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4화 민변 변호사가 되다

박찬운 교수 2016. 2. 7. 22:12

나와 민변(4)

 

4화 민변 변호사가 되다

ㅡ보람과 번민의 시절ㅡ

 

 

고용변호사로 출발하다

19902월 말 부로 군문을 나왔다. 이제 내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저 법정이란 무대에 나는 어떤 변호사로 이름 석 자를 올려야 할까?

 

제대 몇 달 전에 우연히 서초동에서 개업 변호사로 있는 대학선배 김00변호사를 찾았다. 식사를 같이 하면서 제대 후 진로를 이야기하다가 변호사 한 분을 소개 받았다. 법원 앞 정곡빌딩에 사무실을 둔 00변호사였다. 이야기는 쉽게 진행되어 제대와 동시에 그 사무실에 출근하기로 하였. 고용변호사로 취직한 것이다.




1990년 서울 서초동 법원 앞 정곡빌딩에서 고용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필자

 

당시 변호사들의 처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요즘 변호사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과거 일이니 허물없이 들어주기 바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변호사의 희소성이 처우를 결정했다. 전국에 개업 변호사 수가 2천 명이 채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 2만 명이 넘는 오늘과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이야 연수원을 수료하거나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되는 경우 김앤장 같은 굴지의 로펌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로 치지만 당시엔 꼭 그렇지 않았다. 그 때도 김앤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로펌이라고 했지만(그 시절 김앤장의 변호사 수는 기십 명 수준이었음, 현재 김앤장 변호사 수는 700명이 넘음) 거기서 받는 월급이나 내가 받는 월급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업무강도를 생각하면 개인 사무실에서 고용변호사로 일하다가 단독개업하는 게 낫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박00변호사 사무실을 택한 것은 거기서 뭔가 많이 배울 게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박변호사님은 나보다 연수원 12년 선배였는데 최연소 합격을 해 판사생활을 하다가 고교 동창생인 정00변호사와 동업으로 사무실을 연 분이었다. 00변호사도 수석합격을 한 분인데다 검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배울 게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정변호사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박변호사님으로부터는 많은 것을 배웠다. 일단 워낙 사건이 많은 사무실이었기 때문에 단 시간 내에 많은 유형의 사건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사무실엔 한 달 평균 재판기일이 잡히는 사건만 무려 2백 건이 넘었다. 한 번 재판기일에 나가면 열 건 이상을 가지고 나가 원피고석을 오가면서 진행을 해야 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커버하는 법원 수가 의외로 많았다. 서울 서초동 법원(지방법원, 고등법원, 가정법원)과 동서남북 지원(당시는 지금의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서울민사지방법원과 서울형사지방법원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본원이 서초동에, 동서남북에 지금의 지방법원인 지원이 있었음), 수원, 의정부, 인천 법원까지 내가 가야할 곳이었다. 아침 10시에 수원에서 사건 10건을 처리하고 쏜살같이 서초동으로 달려와 5건을 오전 내에 처리하는 날도 있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을 할 수 없는 사건처리일 것이다.

 

박변호사님 발군의 민사변호사였다. 출중한 실력의 소유자로 민사판례를 다 꿰고 있었고, 사건 서면을 빈틈없이 작성하는 분이었. 한 달에 2백 건이 넘는 사건인데도 혼자서 완벽하게 핸들링할 수 있는 변호사, 그 분이 박변호사님이었다. 이 사무실은 사무장이 서면을 쓰는 사무소가 아니었고 전적으로 변호사가 썼다. 당시로선 매우 희귀한 사무소였다.

 

박변호사님의 특기는 신속, 정확이었다. 수십 쪽의 준비서면도 하룻밤이면 다 썼고 심지어는 간단한 서면의 경우 법정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작성했다. 법정에서 변호사 석에 앉아 순번을 기다릴 때도 서면을 작성해 사무실에 돌아오는 즉시 직원에게 초고를 던져주며 타이핑을 지시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분은 사무원 들을 제대로 훈련시키는 남다른 특기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사무실 사무원보다 우리 사무원들의 실력이 좋았다. 우리 사무실은 변호사가 판결을 받아주면 나머지 집행절차는 사무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작은 사무소였지만 꼼꼼히 만든 근무규칙이 있었고, 간간히 직원들에게 시험을 실시해 잘 본 사람에게 상금을 주기도 했다. 짧은 고용기간이었지만 나는 박변호사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은 후일 내 사무실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박변호사님 사무실에서 10개월 가량 일을 하고 1990년 가을 단독개업을 했다. 그 경위가 내가 새로운 세계인 민변의 변호사가 되는 과정이다.




1990년 11월 나는 서초동에서 단독개업을 했다. 개업식 날 필자. 바로 옆 여성은 내 사무실의 여직원 남희 씨, 그녀는 나와 3년을 같이 일하고 결혼과 함께 퇴직했다. 그 후임은 그녀의 친동생 남문희 씨. 문희 씨는 나와 1년 쯤 일을 같이 하다가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사무실을 정리하자 내 동기 변호사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 11월 개업식 장면, 나는 몇 차례 사무실을 옮겼지만 이런 개업식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변협회장 퇴진운동을 주도하다

1990년 가을 어느 날 나는 연수원 동기생인 윤기원 변호사의 소개로 한참 선배인 조영황 변호사님과 저녁 자리를 같이 했다. 거기서 나온 말. “박 변호사, 변협회장 박승서 변호사가 강민창을 변호한 것 알아?” 금새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변협회장이 박종철군 사건 은폐주모자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변호했다고요?” 이 대화가 다음 날부터 재야 법조를 뒤 흔드는 사건으로 발전했다.

