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1)-민주주의와 기억의 도시, 산티아고-

박찬운 교수 2024. 1. 25. 09:46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11)

-민주주의와 기억의 도시, 산티아고-

 

Podrán cortar todas las flores, pero no podrán detener la primavera (Pablo Neruda)

"그들이 모든 꽃을 꺾어 버릴 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어요"
 

기억과 인권 박물관, 칠레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했던 시기(1973-1990)에 희생되었던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이제 여행의 절반이 지나갔다. 지난 보름간 주로 페루와 볼리비아의 고원지대를 여행했다. 이제 여행 후반기는 사뭇 환경이 다를 것이다. 고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아름다운 남미의 풍광을 즐기면 된다. 우리 일행은 남미 자연기행의 핵심인 파타고니아로 간다는 기대로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파타고니아 여행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거쳐 비행기를 타고 남미 대륙 맨 끝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파타고니아로 가기 전에 단 하루의 시간이지만 산티아고를 그냥 넘길 수 없다. 칠레의 역사와 민주주의를 알 수 있는 산티아고를 짧게라도 경험할 절호의 찬스를 잡고 싶었다.
 

산티아고의 시내. 시대를 걷다보면 이곳이 원주민과 혼혈 메스티조 그리고 백인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아타카마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칼라마 공항에서 산티아고까진 두어 시간 남짓. 일행은 점심 무렵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에 있는 호텔로 이동하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티아고는 산업화된 세계의 어느 도시와 비교해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도심으로 들어 갈수록 옛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칠레가 산업화되면서 과거의 올드타운에서 현대도시로 광역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 풍경이다.

오후 시간은 온전히 자유시간. 오기 전 둘러볼 곳 몇 군데를 정했기 때문에 좌고우면할 필요는 없었다. 호텔 체크인을 하자마자 피자 한판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우버 택시를 불렀다.
 

기억과 인권 박물관, 외관부터 심상치 않다.

 
첫 번째 행선지는 기억 및 인권 박물관(Museo de la Memorian y los Derechos Humanos). 칠레에 대한 나의 강렬한 기억은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국제인권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칠레에서 온 동기가 칠레의 과거사 문제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가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민주정권이 들어선 이후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제인권법적 이슈를 이야기할 때 칠레의 경험이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70년대 칠레는 피노체트의 구데타에 의해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고(1973), 17년 간에 걸친 군사정권의 참혹한 독재를 경험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반체제 인사로 찍혀 비밀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1990년 피노체트의 철권정치는 막을 내리고 칠레에 마침내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과거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은 칠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져 군부독재 기간 중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가 이루어졌고 방대한 기록물이 만들어졌다. 이어서 새로 들어선 민주정부는 이 기록물과 각종 증거 등을 모아서 이런 역사가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교육의 장을 만들기로 한다.

이런 작업은  칠레의 최초의 여성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에 의해 주도되었고 2011년 마침내 이 박물관이 개관된다.
 

박물관의 내부 모습, 벽면에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희생된 피해자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다.

 
박물관에 다가가자 벽면에 무엇인가 써 있다. 자세히 보니 세계인권선언 조문이다. 박물관을 찾는 이들에게 인권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알려주는 것이다.

현관을 들어서자 높은 벽면에 빼곱하게 수천 명의 사진이 붙여져 있다. 희생자를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 호명하는 것이다.  전시관 내엔 피해자들이 어떻게 고문을 받았는지 당시 고문실을 재현해 놓았다. 자세히 보니 전기 고문 기계가 절체 침대 옆에 놓여 있다.

특히 눈길이 갔던 것은 피해자들이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선물이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서 아내와 자식에게, 부모님과 형제 자매에게, 정성스럽게 그림을 그리거나 뜨개질 선물을 만든 피해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피노체트 정권 하에서 감옥에 갇힌 양심수가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썼다.
박물관에 많은 젊은이들이 보였다. 이들에게 이 박물관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교육장이다.

 
생각하면 저 박물관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과거도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주의가 말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 당하고 죽어갔다. 민중이 들고 일어나자 군부는 총탄으로 답했다.

이런 역사를 갖고 있기에 칠레의 기억과 인권박물관은 대한민국에서 향후 만들어질 기억과 인권 박물관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그곳에 온 젊은이에게 사진 한 잔을 부탁했다. 그녀는 나의 방문이 고마운지 오래동안 이곳을 기억해달라며 여러 각도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라 차스코나

 
나의 두 번째 행선지는 라 차스코나(La Chascona).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살았던 집이다. 네루다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남미의 대표적 문학가다. 국내에는 이미 그의 시집과 그의 평전 등이 나와 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고난을 당하는 민중을 직접 보고 그들의 아픔을 시로 옮겼다. 그의 문학성은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되어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말로는 비극으로 끝났다. 1973년 피노체트가 구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시로써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병상에서 숨을 거두었다.
 

