 사람인가

 

러셀의 진리추구는 그를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만들었다. 어떤 것도 그 앞에서는 권위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사상에는 머리를 저었고 자신의 이성을 믿으며 책임 있는 행동을 강조했다. 그럼, 그가 추구한 자유주의란 무엇일까. 그는 자유주의자 10계명이라는 글로 이것을 정리한 적이 있다. 이 중 나의 가슴을 치는 몇 가지만 소개해보자.

 

  1.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말라.

……

  4. 반대에 부딪힐 경우, 설사 반대자가 당신의 아내나 자식이라 하더라도, 권위가 아닌 논쟁을 통해 극복하도록 노력하라. 권위에 의존한 승리는 비현실적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5. 다른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지 마라. 그 반대의 권위들이 항상 발견되기 마련이니까.

……

  7. 견해가 유별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 인정하고 있는 모든 견해들이 한때는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았으니까.

……

  9. 비록 진실 때문에 불편할지라도 철저하게 진실을 추구하라.


  10. 바보의 낙원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말라. 오직 바보만이 그것을 행복으로 생각할 테니. (<러셀 자서전()>, 286~287)

 

러셀의 진리추구에서 중요한 것은 철학 자체의 지적 탐구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철학하는 자세였다. 우리나라에 흔히 철학교수는 많은데 철학자는 없다고들 한다. 우리에게 철학하는 자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러셀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하는 자세를 가지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본질을 보라. 본질을 꿰뚫어라. 그것을 위해 고뇌하라. 그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일지니.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

 

"사랑과 지식은 나름대로의 범위에서 천국으로 가는 길로 이끌어 주었다. 그러나 늘 연민이 날 지상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고통스러운 절규의 메아리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들에게 핍박받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미운 짐이 되어 버린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외로움과 궁핍과 고통 가득한 이 세계 전체가 인간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바를 비웃고 있었다."(<러셀 자서전()>, 서문)

 

러셀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세 번째 열정인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으로 나타난다. 그는 감옥에도 갔다 왔다. 그는 양심범이었다. 백작이었던 러셀이 어찌하여 그런 고통을 스스로 선택했는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반전평화운동에 뛰어든다. 무의미한 전장에서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대신하여 병역에 반대하는 글을 쓴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다. 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가공할 원자폭탄으로 끝을 맺자, 그는 핵철폐운동을 주도한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그것은 인류의 양심에 반한 전쟁이라 선언하고 세계의 양심을 모았다. 이름하여 러셀 민간법정이다. 그는 이 법정을 통해 이 전쟁에 책임 있는 자들에 대해 전범의 딱지를 붙인다.

 

이런 삶은 참으로 쉽지 않다. 어린 시절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을 가진 대저택에서 자라났다. 현직 수상이 저택을 방문하여 자고 가는 그런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상을 두 번이나 지낸 분이고 아버지는 자유론의 저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제자이자 친구였다.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최고 철학자들을 집안으로 초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런 가문에서 배출된 그가 귀족의 영화를 누리지 않고 인류의 고통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연민을 갖고 산 것을 단순히 노블리스 오블리주정신을 실천했다는 것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년 전부터 강남좌파라는 말이 유행한다. 경제적으론 가진 자 계층에 속하지만 진보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조금은 비꼬는 말로도 들리지만, 나는 제대로 된 강남좌파가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믿는다. 비록 가난한 사람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느끼겠지만 언제나 가슴을 열고 민중에게 다가가는 지식인, 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지는 못하지만그것까지 다 내놓으라고 하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참된 인생의 길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과 더불어 가고자 하는 사람, 그런 강남좌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 러셀을 보면서 느끼는 바람이다.

 

 

러셀의 비전이 우리의 비전으로

 

나는 간단하게나마 러셀의 삶을 그의 자서전을 통해 전달 해보았다. 독자들이여, 러셀의 생애가 어찌 보이는가. 러셀의 비전이 우리 우리들의 비전이 될 수는 없을까. 그리할 수 있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은 분명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비전을 좇아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했고, 더욱 더 세속화된 시대에 지혜를 줄 수 있는 통찰의 순간들을 두고자 했다. 사회적으로는 개인들이 거리낌 없이 성장하는 사회, 증오와 탐욕과 질시가 자랄 토양이 없어 죽어버린 사회의 탄생을 그렸다." (<러셀 자서전()>, 563쪽)

 

바로 이것이 사랑으로 고무되고 지식으로 인도되는 삶을 살아온 러셀의 비전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삶의 방향이다. 러셀이 살아 온 것처럼, 나도 자유주의자로서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는 자유주의자다!


(2016.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