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5화 젊은 날의 초상

박찬운 교수 2016. 2. 8. 22:19

나와 민변(5)

 

5화 젊은 날의 초상

ㅡ기개 넘치는 변호사의 탄생ㅡ


 


서른 살 무렵의 필자.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나이 서른, 열정 변호사로 탄생하다

변호사 초년 시절, 민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기억 남는 게 많지만 우선 이야기하고 싶은 게 변호사의 용기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변호사는 약간의 능력과 약간의 용기만 있다면 폼나는 사람? 소영웅 정도는 될 수 있는 직업이다. 잘 돌아보라. 변호사 중 영웅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유족들과 동고동락한 B 변호사, 재심사건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간 수형자의 한을 풀어주고 있는 P 변호사.... 이들이 그렇게 영웅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그 동력이 무엇일까? 변호사로서의 능력과 용기가 아니겠는가.


나도 그랬다. 나도 그들만큼이나 끓는 피가 있었다. 나이 서른 살 무렵, 박아무개 변호사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였다. 오늘 소개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는 그 시절 나를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나를 스스로 소영웅으로 만들 것 같아 조금 두렵기는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당시 신문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니 비록 무용담이라고 할지라도 백 프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수서비리사건을 아시나요? 변협 진상조사단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민변에 입회를 할 즈음인 1991년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이 터졌. 이름하여 수서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개발이 불가능한 개발제한구역이었던 강남구 수서-대치지역 공공용지 3만5500평을 26개 주택조합의 건축 시행사인 한보가 정관계에 뇌물을 써 서울시로부터 아파트 택지로  분양받은 사건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그 뇌물이 청와대를 비롯 정치권으로 흘러간 정황이 농후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런 사건을 검찰이 제대로 수사할 리 없었다.

 

19912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대한변협 대의원 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는 변호사 2년 차의 나이 서른으로 그 총회에서 가장 젊은 대의원이었다. 이 총회는 제3화에서 말한 김홍수 변호사가 새로운 변협회장으로 공식적으로 선출되는 자리였다(현재 변협회장은 전국 변호사가 참여하는 선거로 뽑히지만 그 때는 대의원 총회에서 뽑혔다.). 나는 이 순서가 끝나자 총회 의장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발언권을 신청했다.

 

긴급동의 안건을 제출합니다. 저는 유사 이래 최대의 비리사건이라는 수서비리에  변협이 아무런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권과 정의를 제1의 사명으로 하는 변협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사건은 검찰에 의해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저는 변협에 수서비리 특별 진상조사단을 만들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당돌한 제안이었다. 변호사 된 지 갓 1년이 안 된 신출내기 변호사가 20, 30년, 아니 40년 이상의 선배들 앞에서 마이크를 쥐고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 지금도 어렵겠지만 서열을 중시하는 법조 사회에선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제안이 어려웠지 내 제안이 있자 선배들도 특별한 이의가 없었다. 일사천리로 대한변협에 수서비리 특별진상조사단이 만들어졌다. 작년 말 타계하신 조준희 변호사가 조사단장을 맡고 기라성 같은 원로 변호사와 민변 선배 변호사들이 진상조사단원에 참여했다.


면면을 보자. 후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에서 노대통령 측 변호단 좌장역할을 한 유현석 변호사, 대한변협 회장을 지낸 함정호 변호사, 70-80년대 인권변호사의 대부이자 민변 회장을 역임한 홍성우 변호사,  변협회장과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김창국 변호사, 현 서울시장 박원순 변호사, 현 국민의당 대표 천정배 변호사 등. 새 변협회장 김홍수 변호사는 애송이에 불과한 나도 그 조사단에 참여시켰다. 


변협의 진상조사단 활동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취급했는데 그 중 한 기사의 첫 머리를 옮겨본다.

 

우리가 진실 밝히겠다

대한변협, 수서 진상조사 착수백서도 발간 계획

 

어디까지 파헤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끝나지 않은 수서의 진상규명에 나선 대한변호사협의회(변협)에 국민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많은 의혹을 그대로 둔 채 검찰의 수가가 일단 마무리되고, 언론도 지자제 기초의회 선거로 눈을 돌리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진실을 밝히겠다는 법률 전문가 11명의 다짐에 기대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조사단장은 변협 인권위원장이며 지난해까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표변호사였다 趙潗熙. 조사단 실무 총책임자는 金植泰씨 고문사건 특별검사를 맡았던 金昌國 변호사이고 朴元淳 朴仁濟 洪性字 柳鉉錫 李節烈 成正鎬 金聖南 千正培 朴燦運씨 등 주로 민변 변호사들이 조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후략(시사저널, 1991. 3. 21.)

 

변협 진상조사단 활동은 그 후 많은 소득을 거두진 못했다. 수사기관의 비협조로 진실을 캐내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활동이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사당국과 정치권에 준 영향력은 결코 작다고만 할 수 없었다. 변호사단체가 우리 수사기관을 항상 감시하면서 필요한 경우 재야 법조 전체가 변협을 중심으로 투쟁도 불사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귀중한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7일 전쟁? 어느 세입자 변호사의 분노

변호사 2년 차 시절 내 기개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나는 당시 변호사란 직업을 사람이 만든 잘못을 해결하는 해결사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사람이 잘못해서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낸 것 중 사람의 마음만 바꾸면 고칠 수 있는 것은 내가 못 고칠 리가 없다. 나는 그것을 위해 불철주야 공부를 해 온 것이 아닌가? 만일 못한다면 그건 내게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변호사 초년시절을 보냈다.

