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민변

제3화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한 곳 대한민국 군대, 그 두번 째 이야기(2)ㅡ나는 누구를 대변해야 하는가ㅡ

박찬운 교수 2016. 2. 6. 14:13

나와 민변(3)

 

3화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한 곳 대한민국 군대, 그 두번 째 이야기(2)ㅡ나는 누구를 대변해야 하는가ㅡ

 

 

군대는 새로운 도량

군대는 내게 치욕을 안겨다 주었고 어렴풋하게나마 차별이 무엇인지알려준 곳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값진 도량이기도 했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다. 특히 교양을 갖춘 법률가의  삶은 바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법학 이외의 분야에서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대중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초는 바로 군대시절 다져진 것이었다.

 

정훈장교로서의 삶은 내게 세상을 보는 눈과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 내가 만일 법무관으로 군 생활을 했다면 내 인생은 협소한 경험의 틀을 벗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대학 이후 고시공부만 해온 나로서는 내가 살아온 이 대한민국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론 어려서부터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비판적 의식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그 의식은 자주 모호했고, 현실을 이론으로 설명할만한 실력은 부족했다.

 

 

1987년 여름 나는 육군 제11사단 정훈장교로 전입되었다. 전입식을 마치고 사단장, 참모장 등과 함께.

 

 

나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가까스로 대학을 들어와 고시의 관문을 뚫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이런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인생진로는 대개 돈을 벌고 권력을 쫓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뭔지는 잘 몰랐지만, 뭔가 모호하긴 했지만, 나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싶었다

 

돈과 권력보다는 귀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법률지식만으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법률 외에 광범위한 지식을 겸비해야 했고, 그것을 얻는 노력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기회를 군대에서 가질 수 있었다.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 한다.

 

1987년 대선명백한 부정선거

내게 맡겨진 정훈장교의 주된 임무는 이념교육이었다. 장교와 사병에 대해 확고한 국가관, 반공관을 갖도록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이고 자대에 배치된 1987년 여름 이후의 실상은 매우 당황스런 현실이었다. 6.29 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자 곧 바로 대선국면으로 들어갔다

 

독재를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에 돌입했으니 거기에 걸 맞는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은 절대다수였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YSDJ로 야권이 분열된 덕에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는 어부지리로 대통령이 될 판이었다. 

 

198712월 치러진 대선은, 적어도 군대 내에선,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당시 군은 노골적으로 노태우를 지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어야 안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정신교육이 곳곳에서 이뤄졌다. 군대 내에서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게 정훈장교의 임무였다. 사단장의 연설문을 대신 써주고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정훈장교들이 했고 육본에서 내려오는 자료로 장교와 사병을 교육시키는 책임도 정훈장교 들의 몫이었다.

 

1987년 대선기간 동안 내가 사단에서 한 역할은 별로 없지만 선거와 관련된 교육을 위해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사단장과 각 급 부대장은 장교와 사병을 모아 놓고 연일 훈화를 하면서 여당 후보를 찍을 것을 반강제했다. 더욱 대선을 며칠 앞두고서는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당시 충정작전이란 게 있었는데, 이것은 소요사태가 일어났을 때 위수령을 발령하고 군이 직접 진압에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군 수뇌부는 대선기간 중 광주민주항쟁 같은 소요가 전국적으로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군투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표일 며칠 전부터는 전 사단에 비상이 발령되어 모든 간부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영내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사단 연병장엔 수백 대의 차량이 동원되어 명령만 떨어지면 작전지역인 광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도 용케 투표 전날 밤 부대를 빠져 나왔다. 당시 참모였던 선00 소령에게 집안에 화급을 다투는 일이 있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서울 집에 잠시 다녀오겠다면서 외출증을 발급받았다. 나는 그 밤으로 서울로 직행 당시 집이 있는 상도동에 도착해,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아침 투표장으로 가, YS에게 한 표를 던지고 부대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전진하지 못했고 결국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다. 