 

조변호사님을 필두로 나와 몇 몇 젊은 변호사들이 앞장 서 박승서 변협회장의 퇴진 운동을 주도한 것이. 내가 직접 퇴진 성명문을 썼고, 일일이 전화를 돌려 전국 변호사들을 규합했다. 모두 108명이 동참했다. 이들 중민변 변호사 50여 명이 참여했으니 민변이 성명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들 성명 참여자들의 생각은 단순했다. 인권단체로서의 변협의 위상에 비추어 그 수장이란 사람이 전두환 정권 하에서 최대의 인권유린사건이라 불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주모자를 변호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른 변호사라면 달리 말할 수도 있. 어떤 사람이라도 변호 받지 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박승서 변협회장 사퇴성명과 관련된 동아일보 기사(1990. 9. 6)

 

이 퇴진 운동은 그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몇 달 후 치러진 차기 변협회장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젊은 변호사들(대부분 민변 회원이었음)불의한 정권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변협회장이 되어야 한다며, 그럴만한 후보자에게 표를 주자고 호소했다.

 

우리들의 지지에 힘입어, 김홍수 변호사라는 당시로선 무명의 변호사가, 새 변협회장에 당선되었다. 사실 우리 지지자들도 그분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그 분이 5.16 군사 쿠데타 시절 서울지검 검사로서 군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옷을 벗었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그 퇴진운동을 계기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이런 일을 한다는 게 고용변호사로선 감당키 어려웠다. 성명이 나가자 기자들이 사무실에 찾아오곤 했는데 내가 모시는 변호사님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좀 이른 결정이지만...  마음은 이미 이렇게 기울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민변 변호사들처럼 자유롭게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필요할 때 목소리를 내자.' 


민변에 가입하다

당시 민변의 가입절차는 기존 회원의 추천을 받아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 내 추천은 윤기원 변호사가 담당했다. 1991년 초의 일이다. 당시 민변은 회원 50여명의 단출한 단체였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 민변 회원 수는 1천명을 돌파했으니, 실로 격세지감이다.






민변은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후 많은 회원들이 피해자 가족을 도왔고 그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다.



민변의 최근 활동을 알 수 있는 뉴스레터

 

올해로 민변이 창립된 지 28년이 되었다. 창립 초기 민변 변호사들은 주로 시국사건에서 구속된 양심범을 변호하였다. 시간이 가면서 민변의 역할은 이에 그치지 않고 확대되었. 악법개폐운동을 벌렸고, 시민사회단체에 법률자문을 해주었으며, 유엔으로 인권활동의 장을 넓혀 국제적인 인권활동을 벌려 나갔다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는 민변 회원 들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해 문재인, 박원순, 천정배 등 다수의 정치인이 배출되었


그러니 지난 이십 수 년 간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논함에 있어 민변의 역할을 빼고 말할 수가 없. 물론 민변 활동 중엔 부족한 것도, 비판받을 것도 있겠지만, 민변 변호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91년 이후 내 변호사 생활은 민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무실에선 수임한 사건을 처리하고 그것이 끝나면 사무실 근처에 있는 민변 사무실로 달려갔다. 개업 변호사로서 돈도 벌어야 했지만, 민변 변호사로서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것은 내게 보람을 가져다 주었다. 변호사 생활 2년이 끝나가는 1991년 말 나는 이런 일기로 그해를 마감했다.

 

“2년째를 맞는 변호사로서의 생활은 그런대로 보람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사건을 처리하며 돈도 조금 벌었. 그러나 무엇보다 내겐 변호사로서사회적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데에서 강한 자부심이 있다. 지난 한 해 처리한 평화방송사건, 국가보안법사건, 노동사건, 세인을 놀라게 한 살인사건 등은 돈과 관계없이 큰 보람을 가져다 주었. 젊은 시절 이렇게 큰 사건, 역사를 흔들고 있는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꽤나 감격스런 일이다.”(19911231)


이런 자부심이 있었다고 나를 무슨 대단한 인권변호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돌아보면 자부심은 컸지만 하루하루의 삶은 다른 변호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민도, 걱정도 많았다. 내 사무실은 천수답이었지, 가뭄 걱정이 없는 문전옥답이 아니었다. 


나의 삶의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돈에 대한 유혹도 컸다. 무엇인가 냉철한 비판의식으로 무장된 용기 있는 변호사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변호사로 남들만큼 폼나게 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무실 유지가 잘 안 될 때는 의()보다는 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내 맘을 일기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변호사 생활. 아직도 나는 계발되어야 할 의식세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냉철한 비판의식과 투쟁의지는 아직도 부족하기만 하다. 경제적 욕구가 의에 대한 욕구보다 강렬하다. 용기와 기개는 시나브로 꺾여만 가는 것 같다. 성격상 방관자는 되기 싫은 데 생활의 대부분은 관전자 수준을 넘지 못한다."(1991년 11월 30일)


(2016.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