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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고전강독7 당신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박찬운 교수 2016. 5. 11. 17:47

인권고전강독7
 

당신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루돌프 본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만만치 않은 책, <권리를 위한 투쟁>
 
내가 법대에 들어가서 법률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소개받은 책이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출해 보니 책 두께가 의외로 얇았다. ‘, 이것 별거 아니네. 한 두어 시간 투자하면 읽어 보겠지하면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도대체 한 쪽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번역도 문제가 있었겠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육중했다고나 할까, 글 자체가 내품는 엄청난 위력 앞에, 나는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법대 1학년 학생이 읽기에는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 읽기를 포기했다.
 
법대를 졸업하고 법률가의 길을 걸은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나는 몇 번에 걸쳐 이 책 읽기에 도전했다. 시중 서점에 4-5종의 번역서까지 나온 상태니 번역의 문제도 상당히 해소된 상태다. 그러나 여전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 책을 꼭 읽고 소화를 하고 싶은데, 법조경력이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게 아니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나는 독자들에게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한번 읽어보라고 선뜻 권하질 못하겠다.
 
내가 학교에 온지 어느덧 10. 나는 종종 교양과목을 통해 학부학생을 만난다. 이번 학기부터는 내가 직접 기획한 <자유의 인문적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이 강좌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권리를 위한 투쟁>(윤철홍 옮김) 읽기를 시도한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이해할 것이란 기대를 걸고. 이하의 글은 바로 학생들에게 이 책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강의안의 일부지만, 사실 나 자신을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법학계의 프로메테우스 루돌프 본 예링
 
강독에 앞서 예링(1818-1892)이란 사람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예링은 19세기 독일이 낳은 최고의 법률가이다. 그는 민법학자였으며 로마법의 대가로 <로마법의 정신>이라는 대저를 남겼다. 바젤, 로스톡, , 기센, , 게팅켄 등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 중 빈 대학에서의 강의는 특히 인기가 있었다. 수강생이 수백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는 러시아 황태자 레오 갈리친을 포함해 세 명의 황태자가 있었다. 갈리친은 예링을 가리켜 법학의 불을 인류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라고 극찬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예링을 세계인들의 뇌리에 위대한 법학자로 각인시킨 그의 주저이다. 사실 이 책은 그가 본격적인 저술활동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1872년 빈대학을 떠나면서 법조협회에서 강연을 한 것이 계기가 돼 그 강연내용을 소책자로 엮은 게 이 책이었다. 하지만 이게 예상 밖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여러 나라로 번역되어 나가 드디어 동방의 나라 대한민국까지 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1891년판의 서문을 보면 저자가 그 때까지 외국에서 번역된 상황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를 보면 일본에선 1886년 번역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도 일제 강점기에 분명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식민치하에서 법학을 배우면서 이 책을 읽은 조선의 법학도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을까? 그들에게 있어 권리를 위한 투쟁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었을까?
 
 
법은 투쟁이다, 권리는 투쟁이다
 
예링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우선 관심을 두는 것은 법과 권리의 본질이다. 그는 법과 권리란 애당초부터 투쟁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 법이 부당하게 침해되고 있는 한그리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이러한 현상은 계속된다법은 이러한 투쟁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의 생명은 투쟁이다. 즉 민족과 국가권력, 계층과 개인의 투쟁이다.”(37)
 
이 세상의 모든 권리는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 중요한 모든 법규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법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쟁취된 것이다.”(37)
 
예링의 이런 생각은 <리바이어던>에서 토마스 홉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홉스는 인간의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자연상태에서는 사람들 간의 투쟁(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전쟁 같은 투쟁을 막기 위해선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필요했다. 국가를 통해 평화를 만든다는 생각이다. 그럼 국가는 무엇을 통해 평화를 만드는가? 바로 법이다. 예링은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법의 목적은 전쟁 같은 무질서를 질서의 상태, 곧 평화로 만드는 것이다.
 
위의 두 인용문의 의미를 새길 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법과 권리의 관계다. 이 두 단어를 뜻하는 독일어는 재미있게도 recht라는 단어 하나다. 독일어에서는 법과 권리가 같은 말로 사용된다. 법이 권리요, 권리가 법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독일인이라도 그 뜻을 금방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좀 그 뜻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예링도 이 책에서 이것을 논하고 있다. 그는 “recht는 객관적 의미의 법과 주관적 의미의 권리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고 하였다.
 
내가 법학을 공부할 때 선생님들 상당수가 독일유학파였다. 이분들 입에선 수시로 저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주관적 권리, 객관적 의미의 법나는 저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저 말이 무슨 말인가? 세월이 흘러 나름대로 그 의미가 드러났다. 여기서 주관적 권리개인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객관적 의미의 법은 개인의 권리가 모여 하나의 평형상태(질서상태)를 이루어 만들어 놓은 규범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 말은 또 무슨 말인가? 내가 설명을 한다면서 더 어렵게 만든 것은 아닌가. 이럴 때는 한 가지 예를 드는 수밖에 없다. 우리의 대표적인 권리문서가 대한민국 헌법이다. 헌법에는 국민의 기본권이 규정되어 있다. 그 중 한 조문만 보자.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이 조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권리(recht)인 양심의 자유다. 양심의 자유는 국민 모두의 개인적 권리(recht)이다.
 
이 조문에서 두 번째로 읽을 수 있는 것은 객관적 의미의 법(recht)이다. 저 조문은 개인의 권리만을 부여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객관적인 법질서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누구도 개인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법질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저 헌법 제19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개인적 권리로서의 양심의 자유요, 둘은 객관적 법질서로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금지규범이다.
 