 

이념교육을 하면서 새로운 독서에 빠지다

해가 바뀌어 1988년이 되자 부대는 정상화되었다. 이때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정훈장교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념교육이 전년도보다 더욱 강화되었는데 사단에선 예하부대 정훈장교까지 통합운영하여 사단 이념교육지원대라는 것을 만들었다. 나는 이 교육대의 대표강사로서 홍천에 산재하는 11사단 전 예하부대(9, 13, 20 연대 및 포병연대 그리고 사단직할부대)를 거의 매일 순방하면서 교육에 임했다.

 

 

사단 정훈장교 시절 예하부대에서 사단 법무참모 이승재 변호사와 함께

 

내가 주로 강의한 내용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한민국 통일방안 등이었는데 대부분 교재를 내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육본에서 보내 준 자료가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그 자료 중 일부 쓸만한 내용만 참고했고 나머지는 내가 입수한 자료를 활용해 누가 들어도 그럴 듯한 내용으로 정리했다. 아무리 군대 내 교육이라도 나는 보편성을 결여한 교육은 할 수 없다는 내 나름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만든 교안을 민심참모가 크게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론 껄끄러운 사이였던 이00 소령도 내가 문건을 만들어 보고하면 , 벌써 만들었나. 잘 된 것 같네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교육현장에서의 나에 대한 신뢰도 한 몫 했다. 장교들을 상대로 교육할 때 나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들이 이제까지 보아 온 정훈장교와는 뭔가 다른 유형의 사람이 왔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나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에서는 장교 교육에선 우리 군의 문제를 언급했고, 정부정책도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조금이라도 의식 있는 장교들 사이에선 내 교육에 대한 신뢰로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나는 일반장교들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정훈장교로서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나는 서서히 그동안 보지 못한 이념서적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군대 내에선 볼 수 없는 금서를 아무 제한 없이 보았다. 혹시 누군가 이를 보고 어떻게 군대 내에서 그런 책을 읽느냐 하면 내겐 준비된 변명이 있었다.

 

아니 내가 사단 이념교육 담당 장교인데, 불온한 서적의 내용도 모르고 어떻게 교육을 합니까? 나는 지금 이 불온한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확인하는 중입니다. 이건 내 고유업무입니다.”

 

지금도 서가에 꽂혀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지만 당시 내가 관심 있는 책은 매우 다양했다.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일과 중엔 부대 내에서, 퇴근 후엔 집에서 읽어갔다. 우선 우리나라의 현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해방 전후 한반도의 분단과정과 식민지 청산에 대해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대학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한길사의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를 구입해 밑줄을 치면서 읽었다.

 

 

정훈장교 시절 읽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와 김수행 교수의 정치경제학원론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

내가 살아온 대한민국이 미몽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역시 리영희 선생의 저서가 단연 발군의 역할을 했다. 내가 70-80년대 교육받아온 많은 사실들이 사실 허상이었고 우상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사상의 은사였듯이 내게도 그런 존재였다

 

<우상과 이성>, <베트남전쟁>, <8억 인과의 대화>, <역정> 등 당시 선생이 펴낸 책들은 거의 전부 읽었다. 이런 독서로 말미암아 모교 최고의 지성인 리영희 선생을 대학을 졸업하고 3-4년 후에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저작물, 나는 군대 이후에도 선생의  마지막 저서인 <대화>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책을 꾸준히 읽었다.

 

 

한참 리영희 선생의 책을 읽던 중이었던 1989년 여름 한겨레신문의 북한방문 취재기획 사건이 터졌다. 논설고문인 리영희 선생의 방북취재 기획을 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사하여 선생을 구속시킨 사건이었다. 검찰은 그해 9월 선생에게 징역 4년에, 자격정지 4년의 구형을 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분개했는지 모른다. 그 즈음 쓴 내 일기장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문제는) 한겨레신문사의 연초 방북취재 계획과 그에 기한 리교수의 편지 1통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가 지배하는 영역에로의 탈출죄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게 유죄라면) 이는 상식에 어긋나는 법적용이다. 탈출이라는 개념을 아무리 법률가의 논리적 분석능력으로 새롭게 정의한다 해도 언론인이 취재를 위해 방북하는 것을 탈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반 상식을 초월하는 법적용은 이미 정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 탈출예비죄는 원래 입법당시부터 간첩죄와 같은 중죄에 있어서나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한 법조항을 무분별하게 언론사의 취재계획에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은 분명히 법적용의 남용이요, 민주화와 통일에 역행하는 행위이다....정부가 정령 대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겠다면 국보법을 폐기하거나 전면적으로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1989. 9. 13)