 

1991년 나는 강북의 S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다. 아무리 변호사가 잘 나가는 때라도 전관예우가 판을 치는 시절에 나 같은 사람이 돈을 벌면 얼마를 벌겠는가. 제대 후 얼마 동안은 19평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하면서 돈을 모아갔다.  그 해 4월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들어간 나는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온 인쇄물 하나를 발견했다.

 

내용을 읽어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 대표회의에서 이 아파트 가격을 담합한 것이다. 천정부지로 아파트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아파트만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하루아침에 가격을 2배ㅡ내가 사는 19평은 당시 매매가가 7-8천만 원 정도였는데 대표회의는 15천만원 이하로 팔면 안 된다고 결의했다ㅡ로 올리는 결의를 하고 전 소유주들에게 그 가격 이하로 집을 팔면 안 된다고 통보를 한 것이다. 심지어는 집을 팔기 위해서는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빨리 돈을 벌어 이 지긋지긋한 셋방살이를 면할까? 아니면 이들과 한판 싸움을 벌려볼까? 결론은 빨랐다. 싸우자!

 

다음 날 사무실로 출근한 나는 바로 편지 8통을 썼다. 아파트 주변 부동산중개사들에게 보내는 공문이었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선전포고였다.

 

입주자대표회의의 가격담합은 불법입니다. 이런 담합에 귀하는 협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가격담합을 협조하면 저는 민형사상 모든 법적 절차를 밟아 귀하와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이어서 당시 사회적 영향력이 대단한 경실련에도 전화를 걸어 이 문제를 의논했다. 전화를 걸기 무섭게 반응이 왔다


박변호사님, 이것 어떻게 할까요? 크게 싸움 한 번 하실 겁니까?”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제가 세입자들을 모아볼테니 다음 주말 저희 아파트 한 가운데서 시위 한 번 하죠. 그 때 경실련이 응원해줄 수 있죠?” 

물론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겠습니다.”

 

방송을 포함해 몇 몇 신문사에도 이 아파트의 가격담합을 알렸고 이런 담합이 만일 유행처럼 번진다면 서민은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시장은 엄청난 가격 왜곡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동아일보에 나온 아파트 가격담합 기사

 

나는 한 발 더 나가 한쪽 짜리 격문을 급히 만들었다. 아파트 세입자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었는데 내용은 세 가지였다. 이번 아파트 가격담합은 불법이라는 것과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입자대표회의를 결성하고 돌아오는 주말에 아파트 마당에서 외부 시민단체와 시위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인쇄소에 넘겨 당장 천 장을 인쇄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내 사무실에는 인쇄된 천 장의 격문이 도착했다. 나는 이것을 800세대 아파트 가가호호에 넣을 것을 계획했다.

 

그 다음 날부터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건 신문 기사다. 동아일보 사회면에 '아파트 집값 담합 인상'이란 표제 하에 제법 비중 있는 기사가 하나 나왔다. 거기엔 내 인터뷰 기사도 나왔는데, 그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

 

... 세입자 박찬운 씨(32, 변호사, 세림아파트 4동 201호)담합하지 않아도 집값이 뛰고 있는데 이같이 협정가격을 정하는 것은 무주택서민들에게 엄청난 좌절을 안겨주는 것이며 또한 아파트값 상승은 전세금 상승을 유발, 실질적으로 세입자들을 길거리로 내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법적으로도 계약자유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인 만큼 이 방침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시민단체와 연대해서 세입자들도 대책위를 만들어 전세금 동결을 결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91. 5. 1)


(여담이지만 이 기자는 왜 내 이름 뒤에 내 직업이며 내가 사는 아파트 동호수까지 썼을까? 요즘 같으면 이런 기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취재원을 이렇게까지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호사' 세입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변호사가 셋방을 산다는 게 신기했던가? 또 재미 있는 것은 내 나이도 틀리게 썼다. 나는 그 때 만 나이로 30이 안 되었을 때인 데 32세? 이건 뭔가? 나이가 30이 넘지 않으면 아무리 변호사라도 그 말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인가?)

 

이 기사가 나오자 경찰서와 구청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경찰서 수사과에서는 이런 담합행위가 범법행위가 되면 수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내게 법적 자문을 요청해 왔다. 구청에서는 부동산중개인들을 불러 이런 담합가격 결정에 절대 협조해서는 안 된다고 압박했다.

 

입주자대표회의의 가격답합 결의가 있고나서 일주일이 되는 날, 저녁에 퇴근을 하자 대표회의에서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곧장 관리사무소로 내려갔다. 거기엔 대표회의 회장 및 간부들이 쭉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핑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91426일 자 입주자대표회의가 아파트 가격에 대해 결의한 내용53일 자로 철회합니다.”

 

일은 이렇게 일주일만에 종료되었다. 가격담합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7일 전쟁이라 명명했다. 십 수년 전 사법연수원 동기회 회보 편집자가 내게 찾아 와 후배들을 위해 글 하나를 써 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나는 이것을 소재로 제법 격정적인 글을 써 회보에 실은 적이 있다. 후배들이 내 글을 읽고 어떤 생각들을 했었을까?


나이 서른 살 무렵 변호사로서의 내 삶은 이런 것이었다. 기개 넘치는 청년, 불에라도 뛰어 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변호사였다. 내 젊은 날의 초상은 높고도 푸른 하늘이었다.


25년이 지난 오늘, 내 모습은 어떤가? 서른 살의 그 열정은 아직도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시나브로 열정은 사라지고 나도 한 때가 있었다면서 과거 무용담을 늘어놓는 뒷 방 이야기꾼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2016.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