라 차스코나 앞에서 파블로 네루다를 기억하며 증표 하나를 남겼다.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칠레에서 네루다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그가 살았던 세 곳이 아직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준히 방문되고 있다. 산티아고에서 가까운 항구 도시 발파라이소의 라 세바스티아나, 그가 죽고 그의 무덤이 있는 이슬라 네그라 그리고  산티아고 시내에 있는 라 차스코나.

이 세 곳 중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방문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곳이 라 차스코나. 기억과 인권 박물관 앞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라 차스코나를 가는 중 기사는 어떻게 그런 곳을 아느냐고 묻는다. 머나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가 칠레인들도 많이 찾지 않는 곳을 가자니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나는 네루다는 한국에서도 매우 유명한 시인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의 사랑의 시와 민중을 노래한 시를 나도 많이 읽었다고 하자 놀라면서 반가워한다.
 

라 차스코나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대신 정원에서 한 장을 찍었다. 겉보기엔 주택가의 평범한 주택일 뿐이다.

 
라 차스코나는 도심에서 약간 비껴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주택인데 들어가 보니 매우 아기자기한 집이었다.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건물은 약간 미로같은 구조를 취하고 있고 아담한 정원도 있었다.

여기가 바로 네루다가 그의 애인 마틸다 우르티아를 비밀스럽게 만나던 집이다. 네루다는 세 명의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마지막 여인이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옆에 있었던 이가 그녀다.

라 차스코나는 생전의 네루다와 마틸다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그 생생한 모습을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네루다의 연인 마틸다 우르티아. 오른 쪽 머리카락을 잘 보면 네루다의 얼굴을 발견할 것이다.

 
라 차스코나 초입 응접실에서 본 마틸다의 초상화가 머리에 남는다. 이것은 네루다가 당대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의뢰해 그린 그녀의 초상화인데, 한 몸에 두 얼굴의 마틸다를 그렸다. 한 얼굴은 대중에게 알려진 가수로서의 마틸다, 또 다른 얼굴은 네루다의 애인으로서의 마틸다.

재미 있는 것은 마틸다의 머리카락 속에 한 인물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네루다다. 나는 라 차스코나에서는 그림 속에서 네루다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귀국한 후 인터넷에서 이 그림을 찾아 이모저모 확대해 보고 나서야 네루다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림의 오른 쪽 머리카락을 보면 남자의 코가 보이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네루다의 얼굴이다.  이것은  독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내 눈에만 보일지 모른다. 독자들이여 보고 또 보라, 그리하면 보일 것이다, 네루다의 얼굴이.
 

칠레 대통령 궁

 
나의 세 번째 행선지는 대통령궁의 아옌데 동상. 일련의 행선지가 모두 칠레의 민주화와 인권과 연결이 되어 있다.

아옌데는 피노체트가 쓰러트린 칠레 사회주의 정당 출신의 대통령이다. 그는 칠레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이다.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다음 최악의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진보적인 개혁조치를 시도하였으나 보수 우파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마침내 보수 우파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가 구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정권을 잡는다. 아옌데는 구데타가 일어났음에도 피신하지 않고 대통령 궁에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대통령 궁 옆에서 근위병들이 행진을 한다.

 

대통령궁 뒷 쪽 광장 한 켠에 아옌데의 동상이 있다. 죽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동상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을 찾아 주변을 뺑뺑 돌며 역대 대통령 동상을 찾았다. 마침내 대통령 궁 후면 광장 한 켠에서 그의 동상을 찾았다.

칠레인들은 비록 그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뜻을 기리는 일에 동참했다. 그가 역대 대통령 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대통령궁 주변 동상 대열에 합류했으니 말이다. 이것이 과거를 기억하는 그들의 방법이리라.

그를 기억하기 위해, 칠레를 기억하기 위해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산티아고의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에 있는 산티아고의 건설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

 
이날 나의 마지막 행선지는 아르마스 광장. 산티아고도 다른 남미 도시처럼 구 도심 한 가운데에 아르마스 광장을 갖고 있다. 산티아고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이곳도 대성당이 광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데 대성당 맞은 편에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누군지 가서 확인하니 페드로 데 발디비아. 누군지 알 것 같다. 이 사람은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원주민을 제압하고 새로운 도시 산티아고를 건설한 인물이다. 그해가 1541이다.

그때로부터 산티아고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비록 정복자이긴 하더라도 산티아고의 건설자라는 칭호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11 끝)