 

 

서대숙 교수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와 김준엽 선생의 <장정>

 

학문의 스승 김준엽 선생을 만나다

김준엽 선생도 내가 군에서 만난 사상의 은사로서 빼놓을 수 없다학병으로 끌려가 장준하 선생과 일군을 탈출해 중경 임시정부까지 6천리 길을 걸어갔던 그 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끓는다해방이 된 후 수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곳곳한 선비의 모습을 잃지 않고 평생을 오로지 중국사 연구에 바치신 선생의 이야기는 내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 주었다.

 

1988년 선생의 책 <장정>이 나왔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안광이 지면을 뚫듯 읽었다마치 내가 그분의 20대가 되어 중국 대륙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겼다. 특히 머리말을 읽으면서 선생의 기록하는 습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젊은 시절 중국에 있으면서 꼼꼼히 일기를 쓰신 모양이다그런데 그것을 한국전쟁 때 잃고 말았다그 애절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수기를 쓰는데 가장 아쉬운 것은 대륙생활 5년간(1944년 2-1949년 1)에 내가 적어놓은 일기를 분실한 일이다. 6.25 사변이 났을 때에 나는 처자와 함께 손에 들고 피난한 것은 오로지 이 일기책뿐이었는데네 살난 아들을 등에 없고 관악산을 넘어 남하하다가 한 손에 든 일기책을 들고 갈 힘이 없어 부득 산 속에 내던졌던 것이다. ... 나의 가장 으뜸가는 보물이었지만 생명과는 바꿀 수가 없어 내버린 것인데 일생 두고 한스러운 일이 되었다.”(머리말)

 

이런 말씀에 힙입어 나는 대학시절 이후 써 놓은 일기장을 나의 보물 1호로 삼는다이사를 할 때 내가 제일 먼저 챙겨 내손으로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는 게 내 일기장이다오늘 이 글도 그런 일기장이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과 군대시절 꼼꼼히 일기를 썼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일기가 없었다면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의 보물1호다.

 
 

운동권의 좌파사상을 섭렵하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것을 드디어 정훈장교가 되어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대숙 교수의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가 기본교재였다. 나는 이 책을 얼마나 자세히 읽었는지 모른다. 마치 고시공부하듯 읽었다. 이 책을 읽고 났을 무렵 성남의 국군행정학교에서 일주일 동안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한 주일 무료한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나는 그 기간 가지고 간 노트에 내가 얼마만큼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연구>를 기억하고 있는지 써나가기 시작했다. 한 권의 노트가 거의 채울 정도로 그 책 내용을 기억해 냈다. 공산주의의 이론에 대해서는 김수행 교수의 정치경제학 책들이 동원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번역된 자본론을 구할 수 없었다. 김교수가 번역한 자본론은 제대 후 한참 후에서나 읽을 수 있었다.

 

군 생활을 마무리 할 때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서독의 통일을 보면서 이것이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나는 일기장에 이런 문제를 정리해보았다.

 

80년대를 유행했던 사상서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이해를 위한 소위 사회구성체(사구체) 이론이었다. 운동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야 대학시절 대부분 이를 섭렵했겠지만 나는 그때까지 이런 것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바가 없었다. 한국 사회를 식민지반()자본주의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후일 좌파 운동권을 민족해방파(NL)과 민중민주파(PD)로 나누는 이론적 배경이 되는데 당시 책이나 각종 글을 통해 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운동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공부였다. 나는 이런 이론에 상당히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을 그 당시부터 알고 경계했다. 우리 사회를 그렇게 도식적으로 재단해 변혁운동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내가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군대시절 내가 알고 싶은 것 중에선 해방신학과 종속이론도 빼놓을 수 없다. 군대시절 나는 종교적으론 가톨릭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항상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고민했고, 남미에서 일어나는 반독재 투쟁과 거기에서의 종교의 역할에도 관심을 가졌다.