이런 이해 속에 위의 인용문을 다시 보면 법과 권리라는 단어를 필요에 따라서는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예컨대, 이 세상의 모든 권리는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라는 문장은 이 세상의 모든 법은 투쟁에 의해 쟁취되며...”라고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법과 권리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권리는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는 권리를 재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권리를 관철시키는 검을 쥐고 있다. 저울이 없는 검은 적나라한 폭력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검이 없는 저울은 그야말로 무기력한 법일 뿐이다.”(38)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위 인용문도 읽어보자. 이것은 권리에 대한 이야기지만 권리 대신 법으로 읽어도 말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정의의 여신은 한 손에는 법을 재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법을 관철시키는 검을 쥐고 있다.내가 보기엔 여기에선 오히려 권리 대신 법으로 번역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이렇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이 어려운 것이다. 번역자들은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recht라는 단어를 순간순간 법이라고 번역할지 아니면 권리라고 번역할지를 결정해야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하튼 예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법이나 권리는 그냥 생성·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살아 숨 쉬는 생물과 같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들의 적들과 싸워 이겨 살아남아야 한다. 지금 법의 상태 아니 권리상태가 평화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평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그 법적 상태를, 그 권리상태를 위협하는 요소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그것을 투쟁으로서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도, 권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예링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다음 두 인용문을 보면 더욱 정확해진다.
 
법이 들판의 식물과 같이 고통과 노력 없이 그리고 아무런 행위도 없이 자연적으로 형성된다는 생각은 확실히 낭만적인 관념, 즉 과거의 상태를 잘못 이상화하는 데 사로잡혀 있는 관념이다.(46)
 
법은 어느 민족들에게나 어떠한 수고 없이는 주어지지 않으며, 여러 민족이 법을 위해 노력하고 싸우고 투쟁하여 피를 흘려야만 하는 상황에서 민족과 법은 마치 출산할 때 어머니와 자식이 서로의 생명을 내거는 행위와 똑 같은 내적 유대로 결합되어 있다.”(47)
 
권리를 위한 투쟁은 의무다
 
이제까지 법과 권리의 속성인 투쟁에 대해서 말했다. 지금부터는 그 투쟁을 바라보는 우리 개인의 자세에 관해 알아보자. , 권리자로서의 나 개인이 권리를 바라보는 태도가 어때야 할 것인가이다.
 
내가 과거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당사자를 대리하여 소송을 수행할 때 고민에 빠졌던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제일 어려웠던 게 소송의 이익이 없는 소송을 담당할 때였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버스 운전기사가 내게 소속 회사를 상대로 하는 임금지급소송을 맡겼다. 그런데 그 소송에서 이긴다 해도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백만 원에 불과했다. 내가 그 사건을 무료로 해주는 게 아니니 변호사 비용에 각종 소송비용을 고려하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것 소송을 해서 이긴다 해도 원고가 가져갈 돈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겠습니까?” 뜻 밖에도 그의 답은 단호했다. “저는 그래도 합니다. 이 소송은 돈이 목적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이 일하고도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이 관행을 반드시 개선해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했던 나에게 예링은 이렇게 말한다. 백수십 년 전 독일의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는 까닭은 단순한 금전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침해받은 불법에 대한 도덕적 고통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단지 소송물을 다시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다.”(56)
 
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이란 책에서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한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학생들에게 반드시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우리가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예링이 설명하는 바로 이 부분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링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를 소송만능주의자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투쟁방법은 분명 법이 만든 절차, (대표적인 게) 소송을 말한다. 하지만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소송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권리를 위한 투쟁은 도덕적 생존조건으로서의 투쟁이다. 그게 무엇인가? 우선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인격 그 자체에 도전하는 굴욕적 불법에 대한 저항, 즉 권리에 다한 경시와 인격적 모욕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형태로서의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의무다. 이것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이것은 도덕적인 자기 보존의 명령이며 또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다왜냐하면 권리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법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57)
 
권리를 위한 투쟁은, 누군가가 나의 인격 그 자체에 굴욕적 불법을 자행할 때,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니 굴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는, 누군가의 행위에 의해 내 권리가 침해된다고 해도, 꼭 소송을 할 필요는 없다. 관용의 자세를 베풀면 그것은 미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권리를 무시하고, 내 인격을 짓밟는 경우에도 저항하지 않으면, 그것은 안 된다. 그러한 경우에 투쟁으로 저항하는 것은 나에 대한 도덕적 자기보존의 명령이며 공동체에 대한 의무다.
 
이것은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웃나라가 국경지방의 아주 작은 땅을 침범했다 하자. 그것이 황무지나 마찬가지로 경제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도, 그 침범에 침묵하는 어느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스스로 사형선고에 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웃나라에 의해 1평방마일의 토지를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탈취당한 민족은 종국에는 자기 토지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모두 없어지고, 국가로서 존립하기를 포기할 때까지 나머지 토지를 모두 빼앗기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족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자격이 없다.”(55)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본에 대해 독도를 지켜야 할 명분이다. 독도는 우리에게 경제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다. 그것을 일본 주장대로 그냥 주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대한민국을 사형선고하는 것이다. 그런 대한민국은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자격이 없다는 게 예링의 생각이다.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적 존재를 넘어 도덕적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생존조건이다. 만일 우리가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듣고 이 글을 마친다.
 
권리를 위한 투쟁은 권리자 자신에 대한 의무다. 자신의 존립을 위한 주장은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법칙이다. 모든 생물은 자기 보존 본능을 지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단순히 육체적 생활뿐만 아니라 도덕적 생존도 문제가 되며, 도덕적 생존의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권리 주장이다.”(57)


(2016.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