 

19898월 내 일기장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달에 본 영화 <로메로>를 보고 쓴 대목이다. 이 일기는 내가 당시 해방신학이나 종속이론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는 증거다. 

 

“ 6만 명 이상의 국민을 살해한 엘살바도르 군부의 잔학한 행동에 소름이 끼쳤다. ... 이런 현실에서 싹튼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사목하는 신부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든 사제의 절규가 어떤 비판을 받아야 하는 지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그런 압제적 상황에서 바른 신앙이란 무엇이고, 목회자의 길은 어떠해야 하는지...”(1989. 8. 27)

 

 

군대시절 가장 정성스럽게 읽은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소설이다.

 

<태백산맥>을 독파하다

마지막으로 당시 읽은 책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이 소설이 완간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제대 전에 죄다 읽었다. 그것도 그냥 읽은 게 아니고 밑줄 쫙쫙 치면서 말이다. 1989년 말 <태백산맥> 완독하고 그 내용을 정리한 일기장을 보자. 

 

<태백산맥>을 읽고 일기장에 일종의 리뷰를 썼다. 특히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 소설에서 그리고자 했던 이데올로기는 수다한 것이었다. 6. 25 전쟁 전 상황에서 작가는 염상진을 순수한 열정을 지닌 정통 혁명가적 공산주의자로, 김범우를 중도적 민족주의자로, 손승호를 흔들리는 진보주의자로, 서민영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최익달, 염상구, 유주상, 남인태 등은 극우적 반동주의자로 묘사했다. ... 작가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것은 극단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민중이 의식을 자각하여 열혈 공산주의자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일자무식한 하대치, 강동기, 외서댁, 오판돌, 이태식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1989. 11. 23)

 

나는 책을 덮고 <태백산맥>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한 사람씩 정리도 해보았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염상진: 빈농의 자식. 보성군당 위원장으로 여순사건 이후 조계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운동을 전개. 전쟁 중에 도당으로 옮겨 총사 부사령을 지냄. 하대치, 천점바구 등 빈농출신 빨치산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 냉철하고도 사려 깊은 성격. 지리산에서 53년 휴전 직후 경찰과 교전 중 부하 4명과 함께 자폭.”

 

독서가 남긴 것

이런 독서는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것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방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군대라는 곳은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넘치는 곳이지만, 내 인생에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보적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전역 후 변호사 일을 하기로 애초부터 맘을 먹고 있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연수원을 수료하면 성적만 되면 법원이나 검찰에 가는 게 주류였다. 우리 동기생들도 300명 중 200명 이상이 그런 길을 택했다. 내가 그 길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성적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애초부터 관에 들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어린 시절 집안의 좌익배경 때문에 공직은 어려울 것이라는 소릴 듣고 살았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그런 것이 나를 자연스럽게 자유인으로 만들었다. 내겐 연수원을 나오면 변호사로 나가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연수원 졸업 시에도, 군에서 제대를 해 법원, 검찰 지원 시에도, 일체 내 성적을 확인한 적이 없다.

 

내가 내 성적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은 연수원을 졸업한 지 거의 20년이 지난 2005년에서였다. 국가인권위원회 정책국장으로 들어가면서 제출 서류 중 하나가 연수원 성적증명서가 있어 그 때 그것을 보고 자못 놀랐다. ", 이거 상당히 괜찮았네! 나 때문에 동기생 한 사람 법관이든 검사든 되었겠군!”

 

내가 갈 길은 누가 뭐라해도 변호사였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그게 누구인가. 돈 많은 개인?, 대기업? 빈자? 노동자? 중소상공인? 내가 주로 만날 사람들은 누구일까? 군대에서 내가 공부하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변호사란 직업을 통해 돈을 벌 것이지만 그것을 결코 돈버는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 내게도 권력의 유혹이 있을 테지만 결코 권력의 주구가 되지 않겠다.’ 

 

이런 결심이 제대 후 과연 어떻게 실현되어 갔을까? 만만치 않은 도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2016.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